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 통신 6: 도대체 칼빈주의가 뭐길래?
by 김은득2020-08-13

국가와 교회에 관련된 칼빈주의 교리는 저와 바빙크를 통해 프랑스 혁명 이후 정교분리의 현대 사회에 걸맞게 변화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 처럼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의 교리를 통해 교회와 국가 간 관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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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1909년 7월의 제네바(Geneva)는 존 칼빈(John Calvin) 탄생 400주년을 맞이하여 매우 들뜨고 흥겨운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유럽 전체와 북미의 개신교도들이 다 함께 바스티옹 공원(Parc des Bastions)에 모여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존 칼빈, 테오도르 베자(Théodore de Bèze), 존 녹스(John Knox)의 전신상이 새겨진 종교개혁 기념비의 제작을 알리는 주춧돌을 놓았던 바로 그 순간은 마치 모든 교단의 장벽이 무너지고 칼빈을 통해 모든 개신교도들이 하나가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참석한 칼빈주의자들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 찬양을! 우리가 칼빈주의자이기에!”라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으로 고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축제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반응이 네덜란드, 그것도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지칭하는 개혁파 개신교도들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제네바의 초대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 400주년 행사에 대한 실망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습니다. 제가 설립한 일간 신문인 De Standaard가 논평하길, 칼빈은 성경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는데, 제네바의 기념행사는 그런 순종의 모습을 그렇게 많이 살펴볼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칼빈주의는 칼빈이라는 영웅을 위해 어떤 기념비도 세운 적이 없다. 제네바의 한 비석만이 그저 칼빈을 생각나게 할 뿐이다. 심지어 칼빈의 무덤조차 잊혀진 상태다. 이게 배은망덕한 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제네바의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네덜란드 개혁주의자들은 종교개혁가들의 전신상을 제작하기 위한 재정적 후원 부탁마저 매몰차게 거절하였습니다.


이런 네덜란드 개혁주의의 제네바 거절과 냉대는 아마도 한국 칼빈주의의 입장에서 매우 이상하게 느껴질 만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칼빈 사랑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칼빈 탄생 500주년(2009년 7월 10일)과 종교개혁 500주년 (2017년 10월 31일)이라고 제네바를 방문한 사실만 봐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물론 저 역시 칼빈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에 있어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칼빈주의자입니다. 그러나 400년 전의 칼빈(물론 한국 교회 성도분들에게는 500년 전)을 무조건적으로 숭상하는 것만이 진정한 칼빈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칼빈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칼빈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칼빈이 이랬다’는 역사적 칼빈도 중요하지만, 칼빈을 현 상황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바로 저의 신칼빈주의(Neo-Calvinism)가 칼빈의 사상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현대 시대에 걸맞게 잘 활용한 일례가 될 것입니다.


한편 여러분들 가운데 제가 그렇게 칼빈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면서 굳이 400주년 행사를 참석하지 않고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가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칼빈에 대한 혐오가 극대화된 18세기와는 전혀 딴판으로 칼빈에 대한 숭상이 절대화된 19세기의 상황과 연관이 큽니다. 계몽주의 이후 칼빈에 대한 비판적 묘사만큼 혹독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관용없는 칼빈", “종교적 심문관”, “은혜를 모르는 다혈질”, “굶주린 늑대”, “제네바의 공포 정치”, “이단 사냥꾼”, “개혁파 교황”등이 그러합니다. 정교가 분리되지 않은 시대의 칼빈이 처한 어쩔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Servetus)나 카스텔리오(Castellio)의 죽음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모두 칼빈을 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심지어 개혁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칼빈과 거리를 두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영향이든, 혹 현대 산업사회의 복잡함에 기인했든지 간에, 난세에 영웅을 필요로 하자마자, 칼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에밀 두메르그(Emile Doumergue)의 칼빈 전집 7권이 1899년에서 1927년에 이르러 출판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칼빈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프린스턴 신학저널(Princeton Theological Review)에 “칼빈과 종교개혁(Calvin and the Reformation)”이라는 제목으로 당대 최고의 칼빈주의 4인방(에밀 두메르그, 아우구스트 랑, 헤르만 바빙크, 벤자민 워필드)의 글이 소개되었습니다. 이런 칼빈에 대한 예찬 분위기가 절정에 이른 것이 바로 아까 언급했던 제네바의 종교개혁 기념비, 즉 네 명의 종교개혁가들에 대한 전신상의 설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교회사에서 어떤 이름(심지어 힐데브란트(Hildebrand), 루터, 혹은 로욜라(Loyola)를 포함해서)도 칼빈 만큼이나 그렇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미움을 받는, 존경을 받으면서도 경멸을 받는, 칭송을 받으면서도 비판을 받는, 축복을 받으면서도 저주를 받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저 역시 칼빈을 매우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송하고 축복했을 것이라는 기본 전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샤프의 모든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칼빈을 칭송하면서도 비판했다”는 그 표현만큼은 제가 칼빈에 대해 가진 입장을 잘 묘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저의 칼빈에 대한 비판적 예찬론은 제가 네덜란드의 개혁파 민중들이 공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돕는 일종의 공공신학을 전개할 때 두드러집니다.


