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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1926-2020)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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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Justin Taylor  /  작성일 202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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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스로를 “진리와 지혜의 옛 길로 돌아오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목소리”라고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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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 소천 1주기를 맞이하여, 2020년 7월 17일, 향년 93세로 주님의 품에 안긴 그의 생애를 기리는 특집입니다-편집부   

패커는 일생 동안 영국 성공회에 소속되었으며, 생의 전반기는 영국에서, 후반기는 캐나다에서 보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게 신학을 대중화시킨 사람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근 70년의 저술과 사역 기간 동안, 패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일과 그분께 기도하는 일,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해서는 거룩한 길을 가며 회개하라고, 마음을 다해 성령과 동행하며 내재하는 죄와 싸우라고 촉구했다. 또한 성경의 권위를 수호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가르치며 세우는 지상사명의 대의를 추구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이 기독교 신앙의 거목과 같이 여기며 열렬히 사모했던 청교도를 현 세대 앞에 새롭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진리와 지혜의 옛 길로 돌아오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목소리”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전 생애를 바쳐 “새로울수록 진리에 가깝고, 최신의 이론만 올바르며, 기존의 토대를 바꾸기만 하면 진보라는 생각, 다시 말해 가장 최근에 한 말을 마지막 결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맞서 싸웠다.


그는 당대에 일어나는 논쟁에 기꺼이 가담하여 의견을 피력했지만, 스스로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푸른 초장을 연상시키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어린 시절


패커는 1926년 7월 22일 영국 글로스터셔 북쪽에 있는 트와이닝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제임스와 도로시 패커 부부의 맏이였다. 유일한 동생은 마거릿인데 1929년에 태어났다.


패커의 가족은 중산층에 속했으며 성공회 교단에서 명목상의 신앙을 유지했다. 집 근처에 있는 세인트캐더린교회(St. Catharine’s Church)에 열심히 다니긴 했으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식사 시간에도 기도하는 법이 없었다.


1933년 9월, 일곱 살 때였다. 패커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한테 괴롭힘을 당하며 차도로 쫓겨 나오다가 그만 지나가던 식료품 트럭과 부딪히고 말았다. 그 결과 뇌수술을 받고 3주 동안 입원했으며, 회복을 위해 6개월 간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 또한 사고로 인해 이마의 오른쪽 측면 전두부가 깨져 움푹 들어가게 되었는데, 훗날 그는 한쪽 끝을 살짝 깨뜨린 달걀 모양에 자신의 머리를 비교하기도 했다. 그렇게 깨진 뼈 조각은 그가 살던 지역에서 근무하던 한 노련한 의사가 제거해 주었다. 그 의사는 패커에게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검은색 알루미늄 판을 고무줄로 둘러 착용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운동도 하지 말라고 금했다. 그러자 패커는 혼자 지내며 책읽기나 글쓰기 따위에만 점점 더 몰입하게 되었다. 이마에 두르고 있던 알루미늄 판은 이후로 8년 동안이나 착용했고,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더 이상 착용하지 않기로 했다.


1937년 열한 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아침, 패커는 자전거 선물을 받길 기대하며 잠에서 깼다. 자전거는 그 나이쯤 되면 으레 받는 선물이었는데, 그걸 받고 싶다고 넌지시 말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커의 부모는 오래되고 무거운 타자기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상태는 매우 좋았다. 패커 전기를 쓴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그 선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건 패커가 요구한 선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선물임을 곧 알게 되었다. [중략] 그렇게 최고의 선물이 된 타자기는 유년 시절에 누린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1937년 가을, 패커는 초등학교에서 문법학교(The Crypt School)로 진학했다. 거기서 그는 자기 학급에서 유일하게 고전을 전공하는 학생이 되었다. 리랜드 라이큰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 학교는 헨리 8세가 로마교회와 절교하고 국교회를 세운 시대에 속한 1539년에 설립된 명문이었다. 원래는 지역 교회의 지하실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크립트’(Crypt)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당시 패커가 가진 명목적인 기독교 신앙의 관점으로 보면 별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이후 그가 걷게 될 길에 비추어보면, 그 학교 선배 중에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자요 전도자인 조지 휫필드가 있었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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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패커는 반 친구와 함께 체스를 하게 되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유니테리언파에 속한 목회자였다. 그래서인지 친구는 패커를 설득하며 유니테리언주의를 받아들이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패커는 왜 신약성경의 일부만 수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부인하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이후 패커는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에 이어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읽었다. 그렇게 십대를 보내며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킹제임스 성경도 시간을 내어 읽었고, 그 모든 독서가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비록 그때까지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진 못했지만, 나중에 패커는 그 당시 자신이 구원의 문턱에 절반쯤은 이르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열네 살이 되도록 그는 회심이라든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세인트캐더린교회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회심


