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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음, 하나님 경외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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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Michael Reeves  /  작성일 20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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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ude Beck on Unsplash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Those who have the fear of him will not be afraid of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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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0편 4절은 당신의 눈을 사로잡는 놀라운 구절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이 구절은 좀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리이다”라고 해야 맞지 않은가? 굳이 경외, 그러니까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오려면 구절이 “그러나 심판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시편 구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더 이상한 것은, 이 시편 저자가 도무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4절을 지나 그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5-6절). 그는 이렇게 확신한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7절).


성경의 명령일 뿐 아니라 복음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은 사실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정반대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모인다.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18–20).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새 언약이 주는 경외


C. I. 스코필드(Scofield)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구약의 경건함을 표현하는 구절 중 하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단지 구약의 경건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건전한 경외감은 사실상 새 언약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축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과 관련해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39–40).


예레미야 33장에서 새 언약이 가진 경외감의 특징을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예상을 허물 정도로 충격적인 방식으로 설명한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8–9).


물론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만, 이것은 결코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예레미야 33장에서 주님은 순전한 축복이 무엇인지 하나 하나 풀어놓으셨다. 그는 그의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용서하시고 또 그들에게 위대한 일을 하실 것이다. 바로 이런 모든 좋은 것들 때문에 그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의 반대편에 있는 두려움도 아니다. 오히려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을 통해서 묘사한 경외감의 일종이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 이것은 “주님과 그의 선하심을 향해서 가지는” 경외감이다(행 9:31 참조).


효심으로서 경외


이것은 또한 신학자들이 종종 “종들이 주인을 향해 가지는 두려움”과 비교해 “효심”으로 표현하는 경외감이기도 하다(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지는 마음). 사실상, 이것은 우리 예수님이 가졌던 효심이고, 믿는 자라면 누구나 다 그 효심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고, 이사야 선지자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사 11:1–3)


효심은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지는 기쁜 공경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오로지 즐거움 만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다시 말하지만, 완전히 반대가 된다. 예수님 안에 거한 성령님은 주를 향한 경외감의 성령님이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런 효심은 예수님이 즐거이 가졌던 아버지를 향한 공경심이었다. 이는 참으로 그 경이로움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부분이다. 


용서는 경외감이 자라는 토양이다


시편 130편 4절은 용서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바른 경외감이 자라도록 하는 비옥한 토양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또한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십자가가 없다면, 하나님은 단지 공포스런 심판자고 우리는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떨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죄인으로서의 자연적인 두려움이, 사랑받는 자녀들이 가지는 떨리는 경외감으로 바뀌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용서와 믿음에 의한 칭의 때문이다. 


존 번연(John Bunyan)은 이렇게 썼다. “위대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아무 가치 없는 자에게, 아무 자격 없는 자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는 일을 하려고만 하는 자에게 좋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떨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Could Forgiveness Possibly Lead to Fear?

번역: 무제


이런 효심은 예수님이 즐거이 가졌던 아버지를 향한 공경심이었다

This filial fear is part of the Son’s pleasurable adoration of his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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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ichael Reeves

마이클 리브즈는 King's College(PhD)에서 학위를 받았고, 현재 영국에 있는 Union School of Theology의 신학부 학장이자 교수이다. 저서로는 크로스웨이에서 조만간 나올 ‘Rejoice and Tremble: The Surprising Good News of the Fear of God’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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