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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왜 논쟁을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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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Russell Moore  /  작성일 202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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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Clay Banks on Unsplash

종종 다툼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거나 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위해서, 또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을 갉아먹는 지루함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인간이 벌이는 필사적인 시도이다

Often, quarrelsomeness is a desperate attempt to find a purpose or to find a place to feel important or to answer a gnawing boredom with the everydayness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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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퍼시(Walter Percey)의 소설 ‘영화보러 가는 사람’(The Moviegoer)의 주인공인 빙크스 볼링(Binx Bolling)은 이렇게 회고한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난 도서관에 가서 논쟁적인 잡지를 읽는다. 나는 자유주의자도 그렇다고 보수주의자도 아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면서 싸우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상 내게 있어서 미움은 이제 이 세상에 몇 개 남지 않은 생명의 증거(signs)처럼 느껴진다. 이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 돌아가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이제 다정하고 착한 사람들은 내게 죽은 것처럼 느껴진다. 미워하는 사람만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퍼시는 아마도 이 한 구절 속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를 요약하는 거 같다. 아니, 그는 사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사는 게 세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논쟁이야 어느 시대에나 일어나기 마련이고, 또 종종 무엇이 진짜 중요한 문제인가를 놓고도 서로 간에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사도 바울이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딤전 6:4)라고 경고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물론 바울 자신도 그 누구보다 기꺼이 논쟁에 뛰어들곤 했던 인물이다. 한때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이유로 베드로를 면전에서 꾸짖었고, 또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아주 거친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부부의 사랑이 난교와 다른 것 만큼이나 바울의 경우는 논쟁 자체를 위한 논쟁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실, 바울이 경고하는 다툼은 바로 난교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일”(갈 5:17-21)에 대한 경계이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을 때 다툼과 성적 부도덕은 결국 정죄와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을 맞게 된다(갈 5:21). 끊임없이 “어리석은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시정되어야 하고, 경고와 꾸짖음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뒤틀린 자” 그리고 “스스로 정죄한 자”(딛 3:9-11)로 간주되어야 한다. 


주님의 종이라면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또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서 “다툼이 나오기” 때문이다(딤후 2: 22-23).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성경이 성적 부도덕을 논쟁하고 싶어하는 투쟁심과 연결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왜 그런 걸까? 


가십거리가 주는 엔터테인먼트를 향한 열정


지난 수년 간 나는 필요할 때 논쟁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보았고,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논쟁에 뛰어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선함에 대한 사랑과 잘못된 것을 믿는 사람들을 바로 인도하기 위한 열정 때문이지 결코 논쟁 자체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진리를 위한 열정” 때문에 논쟁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그냥 열정 그 자체를 느끼고 싶은 욕심 때문에 싸우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깊은 상처와 종종 심각한 스캔들을 일으키는 죄를 숨기던 사람들의 진실이 수면 위에 드러나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빛 가운데로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어느 연로한 목사님은 내게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를 폭발시키게 만드는 것도 없어.” 그말은 수없이 진실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퍼시의 소설 속, 영화관에 가는 사람의 삶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생명을 주는 성령님이 없을 때 인간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오로지 감각적인 자극을 통해서만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소설가, 퍼시가 죽은 개구리의 다리를 움직이게 만든 전기 충격과 비교한 인간 삶의 모습이다. 종종 다툼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거나 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위해서, 또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을 갉아먹는 지루함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인간이 벌이는 필사적인 시도이다. 


지금은 천국에 가신 또 다른 노 목회자는 오래 전 사람들이 자기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얼마나 절망감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내게 토로한 적이 있다. “누구누구가 목사님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다니,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게다가 지난 주 설교에 관해서도 그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더라고요…”  등등.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런 말에 신경쓴다는 게 아니에요. 아니, 문제는 내가 신경을 너무 쓴다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이런 모든 게 물론 삶의 계획과는 무관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인정하는가 여부에서 나의 가치를 찾는 쪽으로 나를 유혹하거든요. 또 다른 문제는 나에 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내가 정말로 바라는 방식으로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에요. 그들이 나에 관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아예 몰랐다면 훨씬 더 쉽게 사랑할 수 있었을텐데요.” 


나는 왜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목사님에 관해서 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옮겨다주는지 물었다. “글쎄요. 내가 알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 같고요. 또 그들이 내 편이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을 거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인간의 본성 때문이에요. 가십거리는 재미있거든요. 게다가 가십에 관한 가십은 더 재미있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가십거리를 옮기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아니라고 착각하게 만드니까요.”


잠시 멈췄다가 목사님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엔터테인먼트에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게 직장이든, 이웃이든 아니면 교회든지 간에 남의 이야기를 하는 건 일종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비슷한 거거든요.” 목사님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병원 심방을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목사님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SNS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실지 궁금하다.