열여덟 살에 패커는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교에 들어가 코퍼스크리스티칼리지(Corpus Christi College)에서 고전을 공부하게 되었다. 자신의 묘사에 의하면, 뭔가 어색한 모습에 수줍음을 많이 타던 지적 괴짜로서 여행용 트렁크 하나를 손에 들고 옥스퍼드에 도착했다. 당시 아버지가 철도 회사(The Great Western Railway)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기차로 한 시간가량 되는 거리를 공짜 티켓으로 올 수 있었다.


그리고 3주가 지난 1944년 10월 22일, 패커는 세인트알데이트교회(St. Aldate’s Church)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하여 복음 설교를 듣게 되었다. 어느 연로한 성공회 목사가 설교했다. 성경 본문을 해설할 때는 따분하게 들렸다. 그런데 후반부에 이르자 설교자가 자신이 어릴 때 수련회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때 자신이 정말로 그리스도인인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패커는 그 이야기를 열중해 듣다가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교가 끝나고 ‘내 모습 이대로’(Just As I Am)를 찬양하며 믿음을 갖도록 초청하는 시간이 되자, 패커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로 했다. 이는 1735년에 조지 휫필드가 회심한 장소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청교도


같은 해인 1944년, 이미 은퇴하여 시력을 잃어가고 있던 어느 성공회 목사가 자신의 수많은 장서를 옥스퍼드 내의 기독교 연합 단체인 OICCU(Oxford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에 기증했다. OICCU 리더들은 당시 책벌레였던 패커에게 그 장서를 정리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거기에는 16-17세기 고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패커는 아직 고스란히 포장되어 있던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작 세트를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시험이나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을 흥미 있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책을 열어 탐독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그 어떤 신학자보다도 존 오웬에게 큰 빚을 졌다. 그리고 그가 쓴 어떤 책보다도 죄 죽임을 다룬 책에 큰 빚을 졌다.”


이후에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현대판 청교도로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대서양 양편에서 사역했던 저 위대한 17세기 리더들과 같이 신학자와 설교자와 목회자의 역할을 자기 안에 다 통합시키는 사람,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또한 그는 청교도가 보여 준 영성을 현대 복음주의자의 영성과 대조하며 후자에게 전자를 본받아야 한다고 요청했다. 특히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흔히 그리스도인이 서로 만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하는 사역이나 자신이 가진 관심사 또는 자신이 아는 교인이나 자신이 속한 교회의 상태 내지는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곧잘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매일 경험하는지는 거의 나누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 서적이나 잡지는 기독교 교리와 규범,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관한 문제, 교회 예배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다룬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귐이 실제로 어떻게 내면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건전한 교리에 관해서는 그토록 많이 설교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주님과 나누는 대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는 바가 없다.”


“혼자 있을 때든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든, 우리는 하나님과 죄인이 서로 사귀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묵상하는 데 별로 시간이 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사귐을 당연하게 여기며 다른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고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하찮게 취급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초기 저술과 직책


패커는 1952년에 첫 번째 논문을 출판했다. ‘이신칭의에 대한 청교도의 논의’(The Puritan Treatment of Justification by Faith)에 관한 주제였다.

