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신학, 질문에 답하는 신학
by 김상일2020-09-04

교회가 ‘신앙 고백’을 작성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적는 것이 아니다. 고백문은 그 교회가 묻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한 성경의 답변들을 모아서 기록하는 것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의 신학함은 성경 세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 그 안에 머물면서 원래 성경 본문이 무슨 의미인지를 찾아내는 데에만 집중하느라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간 지대의 신학함이 현실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어 교회로 모을 수 있는 방법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중간 지대의 신학함은 성경이 말하는 교리와 전통을 통해 매 시대, 매 순간마다 상황화라는 과정을 거친 복음을 지금 우리 시대에서 고민하고,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하는 일이다. 이렇게 우리는 중간 지대의 신학함을 위해 뼈대를 마련해주는 세 가지 재료로 성경 읽기, 교리와 전통, 그리고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각각 살펴보았다.
 

이제 뼈대를 세웠으니 구체적으로 살을 붙여 나갈 차례가 되었다. 그러므로 중간 지대의 신학함이란 어떤 구체적인 특징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중간 지대의 신학함이 가진 첫 번째 특징으로 질문하는 신학, 질문에 답하는 신학을 먼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와 문화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왜 기쁜 소식인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에게 가장 좋은 소식으로 당도했는지를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면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가진 질문은 무엇인지, 행여나 그들이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왜 그런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켈러는 프랜시스 쉐퍼를 인용하면서, 기독교 교리가 단지 전통 속에 굳어져버린 유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매 시대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에 생생한 답변을 줄 수 있는 해답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프랜시스 쉐퍼는 1976년에 열린 로잔회의 연설 ‘두 내용, 두 현실’에서 건전한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교리가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변’의 형태로 소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리는 진공 속에서 선포될 수 없다. 진리는 특정한 사람들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써 선포되어야 한다. 이것이 문화를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이다.”(센터 처치, 256-257쪽)


곧바로 켈러는 교회의 ‘신앙 고백’이 마치 성경과 똑같은 절대불변의 진리인 듯 받아들이는 태도를 문제 삼는다. 신앙 고백이 원칙적으로 신앙을 가진 이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사람들이 묻지 않는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는 신앙 고백은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신앙 고백’을 작성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적는 것이 아니다. 고백문은 그 교회가 묻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한 성경의 답변들을 모아서 기록하는 것이다. 어떤 질문들은 모든 사람이 성경에 던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요청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을 정직하게 유효하게 묻는 개인이나 그룹은 없다. 개별 교회의 질문들은 그들만의 경험이나 사회적 지형, 역사적 배경,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센터 처치, 257쪽)


그러므로 신학은 항상, 언제나 ‘질문에 답하는 신학’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시대마다 바뀌며, 문화마다 다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특정한 시대의 신앙 고백이 마치 성경의 내용을 완벽하게 녹여낸 불변의 진리인양 대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과 세상, 복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다. 켈러는 그 비근한 예로 자신의 스승이었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하비 콘(Harvie Conn) 교수가 장로교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사람들이 던지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는 없었다는 점을 역설했음을 부각시킨다.


“선교학 교수인 하비 콘은 종종 미국과 유럽의 선교사들이 한국의 새로운 장로교 신자들에게 웨스트민스터 문답을 신앙 고백으로 채택하도록 지도했던 예를 들곤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17세기 영국에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놀라울 것도 없이 조상이나 부모, 조부모를 어떻게 섬길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한국 문화에서는 가족에 대한 존중과 조상 예배에 대한 내용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자리에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원하는 한국인들은 성경이 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는지 알아야 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만든 사람들은 이러한 주제에 대해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묻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시아 성도들에게 필요한 구체적인 수준까지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센터 처치, 258쪽)


그러므로 매 시대마다, 매 순간마다, 교회는 어떤 질문이 이전의 신앙 고백에서는 답할 수 없었던 질문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질문들은 악한 것이 아니며, 복음의 본질을 타협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특정한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다는, 다른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는 반증일 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만일 20세기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신앙문답서를 작성한다면, 17세기 영국인들이 묻지 않았던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국인들에게는 사실상 보이지 않던 많은 진리들을 성경으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콘 교수의 의견에는, 한국인들이 이러한 상황화 작업을 하지 않았으며, 권위와 가족에 대한 사회 문화적 관점들을 성경의 빛으로 살펴보지 않고, 많은 경우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말한다.”(센터 처치, 258쪽)


사실 콘 교수의 이런 지적은 100% 맞는 답변은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 교회 안에도 상황화에 대한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은 많은 경우 한국 교회의 복음주의권 지도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하게, 성경이 전하는 복음을 특정 문화(한국 문화)가 완전히 압도해버린 나머지 더 이상 복음이 가진 원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될 수 없는 지경까지, 말 그대로 복음을 왜곡해 버린 경우들이 꽤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복음주의권 지도자들이 ‘상황화’라는 단어에 대해서 심각한 의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는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묻는 질문들에 대해서 복음이 주는 답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 까닭은 전혀 없다. 켈러는 상황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함으로써 상황화에 대한 오해를 가진 기독교 지도자들의 근심을 불식시켜주었다.


