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합제한 명령’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by 장대선2020-08-23

교회와 국가,두 권세는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로서, 바르게 사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이는 것이 되고 경건하고 선한 백성들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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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잘 대처해 오던 우리 사회가, 최근 교회질서를 어지럽힌 한 목회자의 일탈로 심각한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특히나 그 목회자는 그동안 현 정부에 대해 좌파정권 혹은 종북세력으로 규정하며 온갖 시위를 해오던 상황이어서, 실질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해묵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까지 뒤엉켜있다. 더구나 이 문제에는, 단순히 방역상의 문제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올바른 이해의 요구까지 참으로 복잡하게 엉켜있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각 사안들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정리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현 사태는 극심한 대립과 갈등의 도화선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상황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먼저 바이러스의 문제와 관련해서 보자면, 공교롭게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질서의 상황 가운데서 그 확산이 급격해지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잘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동안 방역당국과 국민들 전체가 상당한 질서와 협조를 보여준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방역당국의 혼란과 국민들의 무질서 가운데 있던 사회에서는 심각한 피해와 확산을 보여 왔다. 이 점에 있어서 신천지 그리고 앞서 말한 그 목회자의 경우는 혼란과 무질서가 낳은 전형적인 결과를 입증한다. 특별히 신천지의 문제는 차치하고 지금 불거진 한 목회자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방역지침과 이데올로기 문제, 그리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무질서한 인물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이번 코로나 정국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국가와 교회 사이는 분리로서 규정지을 수 없는 지점이 있으며, 그 지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너무도 중요하다. 방역의 문제에 있어서 국가는 불가피하게 교회의 예배와 관련하여 지침과, 심지어 통제를 단행해야만 하는 경우가 명백히 있음을 지금 우리들은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로 모인 가운데서 수행한 행위가 실정법에 벗어나거나 저촉되는 경우, 예컨대 불미스런 스캔들이나 허위와 같은 것으로 인해 교회에서 소송이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국가의 공권력은 불가피하게 교회의 운영에 관한 조사와 행정적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정치의 사실상의 부재 가운데서 교회의 재산권과 관련된 무수한 분쟁들이 대부분 실정법의 판결 말고는 다른 중재가 되지 않는 형편에서, 교회와 관련한 국가의 역할이 부득이하게라도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통해서, 국가가 과연 교회에 대해 어느 정도로 그 역할을 행할 수 있는지의 문제, 혹은 여전히 정교분리의 원칙만을 고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 문제는 나중에 또 한 번 다루어 보기로 하고 우선 불거진 정부의 통치행위, 혹은 통제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지에 관해 논의해보도록 하자.


그런데 정부의 통치, 혹은 통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와 관련하여 우리의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정교분리의 원칙이 확고한 편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는 신학적 전제들로서는 정확한 원리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6세기말 스코틀랜드의 교회가 산출한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 1578)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정교분리가 아닌 독특한 연계와 구별 가운데 아주 잘 규정되어 있어서, 비로소 이를 근거로 이 주제를 정확한 장로교회정치의 원리에 따라 정립해 볼 수가 있다.