그는 1948년에 옥스퍼드 코퍼스크리스티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후로 런던에 소재한 오크힐신학교(Oak Hill Theological College)에서 처음으로 강사 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및 철학을 가르쳤다. 바로 이 1948-1949년 학기에 스물두 살이던 패커는 매주일 저녁 웨스트민스터채플(Westminster Chapel)에 가서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때 로이드 존스는 오십 세였다. 당시까지 패커는 그러한 설교를 결코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마치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충격을 주었으며, 하나님을 지각하는 마음을 그 누구보다 크게 일깨워 주는 결과를 청중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내가 알던 누구보다도 탁월한 사람이었다. 나를 가르친 어떠한 교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그에게 있음을 확신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알게 되었고, 패커는 사람들이 청교도의 식견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정기 모임을 열자고 로이드 존스에게 제안했다. 이에 두 사람은 청교도 컨퍼런스를 공동으로 기획하여 거의 20년 동안 주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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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3년 동안 패커는 옥스퍼드 위클리프홀(Wycliffe Hall)에서 성직을 받기 위해 공부했고 박사 과정도 함께 진행했다. 그리고 1952년에 성공회 부제로, 1953년에는 버밍엄성당(Birmingham Cathedral)에서 사제로 임명되었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 그는 버밍엄 근교 하본 지역에 있던 세인트존스교회(St. John’s Church)에서 부사역자로 섬겼으며, 그 사이 옥스퍼드에서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에 관한 400쪽 짜리 박사 논문을 마치게 되었다. 그 결과 1954년에 석사 및 박사 학위를 함께 받았다.


1954년 7월 17일에 패커는 웨일스 여성인 키트 뮬렛과 결혼했다. 그녀는 패커가 1952년 늦은 봄 서리 지역에서 강연한 후에 만난 젊은 간호사였다. 이후 둘은 세 자녀, 루스, 나오미, 마틴을 입양하게 된다.


1955년에 패커 가족은 브리스틀로 이주했다. 그리고 패커는 그곳에 있는 틴데일홀(Tyndale Hall)에서 6년 동안 조교수로 섬기며 두 편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첫 번째는 ‘케직과 개혁파 성화 교리’(Keswick and the Reformed Doctrine of Sanctification, 1955)라는 제목이 달린 논문이었다. 이 글은 철저한 펠라기우스주의에 기초를 둔 완전 성화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기서 패커는 매우 논쟁적인 자세를 드러냈는데, 그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그릇된 경건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막기 위한 목회자의 심정도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건주의로 인해 자기 역시 학생 시절, 거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다. 이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신이 세부적인 내용을 그리 진지하게 살펴보지도 않고 다만 그 가르침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내 생각으로는 이 경우에 관한 한 우리는 끔찍하게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혹 당신이 그 세부적인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그로 인해 도움을 받기는커녕 파멸될 뿐이라고 말이다.”


그의 전기 작가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당시 그 논문이 끼친 영향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패커가 제시한 비판에 대해 케직 분파는 어떠한 답변으로도 반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패커의 논평은 젊은 복음주의자 사이에 확산되던 케직 운동에 종식을 고하는 역할을 했다. [중략] 패커의 비판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신학적 비중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 여겨졌다.”


두 번째 중요한 저술은 1958년 3월, 패커의 나이 서른한 살에 출판된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이었다. 이는 패커의 첫 번째 저서로서 성경의 권위에 관한 역사적 개신교의 입장을 수호하는 작품이었다. 이에 대해 마이클 리브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책은 복음주의자들을 향해 성경에 대한 높은 관점을 견지하라고 외치며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놓았다. 또한 성경에 관한 그들의 지식이 더욱 정교하고 섬세해지도록 도왔다. 이로써 패커는 사실상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는 운동에서 신학적 리더로 우뚝 서게 되었다.”


1961년에 패커 가족은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왔다. 거기서 9년 동안 그는 도서관 책임자로, 또 이어서는 라티머하우스(Latimer House)의 관리자로 섬겼다. 라티머하우스는 패커와 존 스토트가 영국 교회의 신학적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설립한 복음주의 연구 기관이었다.