“상황화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 시기와 특정 지역에서 사람들이 삶에 대해 갖는 질문에 대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형태로, 그리고 그들이 힘 있게 느낄 수 있는 호소와 논증을 통해서, 비록 그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심지어 반대할지라도 성경의 답을 주는 것이다.”(센터 처치, 189쪽)


그러므로 중간 지대의 신학함이란, 질문에 답하는 신학이다. 그런데 질문에 답을 하려고 할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중요한 전제는 ① 왜 그런 질문이 나오는지, ② 그 질문 배후에 어떤 개인적, 문화적 욕구가 있는지, 그리고 ③ 그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주어야 단지 교회의 권위를 내세우기만 하는 답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말 공감하고 받아들일 만한 답이 될 수 있는지, 마지막으로 켈러가 상황화를 정의하면서 표현한대로 ④ 그런 공감하고 받아들일 만한 답이 단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기분좋게 하는 답이 아니라 정말 복음의 메시지를 잘 담아낸, 때로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그런 답이 될 수 있게 하느냐이다.


이런 일은 단지 답만 주려고 하는 신학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문화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숨 쉬며 그들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신학이 먼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신학은 단지 하늘 위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모두 소유한 양,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양 우월감에 사로잡힌 채 기계적인 답을 던져주는 신학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신학은 사람들이 겪는 상황이 어떠한지, 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겸손하게 질문할 줄 아는 신학이다. 말하자면, 질문에 답하는 신학은 먼저 질문하는 신학이어야 한다. 켈러는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는 최대한 그들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 작업의 시작점은 그들의 사회적, 언어적, 문화적 현실에 최대한 정통해지기 위해서 근면하게 노력하는 데 있다. 사람들이 그들의 희망과 두려움, 반대나 신념들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들보다 더 선명하게 그들의 의견을 이해하는 것이다.”(센터 처치, 256쪽)


어떻게 하는 것이 근면하게 노력하는 것인가 물어야 한다. 질문해야 한다. 사람들이 묻는 질문을 그들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상황을 이해할 때까지 계속해서 그들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독자들은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친구 한 명이 자신의 얘기를 나누었을 때 “어 맞아! 저거 나도 했던 생각이야!”라고 함께 공감하면서 무릎을 탁 쳤던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학함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 저거 나도 했던 질문인데?” 혹은 “와 맞아 맞아, 저런 고민 나도 항상 가지고 있던 고민이야!”라는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 정도로 한국 사회의 희로애락(喜怒哀樂)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질문해야 한다.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신학은 오직 답만 줄 뿐, 물을 필요도, 물을 일도 없다는 교만함을 버리고,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오직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삶과 세상,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고민하는 그들이 “그게 바로 우리가 묻는 질문입니다”라고 깊이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표현할 수 있어야,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는 복음의 답을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간 지대의 신학함이란 단지 질문에 답하는 신학이 아니라, 질문하는 신학이기도 하다. 질문을 제대로 이해할 때에만 제대로 답할 수 있다. 질문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러려면 그 사람의 얘기를 더 자세히 듣기 위해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질문 자체에 답을 주는데 골몰한 나머지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를 이해하며, 그 사람이 숨 쉬는 문화를 이해하는 일에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묻고 질문하는 일을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의 신학함은 바로 이런 도전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켈러가 자신이 사역했던 맨해튼이라는 지역에서 어떻게 이런 중간 지대의 신학함을 실행했는지에 대해서 나누고자 한다. 켈러는 매주 기신자와 비신자, 초신자가 섞여 있는, 15-20명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자신이 했던 설교에 대해서 피드백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규칙적으로 그들의 의견에 경청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질문했고, 왜 그런 질문이 나왔는지를 고민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켈러는 자신의 설교가 바뀌는 경험을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경 읽기가 바뀌는 경험을 한다. 뉴요커들의 문화 속에 깊이 침잠되어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뉴요커들을 위한 복음은 어떤 것인지 더 능숙하게, 더 그들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방식으로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만남들은 나의 설교 준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성경을 연구할 때 새로 알게 된 교우들의 질문들과 반대들이 여전히 귀에서 울리면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본문의 새로운 의미들과 적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만났던 회의론자가 생각나면서, ‘이것이 바로 그녀가 불평했던 것이구나!’ 또는 ‘이것은 그의 질문에 답을 주고 있어!’하는 순간들이 생겼다. 우리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목회적 필요들을 깊이 알고 전도의 현장에 계속 참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가 그들의 삶과 질문, 걱정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님이 그 질문에 대한 답들을 주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센터 처치, 259-261쪽)


오늘 우리의 신학은 질문하는 신학이며, 질문에 답하는 신학인가? 아니면 질문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질문하지도 않은 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17세기, 혹은 1세기나 2세기의 답변을 우리 시대의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고려없이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신학인가? 전통과 교리에 충실하면서도 변하는 세상에 답할 수 있는 신학, 그런 신학함이 넘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가 그들의 삶과 질문, 걱정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님이 그 질문에 대한 답들을 주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김상일

김상일 작가는 UC 버클리(B.A.), 고든콘웰 신학교(M.Div) 졸업 후, 현재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육과 실천 신학으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현재 서평 쓰는 남자 블로그(www.likeellul.com)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으며, 팀 켈러에 관해서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 "좋은 나무" 웹진과 시니어 매일 성경에 글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