인종차별이 죄라고 성경은 말한다
by Tim Keller2020-07-15

성경은 사실상 인종 차별과 관련해서 아무런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현대 사상가들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인종”과 “백인”은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1400년대 전까지 많은 유럽의 국가들은 자신들을 하나의 인종(백인)으로 보기보다는 각기 다른 종족과 국가적 집단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국 사람들은 독일이나 프랑스 “인종”을 자신들과는 반대되는 사람들로 인식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노예들이 거래되기 시작하면서, 흑인을 포함해서 백인이 아닌 인종들과 대비되는 “백인”이라는 생각이 점차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그 생각은 노예 제도를 정당화하는데 활용되었고, 또한 결코 고대에서는 찾을 수 없는 강력한 인종적 근거를 만들어냈다. 


“백인”이라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다. 첫 번째로, 이 생각은 추상적이고, 종족적인 정체성과는 달리 당신이 사는 장소와 문화에 근거하지 않는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아일랜드인이나 독일인 또는 스웨덴인이 아니라, 백인이라는 사실이다. 엄청난 수의 아일랜드인과 이태리인이 미국에 들어오기 시작하던 1800년대 중반과 후반, 그들은 자신들을 “백인”이라고도 또 미국에서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인종의 일부라고도 인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궁극적으로 그런 인정을 받게 되었다. 두 번째로, 지금 현재 네 개 또는 다섯 개로 구분되는 인종을 단지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이제는 인류 전체를 아주 확실한 계층으로 더 빠르게 분류하는 방법이 생겼다. 


이런 근대의 발전은 아주 치명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인종 차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인종에 대한 생각이 노예제도와 식민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백인들이 근대에 만들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성경이 부족주의나 민족적 편견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는 게 당연하지만 인종 차별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늘 보고 있듯이, 자신을 높이 올리고 합리화하려는 인간의 깊은 욕구는 자연스럽게 “타자화(Othering)”라는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 어떤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골라 당신과 비교해 더 열등한 사람들로 규정하는 것이다. “타자화”는 성경 전반에 걸쳐서 드러난다.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을 한번 보자. 누가복음 18장에는 다른 사람들을 “얕잡아보는” 그들의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 말 그대로 이 바리새인은 여기서 “타자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분류해서 계층을 설정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을 경멸함으로 자신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종적인 “타자화” 행위는 아니다. 그럼 성경에 인종 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가? 나는 나온다고 믿는다.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베드로가 거부했을 때, 그는 다름 아니라 현대의 인종 차별주의자가 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베드로는 그들의 종족적 또는 국가적 배경과 관계없이 이방인을 어떤 범주에 포함시킴으로 그들을 “인종화” 했다. 또한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계층 구조를 설정했고, 그러고는 그들을 “타자화”했다. 


현대에 생긴 “백인”이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성경이 인종 차별을 다루지 않는다는 주장이 가진 위험 중 하나는 오로지 백인만이 억압적인 “타자화”를 할 수 있다는 은근히 암시를 던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서 온 모든 사람들은 각 대륙마다 예외 없이 자신들의 고유한 버전의 인종화 및 “계층화” 대상을 가지고 있다.