1960년대에 격월로 발행되던 ‘복음주의 매거진’(Evangelical Magazine)의 편집자 엘리자베스 브론드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연속물을 기고해 달라고 패커에게 부탁했다. 이에 패커는 5년 동안 격월로 기고하여 스무 편이 넘는 아티클을 남겼다.


1970년에 패커는 다시 틴데일홀에 돌아와 학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틴데일홀은 브리스틀에 새로이 설립된 트리니티칼리지(Trinity College)에 통합되었고, 거기서는 알렉 모티어가 학장으로 임명되고 패커가 부학장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변화로 인해 패커는 저술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1970년대 초 패커는 ‘복음주의 매거진’에 연속으로 기고했던 아티클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고자 IVP에 연락했다. 그러나 IVP는 패커가 요구한 책을 출판하기 전에 당시 영국을 휩쓸고 있던 은사주의 문제에 관한 글부터 써 주기를 부탁했다.


그래서 패커는 출판사를 바꿔 호더앤스토튼(Hodder & Stoughton)에 아티클을 가져갔고, 거기서는 흔쾌히 출판을 승낙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 미국에 있던 IVP도 북미 지역의 판권을 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1973년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150만 부 이상이 팔리며 패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다 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쇠퇴하는 현상의 뿌리에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이 확신을 가지고 책을 썼다.”


성경 무오성


1977년 2월, 패커는 캘리포니아 마운트허몬에서 R. C. 스프로울, 존 거스트너, 노먼 가이슬러, 그레고리 반센과 함께 성경의 권위를 논하는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그리고 그 해에 국제성경무오협회(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이 협회는 다시 1년 후 스프로울을 필두로 하여 성경 무오에 대한 시카고 선언(Chicago Statement of Biblical Inerrancy)을 작성하게 되었다.


밴쿠버 리젠트칼리지


옥스퍼드 학부 시절부터 패커와 친했던 제임스 휴스턴은 1979년에 패커를 불러 밴쿠버에 소재한 리젠트칼리지에 교수로 오라고 청했다. 패커는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행정 업무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도 대서양을 넘어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패커는 생을 마칠 때까지 그 학교에 남게 되었다. 1996년에 풀타임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로도 파트타임으로 가르치는 일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논쟁과 분열


패커가 걸어온 길에는 교리적 논쟁과 그로 인한 분열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1966년 10월, 전국복음주의자대회(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에서 로이드 존스는 그 자리에 모여 있는 복음주의자들을 향해 영국 성공회처럼 교리적으로 혼합된 교단에서 나와 독립된 복음주의교회의 연합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시 대회 의장을 맡은 존 스토트는 로이드 존스의 연설이 끝나자 불문율을 깨고 그가 선언한 내용을 공적으로 반대하는 의사를 표명했다. 패커는 대회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그날 저녁 전화로 소식을 들은 후 스토트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렇게 일어난 균열은 1970년에 큰 분열로 나타나게 되었다. 패커가 성공회 복음주의자인 콜린 뷰캐넌과 다른 두 명의 고교회파 저자들과 함께 ‘연합으로 가는 성장: 영국에서 하나의 연합 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제안’(Growing into Union: Proposals for Forming a United Church in England)이라는 책을 출판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인해 로이드 존스는 패커와 결별하며 ‘복음주의 매거진’ 이사회에서도 그를 제명했고 또한 그들이 공동으로 시작했던 청교도 컨퍼런스도 취소하게 되었다.