다시 말하지만, 때때로 다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상황에 따라 그러한 논쟁이 성령님께 충실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적인 부도덕에 연루된 사람이 그런 부도덕을 “사랑”, “소울 메이트” 또는 “운명”이라는 식으로 의미부여를 하면서 스스로 특별하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논쟁에 대한 불건전한 갈망을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초래한 논쟁 열정에 사로잡힌 포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죄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연민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끊임없는 다툼에 빠져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연민이 우러나오는 것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나 연민을 가진다고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리더십의 위치에 두거나 대화 과정을 지시하도록 허용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건 이웃 동네 나이트클럽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전도지 배포를 담당하게 하는 것 만큼이나 황당한 자기 패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연민은 논쟁을 위한 논쟁이라는 불건전한 갈망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위해 사랑하고 기도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의 종말이 어떤지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을 살펴보면 된다. 남북 전쟁 당시 역사 재현(Civil War re-enactor)을 주장하거나 또는 한때 이단 사냥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을 말이다. 자신에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고 가치를 주던, 쓰라린 분노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내내 그들은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모든 게 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하고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게 진실이다. 위협과 두려움으로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런 시도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결코 주거나 받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랑이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확실히 예수님도 논쟁을 많이 하셨지만, 그의 논쟁은 결코 선민사상(tribalism)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선민사상에 굴복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마 21:45–22:22; 눅 4:26–28; 19:7). 더욱이, 예수님이 촉발한 논쟁을 볼 때, 당시에도 많은 논쟁이 줄을 잇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이미 논쟁하는 주제와 관련해서 예수님이 덧붙여서 논쟁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은 아주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젤롯파는 헤롯파와 원수였고, 사두개인은 바리새인을 반대하는 등, 예수님 시대에 이런 식의 적대감은 만연했다. 예수님은 때때로 그들이 제기한 논란이 되는 질문에 대답하셨고, 때로는 그들이 실제로 진실에 관여하기보다는 단지 다투고 싶어하는 진심을 간파하셨기 때문에 아예 대답을 거부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전혀 제기되지 않은 질문을 던짐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성전이 실제로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인지 여부에 관해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되는지 여부에 관해서,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인지 여부에 관해서 말이다. 


드물지만 우리는 분노한 예수님도 만난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가치관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위해 관행과 관련한 분노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권력을 얻는 것과 관련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분노는 다툼을 위한 게 아니었다. 동물적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육체의 소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분노하는 것은 마귀이다.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계 12:12). 마귀는 갇힌 동물에 불과하지 결코 양치기도 또 양도 아니다. 


결국 다툼을 위해 다툼으로 이끄는 지루함과 생명 없음은 논쟁에서 당신이 옳다고 결론이 난 경우에 조차 당신으로 하여금 논쟁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데, 그건 논쟁이 주는 즐거움이 지루함과 생명 없음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다다르는 곳은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선함이 아니다. 그건 단지 행여나 “적”이 말실수를 하길 기다렸다가 함정에 가둘 기회만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자세로 이어질 뿐이다. 자신을 향해 사람들이 가졌던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견디신(마 22:15) 예수님은 결코 스스로 그런 본보기를 만들지는 않았다.


요즘과 같은 세상에서는 항상 다툼을 일으키는 주체인 상처 입은 영혼들이 의제를 정하고, 누군가가 거기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지도자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화재의 원인이 가솔린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군중의 칭찬(요 15장)과 다른 사람들이 정한 다툼의 의제(마 26:51-56)로부터 스스로를 멀리하셨다. 


어리석은 논쟁으로부터 멀리하기


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한 논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논쟁이다. 이 논쟁의 시작은 온유함과 이성이고, 다른 쪽의 반응에 따라 논쟁에 더 깊이 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논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논쟁 태도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추수감사절 테이블에서 총기를 휘두르거나 가구를 뒤집으면서까지 굳이 논쟁에서 이길 마음이 없는 사람들도 기꺼이 감수하는 “단점”이기도 하다. 물론 논쟁에서  마지막 말을 뱉는 사람은 아마도 거칠게 욕설을 지르는 사람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가? 전혀 아니다. 당신의 결론이 다음과 같기를 원하는가? “내년에 우리 의견이 좀 더 영향력을 가지려면, 아무래도 코카인과 무기가 더 많이 필요할 겁니다.” 아니다. 대신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건 역기능입니다. 내년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아니, 우린 지금 떠납니다.”


오래 전 마크 놀(Mark Noll)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을 썼는데, 그가 말한 스캔들이란 제대로 된 지성이 별로 없는 현실이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 현재의 스캔들은 복음적 변연계(limbic system, 성적 흥분을 포함해서 흥분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의 스캔들이고, 스캔들이라고 해봐야 그나마 변연계가 남아있는 전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논쟁 중에 던질 “한마디 말”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할 말을 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영혼을 더 소중히 여기는, 전혀 다른 방법을 모델로 삼는 것이다. 다툼이 생명인 사람들을 상대로 승리하는 방법은 논쟁이라는 게임 자체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추구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y Unhealthy People Crave Controversy

번역: 무제


결국 다툼을 위해 다툼으로 이끄는 지루함과 생명 없음은 논쟁에서 당신이 옳다고 결론이 난 경우에 조차 당신으로 하여금 논쟁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데, 그건 논쟁이 주는 즐거움이 지루함과 생명 없음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The kind of boredom and lifelessness that leads to quarreling for quarreling’s sake can mean that, finally, you find only controversy interesting—even if where you end up ‘on the issues’ is cor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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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Russell Moore

러셀 무어는 New Orleans Baptist Theological Seminary(MDiv)와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PhD)에서 수학했다. Southern Baptist Convention의 회장이며 미국 TGC의 이사이다. 저서로는 '폭풍 속의 가정', '입양의 마음', 'Onward: Engaging the Culture without Losing the Gospel'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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