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그 무게와 경이로움
by David Mathis2020-09-25

우리 인간은 그분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서 숨 쉬고, 말하고, 노래하며 움직이는 이미지이다

We humans are living, breathing, speaking, singing, moving images representing the invisible God to hi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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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라는 말처럼 자주 거론되면서도 동시에 가장 이해되지 않는 말도 없을 것이다. 낙태를 반대하기 위해서, 사회 정의를 주장하기 위해서, 노인과 장애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때로는 인간이 가진 모든 차이를 초월한 인간 보편의 가치를 강조하는 의미로 기독교인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라는 구호를 외친다. 그건 맞는 말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 말을 제대로 설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행여 그런 경우에도 단지 추측에 불과할 때가 많다. 누군가는 이 말을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로, 의도적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고” 결코 본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럼 인간의 보이지 않는 이런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성경은 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좀 더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 걸까?


픽셀, 그림 그리고 인간


놀랍게 들릴지 모르지만, 간단하게 말해 명시적인 주제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은 결코 성경의 중요 주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성경의 시작 부분에서 가장 극적으로 선포되는데, 그것도 다른 이가 아닌 하나님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서이다. 불과 세 줄에 불과한 하나님의 시는 신학적 인류학(인간이 무엇인가에 관한 기독교적 교리)의 토대를 제공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여기서 첫 번째로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형상이 무엇인가?” 형상, 즉 이미지는 스크린에 넘치고 우리가 보는 잡지를 채우고 있으며, 또한 길가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광고판에도 가득하다. 이런 이미지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아니, 너무도 넘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이미지에 점점 더 둔해지고 있다.


고대 시대에는 이미지가 픽셀 또는 그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동상 또는 기념물로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이교도는 보이지 않는 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물리적이고 시각적 표현과 같이 조각된 이미지를 사용했다. 우리는 당시에 이해하던 형상의 의미인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한 분이자 참 하나님이 성경 첫 장 속 클라이막스에서 하신 말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타락한 인간이기에 그들이 섬기는 신의 이미지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참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만드셨고, 그 결과 이 세상에서 당신을 드러내도록(image himself)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분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서 숨 쉬고, 말하고, 노래하며 움직이는 이미지이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할 수 있도록 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닮고, 드러내고 오로지 그분만을 향하고 따라가도록 만드셨다. 그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어, 그들에게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으로 그분께 감사하고 경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드러내는 이미지가 위대한 누군가를 떠올릴 뿐 아니라, 존경할 만하고 칭찬할 만한 그분의 특성까지 드러냄으로 결국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의 이미지가 떠올리는 그 주인공을 경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주제가 비록 성경에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성경에서 여전히 매우 심오한 주제인 이유이다.


인간 생명의 가치


명시적으로 드러났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주제와 관련해서 구약 성경에는 단지 두 개의 구절이 더 있을 뿐인데, 그 두 구절 다 창세기 초반에 등장한다. 먼저 창세기 5장 3절이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여기에 나오는 자기의 모양 곧 형상이라는 구절은 창세기 1장 26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는 인간의 소명은 아담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서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은 오히려 하나님을 드러내기는 커녕 그 반대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구절이 나오는 곳은 창세기 9장 6절인데, 방주가 땅에 자리를 잡은 후 노아에게 주어지는 말씀 속에 나온다.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의 음성이고 매우 시적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독특함과 존엄성 때문에 다른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은 가장 중대한 죄악이며, 그것은 사람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짓는 죄악이다. 그 죄악이 너무도 중하기에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죽음으로 그 죄값을 치러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 생명이 가지는 가치이다.


이렇게 딱 세 번에 걸친 언급이 있고 구약 성경에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거의 그렇다는 것이다.


이미지가 손상된 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비슷한 개념을 가진 구절은 계속 등장한다. 예를 들어서 시편 8편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없지만 누가 봐도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진 특별한 위치를 찬양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 뿐 아니라 “조각된 형상” 그리고 “금속 형상” 이라는 구절 등을 통해서 “형상”이라는 단어는 쉰 번 이상 구약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도 암시했듯이, 여기에는 연관성이 있다.


두 번째 계명과 함께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 물론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온 나라가 다 함께 저지른 죄가 되었다. 시편 106편은 출애굽기 32장 사건을 말한다.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시 106:19–21).


그 결과는 민족 전체가 거의 멸망당할 뻔한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가 택하신 모세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아니하게 하였도다”(시 106:23).