1994년 3월, 에큐메니컬 운동에 열려 있는 패커의 성향이 또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몇몇 복음주의자와 가톨릭 진영의 인물들과 더불어 찰스 콜슨과 리처드 노이하우스가 공동으로 작성한 ‘복음주의 및 가톨릭 교인 간의 연대’(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라는 문서에 공동으로 서명했다. 그전에 R. C. 스프로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상대와의 전쟁이 격렬해질 때, 우리 쪽 무기고에 제임스 패커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패커가 그 문서에 서명하자 스프로울과 다른 이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왜냐하면 그 문서에는 양측 간의 신학적 차이가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동의한다는 식의 모호한 표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스프로울과 패커는 둘 다 교리적으로는 칭의에 동의했지만, 스프로울은 그 교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한 반면 패커는 그 교리가 중심적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했다. 나중에 패커는 자신이 왜 거기에 서명했는지를 해명하기도 했다.


세 번째 분열 행보는 2002년 패커 자신이 속한 교구에서 일어났다. 바로 밴쿠버 뉴웨스트민스터 지역을 관할하는 성공회 회의에서 동성 간 결혼을 축복하며 예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교에게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날 회의에 참석했던 패커는 결국 항의하는 입장을 표명했는데, 다음과 같이 반대 의사를 밝혀 놓았다.


“이 결정은 아무리 현재 상황을 고려해 보더라도 엄연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진리의 요새이자 보루가 되어야 할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결국 2008년에 패커가 섬긴 교회, 곧 캐나다 성공회 교단(Anglican Church of Canada)에서 가장 큰 세인트존스교회는 투표를 하여 ACC 교단에서 탈퇴하고 아르헨티나에 있는 좀 더 정통성을 가진 교구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패커와 다른 성직자들은 정직되었다. 그리고 서임 시에 부여된 말씀과 성례로 예배를 진행할 수 있는 권한도 철회되었다. 이유는 (1) ACC 교단의 교리와 규율을 공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고 (2) ACC 교단 밖에 있는 다른 교단에 가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패커는 탈퇴를 결정했을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난 수십 년 간 신학의 여정을 걸어오며 매번 방향을 바꿔야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일 바울이었다면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갔을까? 그가 내 입장에 있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나는 그가 지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작가와 독자로서의 패커


패커에 관한 전기를 쓴 리랜드 라이큰은 그의 저술 목록을 종합적으로 구성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


“패커는 강연과 저술 모두에서 자기 앞에 열려 있는 문이라면 모두 다 들어가는 방식을 고수해 왔다. 그의 출판 목록은 표로 다 정리할 수가 없다. 항목이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장르가 매우 넓어 개인적으로 인쇄한 문서와 달리 어떤 배경에서 출판했는지 모두 다 알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며, 똑같은 책이 미국과 영국에서 종종 다른 제목으로 출판된 경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할 뿐 아니라, 그의 저술 중 많은 작품이 때로는 새로운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외에 가장 널리 읽히고 영향력을 끼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복음주의와 하나님의 주권’(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 1971)과 ‘거룩에 대한 추구: 청교도가 바라본 그리스도인의 삶’(The Quest for Godliness: The Puritan Vision of the Christian Life, 1990), 그리고 논문으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 존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죽음의 종식’에 대한 서문’(Saved by His Precious Blood: An Introduction to John Owen’s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1958)과 ‘십자가에서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대리 형벌의 논리에 관하여’(What Did the Cross Achieve? The Logic of Penal Substitution, 1974) 등이 있다.


저술과 교수 사역 외에도 패커는 신학적 고문이자 상담자로, 그리고 수많은 책의 추천인으로 섬겼다. 1980년대 초에는 일리노이 캐럴스트림에서 발간되던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교수였던 케네스 칸처와 함께 고용되었다. 그리고 패커는 선임편집자 직책을 맡았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사무실에 방문하여 신학적 논평을 제공하며 건전한 신학이나 사회학 및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각종 이슈를 비평하는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간행물의 이미지나 컨셉을 구상하는 일까지 포함되었다.