인종 차별은 개인적인 죄만이 아니라 집단적인 죄이기도 한 것인가


오늘날 인종 차별과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되는 점은 인종 차별이 과연 ‘시스템적인’ 또는 ‘구조적인’ 인종 차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런 주장이 함축하는 바는 인종 차별에는 고의적이고 개인적인 차별도 있지만, 동시에 소수 인종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지배적인 인종 그룹이 지지하는 사회 구조적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회 구조적 차별 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개인들은 결코 자신들이 그런 차별 시스템을 지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결코 의식적인 인종 차별적 생각이나 행동도 하지 않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사실인 경우에 도출되는 결론은 이것이다. 비록 한 개인이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수 인종을 억압하는 구조의 해체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집단적인 차원에서 그 개인은 여전히 유죄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옳은가?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대로 보자면, 그 대답은 예스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시스템적이고 개인적인 인종 차별, 두 가지가 다 존재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성경이 개인과 집단의 죄와 책임, 두 가지를 다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 특히 미국 백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뭔가를 잘못하지 않은 이상 잘못된 상황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면에서 훨씬 더 실제적이다. 다니엘은 선조의 죄를 회개했다(단 9). 아간의 가족은 아간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절도죄 때문에 모조리 몰살 당했다(수 7). 서구의 개인적인 관점과 달리 성경은 우리의 성품과 행동이 순전히 우리 개인의 결정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성품은 많은 부분에서 가족과 공동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아간의 가족은 아간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와 관련해 깊은 관련이 있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아간의 죄에 공범자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다니엘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공동체의 결과물임을 인식했고, 그렇기에 자기 자신도 공동체가 지은 죄에 가담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신명기 23:3-8와 사무엘하 21:1과 같은 본문은 죄를 지은 개인이 죽고 난 이후에도 하나님은 그 죄를 나라와 백성에게 묻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성경이 이 세상에 불의한 사회 제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언 10장에서 12장까지를 보면, 한 개인의 무책임이 누군가를 가난에 빠뜨릴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많은 구절이 나온다(잠 10:4; 12:17). 그러나 잠언 13장 23절은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함으로 양식이 많아지거니와 불의로 말미암아 가산을 탕진하는 자가 있느니라.”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가난과 불의를 결코 개인의 행동 또는 결정의 탓으로만 돌리지도 않지만, 동시에 그렇다고 모든 잘못을 무조건 다 사회 구조의 책임으로만 돌리지도 않는다. 성경은 또한 부유한 이들만을 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사법 제도, 시장 가격을 조작하는 사업 관행, 그리고 불공정한 노동 관행을 비난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지금 다루는 주제와 관련한 마지막 다음 글에서 다룰 한 가지를 잠시 미리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 문화에는 정의와 관련해서 서로 경쟁하는 여러 이론이 있다. 각각의 개인에게 그들에게 합당한 몫을 나눠주는 것을 정의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또 어떤 이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가난과 범죄가 시스템적인 불의의 결과로 볼 뿐,  결코 개인의 책임으로 보지 않는 이들도 있다. 예를 들어, 사회적 불의 때문에 시위한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기물을 훼손하는 행동을 보면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관점이 있다. 동시에 또 다른 관점은 시위 중에 기물을 훼손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도덕적이 책임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구조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견해는 불평등한 결과를 결코 개인 행동의 결과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이 사회 모든 부조리는 언제나 사회적 압력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기독교인이 당면한 어려움은 이것이다. 첫 번째의 보수적인 관점이 성경이 요구하는 수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당하게 거부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무조건적으로 두 번째의 진보적인 관점을 다 받아들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관점이 만들어낸  용어까지 가감없이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점은 다 세속적이고 축소지향적이며, 무엇보다 단순하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개인적인 차원과 시스템적인 차원,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아니, 그것보다도 훨씬 더 높은 수준이다. 인간은 단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를 넘어서 영혼과 육체를 가진 존재다. 실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세상(kosmos)”은 단지 물질적인 세계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6), 영적인 실재,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아름답게 창조된 이 세상 속에서 가짜 신들을 만들어내는 타락한 인간의 필연적인 성향까지 포함하고 있다(요1 2:15-16). 성경적 관점에 따라서 “정의를 행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엄청난 기도와 복음 전도를 필요로 한다. 정의에 대한 성경적 견해는 개인의 책임과 사회 구조에 전적으로 중점을 두면서도 이 세계가 축소하고 있는 대안적 견해를 훨씬 뛰어 넘는, 인간 생활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시스템적인 인종 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은 백인을 선호하고 백인이 아닌 사람은 배제하는 관행을 제도화함으로 일어난다. 어떤 관행이 제도화 될 때, 애초에 그 관행을 시작한 사람이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관행이 여전히 계속될 수 있도록 남은 사람들은 강화된 구조를 만들어낸다. 여기 몇 가지 예가 있다. 