그 이후로도 우상을 만들고 싶은 유혹은 이스라엘을 가만두지 않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그들이 결과적으로 죄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다른 신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것은 죄가 가진 반전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본질의 결과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한탄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그 형상을 보라


그리고 수 세기에 걸친 침묵이 지나고서야 바울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깊은 진리가 세상 속에 드러났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를 통틀어서 거룩한 형상(divine image)을 아홉 번 언급했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개의 명확하고 확실한 계시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1. 예수님이 바로 그 형상이다


첫 번째로 예수님,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두 번에 걸쳐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 진리를 드러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골 1:15).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단지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되신 성자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그 전까지 성경이 명확하게 주지 않았던 바로 그 수수께끼에 대한 위대한 답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로서 자신이 창조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하고 완전한 구현이다. 즉, 하나님 자신이 성자의 인격을 통해서 사람이 되었을 때 그가 하나의 창조물, 즉 “그의 형상을 닮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첫 번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면서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신 말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라는 것은 피조물이자 몸과 영혼을 가진 존재이고,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계심으로 스스로 그런 존재가 되셨다. 인간의 몸을 설계하시고 만드셨을 때 이미 하나님은 언젠가 이 세상에서 피조물이 된 당신의 아들이 바로 그 몸을 통해서 완벽하게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고, 죽기 전날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참조 17:6,26).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완벽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완전한 삶을 산 그의 생명을 그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기꺼이 바쳤다(요 12:27-28).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하고 훼손시킨 죄로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애초에 인간이 창조된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명을 우리가 완수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드셨다.


2. 오로지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운명은 결정된다


바울이 두 번째로 드러내는 진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기독교인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작은 예수들”이다. 예수님은 닮아야할 형상이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이 세상으로 비취도록 하는 유일한 등불이다(계 21:23).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재창조되었는데, 그건 그리스도를 나날이 점점 더 닮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에 가능하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확실해진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이 모든 것은 다 “주의 영광을 바라볼 때”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예수님,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우리는 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고후 3:18) 된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우리의 지성, 마음 그리고 의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그 결과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능력을 회복하였다)에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형상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를 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다. 인간성을 구별하는, 인간만이 가진 보이지 않는 특성들은 무엇이 있는가? 그러니까 신학자와 평신도 구분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지게 되는 생각과 느낌, 또는 의지와 같은 특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그토록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또 의지력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데에 왜 중요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수님이 얼마나 완벽하게 하나님을 드러냈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의 지성과 마음 그리고 의지는 다 관련이 있다. 형상은 보이는 것이지만 지성과 마음은 오로지 행동이나 말을 통해 겉으로 드러날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과 관계성을 가질 수 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생각과 감정 또는 의지가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데에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능력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상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또 선택하는가는 결국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말과 행동에 의미를 주는 원천이 된다.


인간으로서 내면의 삶이 가진 중요성을 알기에 우리는 말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생각하고 묵상하고 숙고하는 존재이기에 거기에 따른 말과 행동이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의 의미를 단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의 영역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회복된 존재로서 우리가 져야할 사명을 미리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가 할 일이다. 빛을 비춰야 한다.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은 우리의 임무는 이 땅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천국에서 조차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지루한 임무로 전락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지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우리가 영원히 보고 즐거워할 것으로 가득차 있고, 그렇기에 그 형상을 닮은 우리가 보여줄 것은 끝이 없다. 우주에서 가장 흥미롭고, 끝이 없고, 창의적이며, 끊임없이 열광하도록 하는 부르심은 바로 그가 창조한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시적으로(그리고 청각적으로) 형상화(메아리가 치도록)하는 사명이다. 이것은 놀랍도록 존엄한 일이며, 그렇기에 인간 존엄성을 위한 가장 큰 토대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서 그의 특별한 대표자로 설계해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까지 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창조된 아담과 하와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더 위대한 이유는 우리가 죄없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인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제는 예수님의 형상을 나날이 닮아가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형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태어나지 않은 태아, 가난한 사람, 학대받는 사람, 장애인, 노인, 외국인 체류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과 존엄성과 정의를 옹호할 때, 우리의 호소가 단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러면 안 된다. 우리는 이제 할 말이 훨씬 더 많고, 또한 그 사실은 영광스럽기 그지없다. 나쁜 소식을 먼저 보도록 하자. 죄로 인해서 우리가 가졌던 하나님의 모든 형상이 다 오염되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은 이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닮아야 할 형상으로 오셨고, 이제 그분은 인간의 운명을 나누는 경계선(dividing line)이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창조의 정점을 능가하는 인간 존엄성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 이하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면 우리는 그 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꿈꾸기에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는 것은 단지 창조로의 복귀가 아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는 것” 이상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우리는 죄와 구원에 대해 말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인, 실제적이고 가시적이며 희생적인 사랑과 선한 일을 우리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Images of the Invisible God: The Weight and Wonder of Being Human

번역: 무제

인간이라는 것은 피조물이자 몸과 영혼을 가진 존재이고,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계심으로 스스로 그런 존재가 되셨다

To be human is to be the creature, in body and soul, that God built for himself to be in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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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avid Mathis

데이비드 마티스는 desiringGod.org의 주필이며,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Cities Church의 목사이다. '은혜받는 습관'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