패커는 다양한 책을 추천하는 일을 기꺼이 감당했다. 이는 평신도 독자들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 그가 좋아하던 일이었다. 흔히 그는 결점에 대해서도 관대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추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추천서를 꼼꼼히 읽어보라고 권했다. 곧 자신이 말한 내용만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그리고 어떻게 말했는지까지도 주목해 보라고 권했다. 패커의 추천서는 그 자체로 간결한 명문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패커에게 어떤 책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지 물으면, 주로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제시했다.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J. C. 라일의 ‘거룩’(Holiness),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리처드 백스터의 ‘참 목자상’(The Reformed Pastor), 마틴 루터의 ‘노예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 그리고 존 오웬의 작품 가운데 ‘내재하는 죄’(Indwelling Sin), ‘죄 죽임’(The Mortification of Sin), ‘칭의’(Justification), ‘성령’(The Holy Spirit),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죽음의 종식’(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등이었다.


그가 좋아한 소설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이 있었고, 재미있게 읽을거리로는 살인 사건을 다루는 미스터리물 내지는 탐정 소설 같은 장르를 선호했다. 그래서 일곱 살 때 처음으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탐독하기도 했다. “나는 까다롭게 뒤얽힌 난제를 다루거나 형사가 기막히게 머리를 굴리는 작품, 아니면 결백을 입증하거나 유죄를 드러냄으로써 정의가 실현되는 작품을 즐긴다.”


이중에서도 그가 늘상 좋아했던 책은 ‘천로역정’이었다. 패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말년에 시력을 잃을 때까지 해마다 그 책을 읽었다.


패커의 또 다른 취미 생활은 오래된 재즈를 듣는 일이었다. 열세 살 때였다. 어느 날 저녁에 라디오를 들으며 집에서 숙제를 하는데, 진행자가 1920년대 재즈를 들려주었다. 젤리 롤 모턴의 ‘스팀보트 스톰프’(Steamboat Stomp)라는 곡이었다.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디오 앞으로 갔다. 그리고 넋을 잃은 채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정말이지 호흡조차 할 수 없었다.” 옥스퍼드에 있을 땐 ‘도적들’(The Bandits)이라고 불리는 재즈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불기도 했다. 그러나 토요 모임을 갖는 기독학생회 활동에 방해가 되었고, 게다가 재즈는 사탄이 좋아한다는 말까지 듣게 되어 밴드를 그만두게 되었다. 훗날에는 이렇게 고백했지만 말이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 초기 재즈는 20세기에 가장 가치 있는 문화적 산물이었다.”


1970년에 로이드 존스는 패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청교도 컨퍼런스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기를 전하며 이렇게 기록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오랫동안 자네가 가진 훌륭한 지성에 탄복했을 뿐 아니라 자네라는 사람 자체를 깊이 존중하며 살아왔네. 오래 전에는 워필드의 전통을 이어 중요한 작품 하나를 써 주길 바라기도 했지. 그런데 자네는 교회 문제에 더 관여하길 원한다는 뜻을 밝혀 왔다네. 내가 보기에 그러한 뜻은 교회에 커다란 비극이자 실질적인 손실을 가져온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네.”


패커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조직신학 서적으로는 ‘콘사이스 신학’(Concise Theology)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아흔네 가지 교리를 항목당 600단어 정도로 설명해 놓고 있다(이 책은 크로스웨이 출판사에서 패커 탄생 94주년을 기념하여 하드커버로 재출간될 예정이다). 패커는 압축적이면서도 광범위한 자신만의 문체를 구사하며 이 책이 기획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의 활동으로서 신학이란 일종의 실뜨기 놀이와 같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별개의 영역을 이루는 과목들로 구성된다. 곧 성경 본문을 해설하는 과목(주해신학), 본문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 본문 자체가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과목(성경신학), 기독교 신앙이 과거에 어떻게 진술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과목(역사신학), 그러한 신앙의 내용을 오늘날 개념으로 형식화하는 과목(조직신학), 신앙과 행위의 관계를 규명하는 과목(윤리학), 기독교가 제시하는 진리와 지혜를 논증하고 변호하는 과목(변증학),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밝히는 과목(선교학),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영적 자원을 비축하는 과목(영성학), 공동의 예배를 연구하는 과목(예배학), 그리고 각종 사역을 살펴보는 과목(실천신학)으로 구성된다.”