미국의 공립학교 시스템은 지역 재산세로 운영된다. 돈이 없는 가난한 동네는 따라서 질이 낮은 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수준 낮은 교육은 결국 그 동네의 가난을 더 부추기게 되고, 학교를 운영하는 데 투자되는 자원은 점점 더 적어진다. 미국에서 흑인의 가난 지수는 전체 인구와 비교해서 두 배가 더 높고, 열악한 학교 재정 지원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흑인 커뮤니티를 더 불평등한 덫에 걸리게 만든다. 


공식적이라는 면에서는 덜 하지만, 문제적이라는 면에서는 조금도 덜 하지 않은 또 하나의 예를 살펴보자. 비즈니스를 하다보면 당신이 아는 사람 또는 당신이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을 뽑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이 갖고 있는 사회적 관계라는 게 거의 다 인종과 사회 계층에 따라서 결정되다 보니, 결국 권력을 가진 사람들(보통 혜택을 많이 받는 백인 계층)이 신규 인원을 뽑을 때는 같은 인종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구하기 마련이다. 그 결과 동일한 자격을 가진 능력있는 다른 인종과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진다. 


훨씬 덜 비공식적이지만 그 파급력만큼은 실로 엄청난 시스템적인 불의의 형태는 이 나라의 문화적인 프로세스가 어떻게 미국 내 백인들이 다른 인종을 불신하도록 만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최근 뉴욕타임즈는 프랑스가 인근 유럽 나라보다 코로나 사태를 훨씬 잘 처리했는데, 프랑스 국민은 다른 나라의 국민보다 지도자에 대해서 훨씬 더 부정적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어느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그 이유는 이렇다. “리더십에 대한 불신은 프랑스 사회를 형성하는 구조적인 요소다.” 이런 불신은 수백 년에 걸쳐서 만들어졌고, 지금도 프랑스 문화 깊이 자리잡은 채 수백 만의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또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내려오고 있다. 미국의 경우, 백인이 아닌 인종에 대한 불신, 특히 흑인에 대한 불신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구조적이고 그 뿌리가 매우 깊다. 그 불신의 감정은 수도 없이 많은 방법을 통해서 백인이 아닌 인종을 대하는 학교 선생, 은행 직원, 그리고 회사 사장의 일상 생활 속에서 드러난다. 특정 그룹을 대하는 영향력과 권력을 가진 이러한 모든 인물들이 보이는 태도 하나 하나가 모여서 결과적으로 타인종을 교육적, 심리적, 경제적, 또 물리적으로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형법상 흑인이 같은 죄를 지은 백인에 비해서 부당하게 취급받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흑인은 더 자주 구금 또는 체포되고, 같은 죄를 지은 백인에 비해서 더 무거운 형량을 받는다. 정책을 바꾸고 또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경찰서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통해서 경찰 개혁을 위한 여러 노력이 정부 최상위로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잔인한 사고가 그치지 않는 현실을 보면 최소한 사법 시스템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불평등한 대우의 구조적 측면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고 확고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인종 차별을 회개하며


인종 차별을 회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한편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 주 대상은 하나님이다. 모든 죄는 결국 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당신이 보다 더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 이웃을 향한 사랑, 새 창조, 그리고 은혜의 복음을 훼손한 것이 있다면, 거기에 대해서도 회개하라. 그러나 동시에 “나쁜 의도를 가지고” 고의로 지은 죄만을 회개하도록 우리가 부름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시 19:13).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그렇기에 우리는 행여라도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종적인 타자화”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마음을 다해서 회개해야 한다.