먼저 제2치리서는 1장의 “교회와 교회정치의 일반적인 의미, 그리고 세속정치와의 차이점”이라는 주제 가운데서 4항에 이르기를 “교회의 권세와 정치는 세상 권세 혹은 국가[공화국]의 시민 정부에 속한 권세 및 정치와는 속성상 다르다.”라고 하여, 교회와 국가 운영의 정치원리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곧장 4항은 이르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권세는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로서, 바르게 사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이는 것이 되고 경건하고 선한 백성들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했다. 즉 국가의 권세와 교회의 권세[권위]는 공히 하나님께 속한 목적에 따라 사용되도록 제정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후자의 문맥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서는 거의 상실했지만,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결코 교회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며 오히려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들을 자신의 주권과 뜻에 따라 다스리시고 섭리하신다는 우리의 기초적인 믿음으로 볼 때, 이를 인정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만일 이를 부정하고 현재와 같이 엄격히 정교분리의 원칙만을 고수한다면 국가의 정부와는 별개의 교회 정부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단적인 예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바티칸 시국’(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과 같이, 세속 정부와는 전혀 별개의 시스템으로 교회들이 성립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인 국가와 교회의 권세를 시행하는 관원들과 직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이해와 자세로서 대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제2치리서 1장 9항에서 명확히 규정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9항은 이르기를 “교회에 속한 사역자와 그 외 모든 사람은 세상 관원(civil magistrate)에 순종해야 하며, 세상 관원도 영적으로는 교회에 순종해야 하고, 교회 정치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즉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인 국가와 교회의 권세를 시행하는 자들 모두 상호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로마서 13장1절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말씀에서 인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2치리서 1장 9항은 또한 규정하기를 “이 두 재판관의 권세는 일반적으로 한 사람에게 있지 않다.” 즉 국가의 권세가 교회의 권세까지 가져서는 안 되며, 마찬가지로 교회의 권세가 국가의 권세까지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어지는 규정에서 이르기를 “세상의 권세는 칼의 권세[사법권]이고, 다른 하나[교회의 권세]는 열쇠의 권세[영적 권세]다.”라고 한 것에서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즉 교회의 권세는 말씀[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하늘(Heaven)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수행하고, 세상의 권세는 ‘칼’[사법권]에 따라 악을 벌하고 선을 권장하는 권세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즉 두 권세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교회에 속한 사역자[목회자]와 그 외 모든 사람[신자들]은 세상 관원에게 순종해야 하며, 세상 관원도 영적으로는 교회에 순종해야”하는 것이다. 세상 권세도 말씀[성경]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이며, 다만 그 기능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에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세속 권세인 정부의 행정력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방역의 차원에서 기독교회들의 예배를 잠정적으로 비대면으로 수행하도록 했다. 그런즉 얼핏 그 모양이 그 권세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러한 외적인 수단 즉 칼의 권세로는 결코 영적인 교회의 속성을 통제할 수 없다. 영적인 교회의 속성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오히려 영적인 것, 곧 말씀의 권세다. 그런즉 말씀의 진리를 희석해버리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영적인 속성을 통제하거나 제거해 버릴 수 있는 방편이다. 심지어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할 수 없도록 예배를 폐지한다고 해도, “영과 진리로 예배”(요 4:24)하는 것을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칼의 권세로서는 결코 영적인 권세를 행사할 수가 없다. 바로 그 사실을 제2치리서 1장 13항에서 언급하기를 “관원은 칼과 다른 외적인 수단들에 의해 순종을 요구하지만, 목회자는 영적인 칼과 영적인 수단들로서 순종을 요구한다.”고 한 것이니, 칼로서는 결코 영적인 순종을 요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억지로 교인들을 강압하여 끌고 가는 방식은 전혀 영적인 방식인 목회의 방식이 아니다.


사실 우리 정부는 현재 예배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외적인 형식을 일부 제한하려는 것이다. 예배의 본질이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영과 진리”에 있는 한, 그런 정부의 지침이나 행정력은 전혀 예배의 본질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지나친 월권이라 생각하여 저항하려고 하다가는 자칫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2)는 말씀에 스스로 저촉되려는 것이 아닌지 신중해야만 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롬 13:4)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를 제어하여 더 큰 불편과 위험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려는 일을 대적하는 악을 행하여서 공연히 칼의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이 아닌지 더욱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즉 정부가 기독교의 예배를 방해하려는 목적일 리가 없는 한, 지교회와 사역자들 모두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기독교 내의 일부 무분별한 사역자가 현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 상태에 관여된 상황에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대면하여 모이는 회중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진지한 상황인식을 토대로, 바로 지금이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임을 인식하고, “금식을 시행하도록 조언”하고 있는,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The Discipline of the Reformed Churches of France. 1559) 10장 3조의 문구를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 정부는 현재 예배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외적인 형식을 일부 제한하려는 것이다. 예배의 본질이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영과 진리”에 있는 한, 그런 정부의 지침이나 행정력은 전혀 예배의 본질을 통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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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장대선

장대선 목사는 도서출판 고백과문답 대표와 장로교회정치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교리 연구가로 활동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스터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제2치리서’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