20세기를 거의 끝낼 시점에, 패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세계 교회를 위해 가장 의미심장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바로 크로스웨이 출판사 대표인 레인 데니스 박사가 패커에게 새로운 성경 번역의 총괄편집자를 맡아 주기를 청한 것이다. 이에 패커는 성경 이름도 제안하게 되는데, 그 이름이 바로 ESV(English Standard Version)이다.


이 성경은 2001년에 출판되었고, 패커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ESV 성경의 총괄편집자로 섬긴 일은 큰 특권이었다. 그 성경을 편찬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을 돌아보니, 그 일은 분명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했던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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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커의 마지막 사역은 교리 교육을 회복할 수 있도록 교회를 돕는 데 집중되었다. 그래서 말년에는 기독교 신앙의 지침이 되는 교리문답을 갱신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는 데 헌신했다. 이러한 사역은 북미 성공회 교단을 위한 교리 교육의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 성공회 교리문답’(To Be a Christian: An Anglican Catechism)이라는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패커가 최종적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하게 된 일은, 아내가 집에서 큰 소리로 읽어 주는 원고를 들으며 구두로 편집하는 일이었다. 그 원고는 오랫동안 교실에서 가르친 내용을 토대로 마련되었다. 이는 2021년 5월 크로스웨이에서 ‘성공회 신학의 유산’(The Heritage of Anglican Theology)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한 사람으로서의 패커


지금까지 패커가 이룬 신학이나 사역을 평론하는 이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그가 지닌 인생의 해학이라든가 생기 있게 반짝이는 눈망울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패커는 자신이 차가운 두뇌만 가진 사람이나 아이디어만 공급하는 사람으로 그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의 평생 친구인 티모시 조지는 패커라는 사람을 실제로 바라볼 때 그 모습이 어떠한지를 이렇게 묘사했다.


“억누를 수 없는 미소를 소유한 그의 웃음은 가장 어두운 만남 가운데도 빛을 비춰 준다.”


“그의 사랑은 따뜻한 인간미가 있는 모든 대상을 향해 환히 빛난다.”


“자신이 지닌 탁월한 생각과 그 생각을 표현하는 데 가장 어울리는 말을 찾아내는 그의 능력은 어디에도 비할 데 없다.”


“무엇이든 가짜라면 참지 못하는 그는 성도가 지녀야 할 성품과 영성을 깊이 소유했다.”


여기에 개인적인 차원에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감사하게도 나는 매번 그를 만날 때마다 패커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가 만난 주님이 위대하시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매번 패커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이 아니라 주님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패커는 이렇게 설명했다.


“만일 누군가가 기독교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평가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모시는 일을 그가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지 확인해 보면 된다.”


“혹 이러한 생각이 그로 하여금 예배하게 만들고 기도하도록 일깨우며 그의 인생관 전체를 좌우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그는 기독교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패커는 지혜에 있어서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사람이었지만(고전 14:20),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있어서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와 같았다(마 18:4). 나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과 동행하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언제나 경이감을 잃지 않았다.


2015년에 크로스웨이는 패커에 관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때 패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바로 카메라가 없는 장소에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물었다. 자신이 떠나고 난 다음에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말이다.


그는 아무리 평범한 질문을 받아도 대답하기 전에는 잠시 멈추곤 했는데 그날도 그랬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니, 하나의 목소리로 기억된다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권위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고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대속 사건의 놀라움을 전달하는 목소리로 기억된다면 좋겠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을 향해 거룩한 길로 돌아오라고 외친 목소리로,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일탈에 대해서는 강하게 도전한 목소리로 기억된다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논쟁에 휘말릴 때는 공손히 임하려고 노력하면서 타협은 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좋겠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저를 인도해 오신 길을 생각하며 함께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을 감당할 때, 그분의 뚜렷한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누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누렸던 그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말입니다.”




원제: J. I. Packer (1926-2020)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장성우 

패커는 지혜에 있어서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사람이었지만(고전 14:20),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있어서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와 같았다(마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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