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 그 가치의 아름다움
by Greg Morse2020-08-27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형태를 역사의 중심에 두기로 결정했다

Before the beginning of time, God decided to place the marriage analogy at the heart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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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을 없애버릴 때 우리는 창조의 핵심이 되는 질서에 타격을 받게 된다. 하늘에서 별을 없애거나 땅을 바다로 덮거나 또는 태양과 달을 사라지게 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남자와 여자가 구분된다고? 하나님이 정말로 그렇게 이야기했어?”


남자와 여자라는 그 아름다움을 손상하려는 사탄의 노골적인 시도에 대해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가? 평등한 사회라고 불리는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그 길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고후 10:15). 이 말씀처럼 훌륭한 정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용감하게 싸워왔다.


우리는 다 각자 할 일이 있다. 공식적인 변증을 하는 것 외에 미학적인 변증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가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또한 신앙 고백에 따라 행복하게 사는 모든 가정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경을 손에 들고 있다는 자체로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의 설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단 그 출발점을 삼아야 할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판단과 개혁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household of God)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남자됨’과 ‘여자됨’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 시대에 유행하는 자웅동체 양성과 그로 인해 결국 빚어지게 될 성적 혼란에 맞서 싸울 수 있다.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네 가지 초대장이 있다.


1.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춤추라


변태적인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는 것은 가정에서 시작한다. 단지 집 밖으로 몰아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결국 제대로 된 가정교육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의 거룩함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을 통해서 발휘된다. 성적인 차이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리지 않는 것을 결코 기독교인의 미덕이라 말할 수 없다. 막연하게 예수님께서 성을 구분하지 않을 것 같은 분이라고 여기며 닮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닮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사실 위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예수님을 닮아서 빛이 나는 여인은 여자다움을 잃을 때가 아니라 점점 더 여자다워질 때 그 빛이 더 강해진다. 예수님을 닮아 강인함을 발휘하는 남자는 그 남자다움을 잃을 때가 아니라 점점 더 남자다워질 때 그 강인함이 더 두드러진다.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오로지 구세주만을 바라보며 산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남녀 구분이 없는 그냥 도덕적이기만 한 사람이 산다는 게 아니다. 점점 더 남자와 여자로 그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낼 때 우리는 스스로가 더 진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은 종종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기독교인에게 동일한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남자, 여자, 아이, 지도자, 독신자, 남편, 부인 그리고 과부를 구분해서 특별한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특히 결혼 생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리더십과 희생, 복종과 신뢰,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결혼 생활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적을 무너뜨리고, 세상 또한 우리 결혼 생활이 상징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통해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2. 자녀라는 축복을 만끽하라


자녀는 단지 성경에 나오는 축복, 즉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할 때 주시는 새 소유물이나 지위 같은 수준의 축복이 아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 세상 전체에 떨치도록 하는, 인류를 향한 사명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존재이다.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함으로 이 세상을 채우고 또 다스리라고 했다(창 1:28). 여기에 새 언약으로 인해서 영적인 자녀를 낳는 일이 추가되었지만, 그렇다고 창조 당시에 받았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원래의 부르심이 무시되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 중 다음 시편 저자의 찬양에 동참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 127:3–5).


이 땅에 살면서 기본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일 중의 하나는 자녀들을 주님 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훈련방식 대로 양육하는 것이다(엡 6:4).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는 결코 우리 삶과 목적에 있어서 곁길로 새는 게 아니다. 거룩한 가문이 되는 것은 여러 세대를 통해 이어지는 유산이 된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아이들을 기쁘게 맞이하셨다(마 19:14). 우리도 그래야 한다. 


자녀들을 기뻐하지 않을 때 사탄의 속삭임은 더 커지게 된다. 자녀들을 향한 목표를 잃거나 귀찮아질 때, 남녀라는 성적인 문제는 오로지 우리 자신과 욕망의 문제로만 전락하게 된다. 우리들이 자녀들을 소중히 여길 때, 지금 이 사회가 겪고 있는 성적 비정상 상태, 특히 아이들을 죽여서 돈을 버는 의사까지 존재하는 이런 사회를 고칠 수 있다.


3. 잃어버린 학교 교육을 회복하라


자녀를 낳고 그 자녀들 앞에서 남자와 여자로서의 소명 받은 삶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자와 여자로서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


대부분 학교가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를 똑같이,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교육한다.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나는 유니섹스적인 커리큘럼 외에 학교에 무슨 다른 커리큘럼이 있었는지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을 정도이다.


디도서 2장 3-5절을 보면 젊은 여자를 남자와 연결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늙은 여자로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늙은 여자가 옳은 것을 가르치며, 또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들,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또 남편에게 복종하고 집에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 등등이 다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집과 가정이야말로 여성적인 미덕이 꽃을 피우고 빛을 발하는 무대이다.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젊은 여자를 향한 나이 드신 여자 분의 책임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딸로서 받은 소명에 따라 순결을 강조하고 거룩한 아내와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교육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여인은 젊은 여자로 하여금 단지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자가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4. 성별 간의 싸움을 거부하라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은 서로를 보완하라는 것이지 경쟁하라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아담의 육신에서 하와를 만드셨을 때, 하와는 아담의 ‘돕는 배필’(창 2:18)이었지 결코 아담에 대항하는 라이벌이 아니었다.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들은 결코 서로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


문화적인 요인 때문에 우리는 종종 그 차이를 가볍게 여기는 교육을 받곤 한다. 오늘날 차이라는 말은 일종의 상하조직으로 인식된다. 공정함은 동일함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동일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이상적인 생각은 불평등을 초래한다. 그러나 G. K. 체스터턴(G.K. Chesterton)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그의 짧은 시, “비교”(Comparisons)를 통해서 전하고 있다.


달 옆에 태양을 놓으면
바다 옆에 땅을 놓으면
과일 옆에 꽃을 놓으면
나라 옆에 마을을 세우면
남자를 여자 옆에 두면
어떤 바보가 이런 얘기를 할 것 같아
뭐가 더 나은 지에 대해서 말이야.


신부가 없는 아들


남자와 여자가 중요한 이유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그분의 기쁘시고 자유로운 뜻에 따라서 신부가 없는 아들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결혼식,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결혼식들은 다 마지막 때에 한 남자와 한 교회 사이에 있을 어린 양의 결혼식 만찬에 대한 준비이다. 역사는 결국 신부와 성령님이 신랑에게 “오라”(계 22:17)고 하는 날 울려 퍼질 다음 선언을 준비하는 전주곡이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계 21:9).


시간이 시작되던 때 하나님의 웃음소리와 함께 창조가 있었고,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형태를 역사의 중심에 두기로 결정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향해 바르고 신성한 기준을 세운다.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은 마지막 날에 있을 가장 성대한 결혼식 날까지 우리가 힘을 다해 보호해야 하는 가치일 뿐 아니라 기뻐서 함께 춤을 춰야할 아름다움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Lost Art of Male and Female

번역: 무제

변태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는 것은 가정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단지 집 밖으로 몰아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결국 제대로 된 가정 교육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Closing the door to perversion begins at home, not merely by what we keep out, but what we cultivate wit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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