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시민의 두 정체성: 소금과 빛
by 이춘성2020-09-18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세상의 권력을 넘어서는 더 큰 권위와 힘을 의미하였다. 소금으로 민족과 종교를 지배하고 굴복시키는 로마의 권력과 권위가 아닌 이보다 더 큰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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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나라와 정체성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의 개념은 18세기 이후에 서구 유럽에서 만들어졌다. 일종의 시민 구성원들 사이의 계약과 관련되어 있다. 국가의 3대 요소 하면 국민, 영토, 주권이라 한다. 거주지가 있고 주권을 지닌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 간의 계약 관계 속에서 정부와 국가가 탄생한다. 하지만 고대에는 국가의 개념이 지금과 차이가 있다. 고대의 나라란 국가(Nation)보다는 왕국(Kingdom)에 더 가깝다.


약 2000년 전의 나라는 지금처럼 획일화된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와 개념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대인들에게 나라는 다윗 왕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의 개념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포로 이후에 메시아의 의미가 더하여져, 국가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메시아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지금도 적용된다.


현재 우리 신자들이 알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 개인의 주권을 굴복시키고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나라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는 단지 구호로 끝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그것을 필자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윤리적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산상설교의 시작 부분의 소금과 빛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마 5:13-16)는 이를 명확하게 규정한다. 예수님은 신자의 정체성을 두 단어로 규정하셨다. ‘소금’과 ‘빛’이다.


2. 로마의 소금과 하나님 나라의 소금


첫 번째는 “너희는 세상(땅)의 소금이다. Ὑμεῖς ἐστε τὸ ἅλας τῆς γῆς·”라는 선언이다.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이다. 땅이란 단어는 세상의 물질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세상을 땅 혹은 흙이라는 물성을 지닌 물질로 이해하고 이 물질이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다른 물질이 소금이라는 것이다. 또한 소금의 짠맛은 그 특유의 짠맛 때문에 물질이 변질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준다. 구약 성경에서 소금에 대해 언급된 구절을 찾아보면 대부분 변치 않고 원래의 모습을 지키는 소금의 역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런 소금의 기능을 성결하게 하는 기능이라고도 규정한다(출 30:35).


당시에 이스라엘과 주변의 사람들은 사해에서 생산된 소금을 사용하였다. 바닷물을 정제하여 소금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로마에서 상용화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로마는 소금을 생산하는 기술 때문에 막대한 부를 얻었고, 그 후에 세계를 통치하는 로마의 평화란 뜻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로마의 막대한 군사력을 통한 평화의 시대, 그러나 로마만의 평화의 시대를 견인한 권력은 소금에서 나왔다.


라틴어 ‘sal’은 소금이란 뜻으로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가 솔져(soldier), 샐러리(salary), 샐러드(salad) 등의 영어 단어들이다. 로마에서 소금을 임금으로 받았던 군인들을 솔져라 불렀으며, 그 군인들의 급여가 샐러리였다. 후에 소금에 절인 채소를 샐러드라고 불렀다. 로마는 소금 생산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 제일의 강국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은 소금이 지니는 강력한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예수님의 소금 정체성의 선언은 하나님 나라는 소금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로마의 막강한 힘에 대항할 만큼의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정체성에 대한 선언은 우리가 지금 느끼는 충격보다 더 강력하였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세상의 권력을 넘어서는 더 큰 권위와 힘을 의미하였다. 소금으로 민족과 종교를 지배하고 굴복시키는 로마의 권력과 권위가 아닌 이보다 더 큰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3. 참된 권위와 거짓 권위


만약 소금이 특유의 짠맛이 없다면 그 소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은 그러한 소금은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순도 높은 로마의 소금과 달리 순도가 높지 않고 불순물을 많이 함유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소금이 짠맛의 기능을  충분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런 소금은 소금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소금처럼 투명하지만, 물에 녹지 않는 알갱이에 불과하며, 단지 쓰레기 덩어리였다.


로마의 권력, 권위에 대항하여 더 큰 권위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할 제자와 신자들이 세상의 순도 높은 소금 보다 그 순도가 낮고 불순물이 가득해서 정작 소금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상의 웃음거리, 더 나아가 예수님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소금이라는 정체성은 세상의 순도 보다 더 높고 성결한 그 무엇을 요구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권위가 세상에 세워지는 것이다.


4. 소금의 존재감과 지혜


예수님이 제자들을 소금이라 규정하실 때, 이들은 자신의 존재감이 상승했을 것이다. 소금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로마의 막강한 소금의 권력에 대항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쓸모없는 소금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제자 중에 소금처럼 생긴 쓸모없는 소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소금이란 무엇을 은유하고 있는 것일까.


성경학자들은 소금이 주는 은유가 지혜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당시 랍비 문헌을 연구하면 소금을 지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4장 6절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라고 기록한다. 이는 소금이 말, 더 자세히는 말의 내용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말로 표현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프란스(R. T. France)는 소금이 맛을 잃었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리석은 자, 지혜 없는 자가 짠맛을 잃은 소금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존재감, 자존감은 지혜에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면 신자의 존재를 세우는 지혜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제자들, 더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앎을 통해 순도 높은 소금의 존재감과 기독교 윤리를 세운다.