다니엘서 9장과 또 다른 곳에서 만나는 집단적 회개와 비슷한 모습을 미국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여러 다양한 제안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하나만 언급하겠다. C.S. 루이스(C.S. Lewis)는 그의 책 ‘네 가지 사랑(The Four Loves)’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아예 없었던 일로 쓸어버리는 순간 나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타락하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어떤 사회 이론에 따르다 보면 미국 역사와 관련해서는 좋은 말을 할 게 없다. 그러나 집단적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다양한 인종 집단을 향해 어떻게 대해왔는지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그의 책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race)”에서 우리가 어떤 특정 집단을 사회에서 배제하는 데는 최소한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가 “제거”인데, 말 그대로 죽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쫓아내는 것이다(홀로코스트를 생각하라). 두 번째가 “지배”인데, 특정한 테두리 내에서 관리하기 위해 그들을 분리하고 테러를 행하는 방식이다. 세 번째가 “동화”인데, 자신들의 고유한 특색과 문화를 버리고 대신 지배층의 문화 규범을 받아들이는 개인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네 번째가 “포기”인데, 특정 그룹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권리도 보호하지 않는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은 최소한 이 중에서 세 가지의 배제 형태를 흑인들에게 행사했고,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도 이런 배제 관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런 역사를 추적하고 또 그 역사를 인정하는 것은 집단 회개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우리는 회개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8). 인종 차별이라는 죄를 회개하고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데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회개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회개의 열매가 진짜인가의 여부가 달려있다. 인종 차별에 대한 집단 회개를 한다고 할 때, 젊은 2세대 중국 이민자가 앵글로색슨 백인과 동일한 책임감을 가지고 회개해야 할까? 물론 인종 계층 구조화의 지속적인 제도화 과정의 일부로 아시아인이 “백인” 범주로 인정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기독교인이 인종 차별에 대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두 군데의 핵심 장소가 있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이다. 


미국 내 모든 커뮤니티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교회가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회개의 열매를 맺는 한 방법은 교회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금 더 많이 자신의 권력을 희생하고, 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조금 더 손길을 내어줌으로써 교회 밖 세상에서 사람들을 나누고있는 인종적 또 문화적 장벽이 교회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길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운영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내 말이 아주 듣기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역동적이고 다인종에 다종족 교회를 이끄는 것은 실로 어려움으로 가득한 사역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아주 좋은 책이 최근에 나왔다. 어윈 인스 주니어(Irwyn Ince, Jr)가 쓴 ‘아름다운 커뮤니티: 일치, 다양함 그리고 최고의 교회(The Beautiful Community: Unity, Diversity, and the Church at its Best (IVP, 2020))’이다. 나온 지가 좀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도움이 되는 책으로 조지 얀시 (George A. Yancey)가 쓴 ‘한 몸, 한 영혼: 성공적인 다인종 교회를 위한 원칙(One Body One Spirit: Principles of Successful Multiracial Churches (IVP, 2003))’을 추천한다. 


교회 밖에서, 기독교인은 인종적 불의와 싸우고 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을 위한 방법은 너무나도 많아 하나하나 이름을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내가 보기에 이 싸움에서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할 분야는 교육적 평등과 형사 소송에 있어서 사법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개혁을 성취하는 것이다. 후자와 관련해서 도움이 되는, 두 권의 탁월한 책이 있다(둘 다 학구적인 독자를 위해 쓰였다). 윌리엄 스턴츠(William J. Stuntz)가 쓴 ‘미국 형사 사법 제도의 붕괴(The Collapse of the American Criminal Justice System (Harvard, 2011))’와 앤쏘니 브래들리(Anthony B. Bradley)가 쓴 ‘과도한 형사소송과 집단 수감의 종말: 문화 사회를 위한 희망(Ending Overcriminalization and Mass Incarceration: Hope for Civil Society (Cambridge, 2018))’이다. 사법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뭔가 변화를 만들고 싶은 기독교인에게, 기독교인 학자가 쓴 이 두 권의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출처: https://quarterly.gospelinlife.com

원제: The sin of racism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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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m Keller

팀 켈러(1950-2023)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로 섬겼다. City to City와 Faith & Work, The Gospel Coalition을 설립하여 교회 개척, 복음 갱신, 복음 연합에 큰 역할을 했으며,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과 수많은 컨퍼런스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복음적 변증가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