저는 칼빈의 사상들(예를 들어,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죄론, 하나님의 선택 교리, 일반 은총 교리 등)이 칼빈주의자들로 하여금 삶의 모든 영역, 특히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탁월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는 면에서 매우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사제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중개적 관계를 주장했던 로마 가톨릭과 달리, 루터와 칼빈은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주창했습니다. 그런데 칭의 교리를 중심으로, 인간적 관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주관적인  관계에 집중한 루터주의와 달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중심 원리를 통해 칼빈은 우주적이면서도 객관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주의에서는 주관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교회의 지위가 향상되고 평신도들의 지위가 하강되었습니다. 반면, 칼빈주의에서는 객관적인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를 매개자나 선생으로서 교회가 공인해 줄 필요가 없어지면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각자의 삶의 모든 영역에 누구의 간섭이나 가르침 없이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죄성에 대한 칼빈의 사상은 어떻게 국가가 자유와 권위에 있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그 자유와 권위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신학적 근거를 제시했고, 역사적으로 다양한 나라들(영국, 미국, 네덜란드)의 민주 공화주의(republican democracy) 제정에 기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칼빈이 발견한 일반 은총 교리를 통해서 칼빈주의자들은 기꺼이 학문과 예술 세계에 참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학문과 예술 세계의 열매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 시대(Golden Age)에 대해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17세기의 네덜란드를 세계 최강대국으로 여기는 것은 비단 정치 경제의 발전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유명한 레이든(Leiden) 대학교(저와 바빙크의 모교)나 브릴(E. J. Brill) 출판사, 혹은 렘브란트(Rembrandt)로 대표되는 17세기 화가들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적 눈치가 빠른 분들은 제가 칼빈의 교리들을 전통적인 신학적 범주에 따라 배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 교리(central dogma)로 두고, 이 원리 위에 몇몇 신학적 원칙들을 삶의 실제에 누구나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공리적(axiomatic)으로 사용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리의 역할을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저울추로 한정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사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으로서의 역할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후자의 역할을 위해, 저는 칼빈의 교리를 현대사회에 걸맞게 재조정하였습니다. 이런 재조정의 방법론으로 사용된 중심 교리 이론은 슈바이처(Alexander Schweizer)가 주창하고, 저의 레이든 스승 스홀튼(Johannes H. Scholten)이 네덜란드에 소개한 현대신학의 일원론적 방법론입니다. 중심 교리 이론은 루터주의는 칭의를 중심으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 혹은 예정 교리를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이론입니다. 지금은 리차드 멀러(Richard A. Muller)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반박되어 분쇄되었을지라도, 여러분이 잘 아는 트뢸취나 조지 밴크로프트 등의 동시대 지성인들에게서도 드러나듯이, 제가 공부하던 시대에는 누구나 받아들였던 전제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저는 칼빈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전개된 칼빈에 대한 부정적 묘사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무관용으로 칼빈을 이끈 그의 정교일치적 경향성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세르베투스 문제와 관련해 칼빈이 저지른 실수가 아무리 시대적 한계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저는 어느 누구라도 종교나 신앙의 문제로 국가의 간섭을 부당하게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확히 했습니다. 국가는 종교의 문제에 올바른 정답을 줄 수 있을 만큼 그런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정교분리의 사회에서 그럴 필요조차 없습니다. 물론 칼빈이나 도르트, 웨스트민스터가 고백하는 교회와 국가 간 관계는 국가가 참된 종교나 예배를 증진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에 관련된 칼빈주의 교리는 저와 바빙크를 통해 프랑스 혁명 이후 정교분리의 현대 사회에 걸맞게 변화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 처럼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의 교리를 통해 교회와 국가 간 관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칼빈주의 교리 사용의 변화로 인해 제가 설파하는 칼빈주의는 기존의 칼빈주의와 다르다는 비판의 의미로 신칼빈주의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다수의 칼빈주의자들이 제가 제시한 비전, ‘현대 사회에 걸맞는 칼빈주의’에 함께 동참하면서 19세기 후반의 네덜란드는 칼빈주의의 부흥을 목격하게 됩니다. 삶의 모든 영역, 즉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노동, 교육 등에 칼빈주의의 원리들이 칼빈주의자들의 삶을 통해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네덜란드 사회를 변혁시켰던 칼빈주의 원리는 사실 칼빈이 주창하고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칼빈주의 원리가 칼빈의 씨앗을 통해서 많이 드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씨앗에 물을 주고 각 시대에 필요한 열매를 맺도록 칼빈주의자들 스스로 노력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저는 칼빈 탄생 400주년을 기념한 제네바의 초대를 거절하고 그런 전신상을 세우는 것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배은망덕하거나 불경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편적 진리의 요소로 가득한 칼빈의 사상을 저의 시대에 적실하게 활용하는 것이 더욱 칼빈을 참되게 기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교회, 특히 개혁주의 성도 여러분, 칼빈이나 투레틴, 혹은 에드워즈나 바빙크와 같이 여러분이 간직한 귀중한 칼빈주의의 역사와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실 것입니까? 무조건적으로 추종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그저 그들의 동상을 세우기만 하면 될까요? 아마도 칼빈주의의 위대한 사상의 씨앗들은 여러분들의 노력을 통해 여러분의 시대와 토양에 걸맞는 열매를 맺도록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칼빈주의 원리가 칼빈의 씨앗을 통해서 많이 드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씨앗에 물을 주고 각 시대에 필요한 열매를 맺도록 칼빈주의자들 스스로 노력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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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은득

김은득 목사(PhD., Calvin Theological Seminary)는 신칼빈주의,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공공신학을 한국적 문맥에 맞게 상황화하길 원하는 신학자로서 현재 미국 애리조나 투산에서 드림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