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양심을 따라 하겠다’는 말에 관하여
by 김형익2020-08-28

양심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심어 놓으신 감독자라고 할지라도,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그 말씀과 일치하도록 길들여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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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진공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신학은 지난 2천여 년의 역사 동안 교회가 직면한 상황들 속에서 성경을 붙들고 씨름한 결과다. 이 말은 성경의 진리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지금 전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도 예외가 아니다. 불현듯 찾아온 이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고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마운 면도 없지 않다. 책상 앞에서는 결코 생각할 이유가 없던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려면, 교회들—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생각을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가 코로나19 상황에 강제적으로 떠밀려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슈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문제 하나를 생각하고 싶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가파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고, 사실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감염원 중 하나로 교회가 매일의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는 상황에서 주일예배를 예배당에 모여서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정부의 방역 지침을 준수하여 영상예배의 형식으로 드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쉬운 결정이겠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성경이 기준이라고? 물론 당연히 성경이 기준이다. 그런데 다들 성경이 기준이라고 말하지만, 내리는 결정들은 다르고 심지어 논쟁까지 벌이는 상황이 아닌가? 며칠 전, TGC코리아 작가로 활동하는 고상섭 목사가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글의 첫 두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옥한흠 목사님이 에베소서를 순장반에서 강의하실 때, 이런 말을 하셨다. ‘여러분, 자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일과 상식이 부딪치면, 신앙적으로 생각되는 일을 따르지 말고 상식을 따르세요’”


십분 공감하는 말이다. 문제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신앙 양심을 혼동하는 데서 발생한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신앙 양심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드러내 주신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가령, 살인, 간음, 도둑질,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 탐욕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명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그 적용에 있어서 특수한 상황이 주어질 때 우리는 신앙 양심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본래 개신교의 출발에는 보름스(Worms) 제국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유럽의 통치자들 앞에서 마르틴 루터가 했던 그 용감하고 멋진 말이 있지 않은가!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안전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My conscience is captive to the Word of God, I cannot and will not recant anything, for to go against conscience is neither right nor safe.)”

하지만, 우리가 신앙 양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면 된다고 말할 때, 타락한 인간의 양심이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은 마르틴 루터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하고, 그 말씀에 의해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뮤얼 아네슬리의 말이다(Samuel Annesley, “How May We Be Universally and Exactly Conscientious?” Puritan Sermons, 1:13,14).


“양심은 때때로 거짓 규칙을 참된 규칙으로, 오류를 하나님 뜻으로 파악함으로써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무지를 통해 기만을 당한다. 때로는 올바른 규칙을 그릇된 행동에 잘못 적용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무지를 통해서도 기만을 당한다. 나쁜 정보를 가진 양심은 사람의 전통과 거짓 교리를 신적 권세를 가장해서 하나님 뜻이라고 제안한다. …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언제나 악하다. 또 오류에 빠진 양심을 따르는 것도 악하다. 하지만 안전하고 선한 중도가 있다. 그 길은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잘 채워지며 그런 양심을 따르는 길이다.”


양심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심어 놓으신 감독자라고 할지라도,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그 말씀과 일치하도록 길들여져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염려가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이,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다. 신자의 양심은 양심을 찢어 마음의 내면을 드러내주는 설교를 통해 일깨워져야 하는데 그런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강단이 많지 않다. 조엘 비키는 제임스 패커를 인용(James Packer, Quest for Godliness_Crossway,1990, p.48)하여 이렇게 말한다. “청교도에 따르면, 강력한 설교자의 한 가지 표지는 사람들의 양심을 ‘갈기갈기 찢어서’ 사람의 내면의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21세기 초 한국 교회 강단에서 이런 설교자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는 더더욱 ‘신앙 양심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말을 조심히 써야 하지 않을까? 자칫 이런 표현은, “아, 나는 그냥 내 고집대로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들릴 수 있지 않겠는가?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하고 나아가 찢어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기적으로 그리고 자주 점검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자기 점검(self-examination)이라는 영적 습관은 생경하기만 할 것이다. 자기 점검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계명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 있는지 면밀히 살피는 영적 습관이자 훈련이다.


조금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 보려고 한다. 목사들은 어떤가? 정상적인 목사라면 신학교(신학대학원)에서 성경과 신학의 훈련을 받고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다.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그가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하며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자신의 삶의 절대기준으로 삼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중세 말 성경을 읽을 줄도 모르는 사제들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도 성경과 신학의 훈련이 거의 전무한 목사들, 성경 대신 자기 소견을 따라 목회하는 거짓 목사들이 즐비하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신앙 양심에 따라서’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솔직히 겁이 덜컥 난다. 무엇을 말하려고 그는 신앙 양심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나는 신앙 양심에 따라 하기로 했다”는 말은 조심히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비록 그 뜻조차도 주관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면 최소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할 수 있고 조금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신앙 양심에 따르겠다’는 말이 ‘내 고집대로 하겠다’는 의미로 들리거나 사람들이 자기 소견대로 행했던 사사시대의 말처럼 들려서야 되겠는가?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선한 양심’(딤전 1:5,19)과 ‘깨끗한 양심’(딤전 3:9; 딤후 1:3)으로 빚어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본연의 자리에서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할 수 있으리라. 이 지리하고 괴로운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이 지나간 뒤에, 우리는 마르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안전한 일도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선한 양심’(딤전 1:5,19)과 ‘깨끗한 양심’(딤전 3:9; 딤후 1:3)으로 빚어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본연의 자리에서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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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