5. 그리스의 빛과 하나님 나라의 빛


두 번째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Ὑ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라고 선언하셨다. 이것도 직역하면 “너희는 질서의 빛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모스(cosmos)는 ‘질서’의 뜻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도 구체적인 통치 질서와 법이 있다. 그리고 ‘빛’은 이 질서를 세상에 밝히고, 알리는 역할을 한다. 당시 그리스 철학자들도 ‘빛’을 ‘이성’, ‘오성’의 유비로 사용하였다. 이는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삶의 원리(윤리)를 찾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 성인 자유인 중에서도 소수의 철학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질서를 찾고 깨달을 수 있는 빛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이러한 능력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9:5;요 12:35-36, 46).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님은 세상의 참 빛이다. 이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밝히는 참 빛이 예수님이다. 만약 어둠 속에서 길을 찾던 어떤 여행자에게 빛이 비치고 그가 가야할 길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 이것은 이들에게 복음일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고 복음이다.


6. 빛을 본 사람의 삶


빛, 바로 복음을 접한 자의 삶이 요한복음 9장에 나와 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어떤 사람을 만났다. 이때 난데없이 제자들 사이에서 신학 논쟁이 일어났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자는 왜 시각장애인이 되었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부모나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의 죄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예수님은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된 원인을 밝히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일이 더 중요하다고 이들의 대화의 주제를 바꾸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호수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이 사람은 말씀대로 하였고, 그는 눈을 뜨고 세상을 보았다.


그런데 이 기적이 일어난 때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은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빛을 보았다는 놀라운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시 신학 논쟁을 시작하였다. 율법을 어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논하였다. 예수님과 시각장애인 모두 처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들은 기적이 일어나고 진리의 빛이 비취는 데도 이를 보지 못하는 영적 시각장애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었던 자는 바리새인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0–33).


바리새인은 진리를 말하는 시각장애인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


빛을 본 자들, 빛을 통해 사실을 본 자들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자신이 본 빛을 증거 한다. 그래서 그들도 그 빛이 된다.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행 13:47) 바울과 바나바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에게 주신 그들의 정체성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진리를 알리고 그 길로 인도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은 신자의 삶의 선택이 아니라 존재 이유이며 목적이다. 하지만 빛과 소금의 인생을 살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7. 도덕적 우월주의가 아닌 감동을 통해(소금과 빛의 역할)


예수님의 삶은 빛이 되어 스스로 빛나고 주목받는 인생이 아니었다. 우리는 빛이라 하면 주목받고 돋보이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예수님은 주변을 밝게 하여 빛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방향을 알게 하는 것이 빛의 역할이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종종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서 주변의 사람들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낙인찍는 일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덕적인 원리와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그러기에 이들은 빛의 자존감을 자랑하지 않고 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이 하나님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겸손이다. 교만한 빛은 빛이 아니다. 나만을 따라오라는 것, 주목하라는 것은 기독교의 빛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빛이다. 하나님 나라의 빛은 내가 아닌 타인과 하나님을 빛나게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 주변에 있으면 그 사람은 그가 당연히 가야 할 방향을 찾고 성부 하나님을 만난다.


뉴욕 시 한 가운데 위치한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를 목회하는 팀 켈러(Timothy J. Keller) 목사는 성경의 복음과 세상의 복음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더 나아가 서로 대척점에 있다고 말하였다. 켈러 목사는 1997년 5월 4일 주일 예배 “Thomas Meets Jesus”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세상의 복음은 ‘나(I)’, ‘자아(ego)’에 대해서 말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은 ‘그(He)’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설교하였다. 복음은 내가 아닌 나 밖의 존재에 대한 소식이며, 관심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온통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을 먹을지, 내가 누구인지 등 인간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 정작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벗어나야 함에도 말이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나 밖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나를 벗어나 나 밖의 어떤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나와 우리를 보게 한다. 만약 기독교가 세상과 같이 나를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나’라는 유사 복음을 말하는 아류 중의 하나일 뿐, 유일한 ‘그 복음’(The Gospel)이 될 수 없다. 오직 기독교만이 ‘나’가 아닌 ‘나 밖’을 보게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나 밖의 두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과 세상의 타자들이다. 먼저는 하나님을 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타인과 세계를 만난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타인을 마주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다시 어려움에 직면한다. 예수의 눈은 있는데, 예수님의 손과 발은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괴리를 깨닫는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빛이라는 증거이다. 빛과 소금의 삶을 매진해야 하는 우리 삶의 이유이다. 빛이 눈에서 손과 발로 내려 올 때까지…. 그렇게 하여 예수님의 말씀처럼 빛과 소금의 정체성은 세상을 감동시킬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오직 기독교만이 ‘나’가 아닌 ‘나 밖’을 보게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나 밖의 두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과 세상의 타자들이다. 먼저는 하나님을 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타인과 세계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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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