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by Sam Allberry2020-10-08

내가 가진 몸이 우연의 결과에 불과하다면, 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If your body is accidental, then it follows that it’s incidental.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서구 세계가 섹슈얼리티와 성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비밀이 아니다. 이십 년 전만 해도 동성간의 결혼이 결코 대중적으로 인정받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트랜스젠더라는 주제 또한 결코 주류 사회가 관심을 가질만한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고 현대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이러한 변화를 보다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진보의 필수 신호이자 바꿀 수 없는 선(good)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고 또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기독교적 견해가 비록 서구 사상으로부터 크게 지지받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합법적인 것으로는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제 전통적인 기독교적 사고는 점점 더 사회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금부터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 속에서 발생한 최소한 네 가지의 변화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방안을 제시하겠다.


1. 도덕적 직관이 바뀌었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그의 획기적인 책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에서 우리의 도덕적 신념이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직관적인 이유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직감적으로 안다. 직감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라는 반응을 유도하는 인간의 직관은 무엇보다 지난 십 년 사이에 아주 많이 바뀌었다. 특정한 도덕적 미각이 새로운 싹을 틔우더니 작용하기 시작했다. 어떤 행동 과정이 해로운 것처럼 보이는가 아닌가의 여부, 자유롭게 하는가 억압하는가의 여부 그리고 공정한가 차별적인가의 여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고, 바로 이런 요인이 우리의 도덕적 결론을 결정한다고 하이트는 주장한다.


이런 변화를 감안할 때 서양 문화가 왜 동성 결혼을 그렇게 빨리 받아들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새롭게 싹을 틔운 도덕적 미각 중 첫 번째를 적용해보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가 아닌가? 길거리에서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 동성애 커플이 결혼한다고 할 때, 그런 경우 과연 내게 어떤 불이익이 발생할까? 두 번째로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건 누가 봐도 자유를 보장하는 게 아니라 억압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세 번째로,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해 보인다. 어떤 커플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는데, 어떤 커플은 그렇지 않다면, 그걸 어떻게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옳은 것 같다. 그렇기에 한때 동성 결혼에 반대했던 많은 사람들조차 최근 몇 년 사이에 생각을 바꾼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또한 우리는 동성 결혼에 대한 기독교적 추론이 왜 그토록 쉽게 무너지는지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변화하는 인간의 새로운 도덕적 직관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까지도 현재를 사는 세속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을 도덕적 추론에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복음주의 교회가 과연 동성 결혼을 허용해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TV 토론을 본 기억이 있다. 교회에서도 동성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여자 토론자는 청중들이 듣기에도 매우 설득력 있고 간결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랑, 당연히 교회도 축복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여기에 반해서 상대 토론자로 나온 복음주의 진영의 목사는 계속 앵무새처럼 이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습니다.” 물론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시청자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는 무언가에, 그러니까 시청자들이 전혀 인정하지 않는 성경의 권위에만 호소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주장에 대한 응답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게 우리 인간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사랑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시기에 사랑이 무엇이고 사랑에 어떤 순서를 매겨야 옳은지 알기 위해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방향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2. 우선순위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날 세속적인 사람들은 소수자(LGBTQ+, 소수 인종과 성소수자를 의미하는 단어)를 향해서 자행되었던 과거의 차별을 되돌아보고 끔찍해한다. 우리는 이제 과거에 동성애 공포증과 게이 커뮤니티의 악마화로 인해 그들이 받았던  끔찍한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과 같은 영화와 ‘트랜스페어런드(Transparent)’와 같은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 문화가 한때 명백하게 희생양으로 만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는 오히려 연민을 가진다. 여러 면에서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변화에 박수를 보낸다. 왕따와 이런 식의 괴롭힘은 성경적으로 볼 때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자행되었던 차별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수치심은 이제 교차 현상으로 이어졌다. 과거에는 사회가 주는 피해로 인해 소수자가 침묵해야만 했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피해자 위치를 하나의 특권으로까지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교차 지점에 있는 누군가가 그런 소수자 지위를 하나 이상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목소리가 공공 광장에서 가지는 신뢰도는 이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것은 결코 평등한 경쟁의 장이 아니며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불공정의 현장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흑인, 여자, 레즈비언이라면 그 사람의 목소리는 남자, 백인, 이성애자보다 더 큰 울림을 갖는다.


이러한 역학 변화는 또한 소수자가 정서적 또는 심리적 피해를 입는 것에 대한 필요 이상의 큰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얼마 전 나는 한 일반 대학 캠퍼스에 있는 기독교 단체에게 성생활과 복음에 대해 강의를 하도록 초대를 받았는데, 그 캠퍼스의 소수자 옹호 단체가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나는 시위자들을 만나 그들의 우려를 들었고, 내가 행여라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들이 그 모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걱정은 행여라도 그 모임에 참석한 동성애 기독교인이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상처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좀 더 알아보았더니, 아무리 온유하게 표현을 해도 단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사실 자체가 상처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대학 캠퍼스에서 소위 말하는 진보적 사고라는 게 사실은 왜 그렇게도 많은 검열을 자행하는지 알 수 있다. 누군가의 관점이 해를 끼친다면 그런 관점은 더 이상 거론될 수도 또 토론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은 그냥 침묵하거나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3. 성과 결혼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아주 오랜 시간을 통해서 이뤄졌고, 바로 이 측면에서 볼 때 성적 혁명은 1960대로까지 거슬러간다.


첫 번째로 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섹스를 출산과 연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섹스는 이제 단순히 즐거움의 방법이고 굳이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 필요가 없다. 이것은 초음파 기술의 발전과 함께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감수성 및 발달 등에 대한 의학적 이해가 점점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낙태에 찬성하는 로비가 왜 그렇게 열광적인지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궁극적으로 낙태는 태아에 관한 게 아니다. 아이를 낳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즐거움만을 주는 섹스를 하는, 바로 그 권리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로 결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었다. 현재 많은 서방 국가들이 동성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현실이 도래하기 한참 전부터, 결혼에 대한 생각은 훨씬 더 중요한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결혼은 이제 더 이상 자녀 출산을 포함해서 평생 지속해야 하는 거룩한 약속이 아니다. 그 대신 결혼은 이제 사실상 유연성을 가진 하나의 낭만적인 계약이다. 상대를 향해서 가지고 있던 낭만적인 감정이 사그라드는 순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또는 두 사람이 동시에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는 게 결혼이 되었다. 따라서 결혼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득세하는 한 굳이 상대 배우자가 이성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결혼이 단지 낭만적인 감정을 누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누가 봐도 불공평한 처사이다.


4. 인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날, “진짜” 당신은 당신 자신이 내면 깊이 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 시대의 영웅이 가지는 서사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한 다음에, 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발견한 것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진짜”는 오로지 당신만이 발견할 수 있고, 다른 그 누구도 당신을 대신해서 당신이 누구라고 말할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이 가진 몸은 전적으로 우연의 결과이다. 무신론적 진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몸은 ‘당신’이라는 존재가 붙어있는 물질 덩어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 어떤 본질적인 의미나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진화는 이렇게 주장한다. 물리적인 것은 얼마든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런 주장이 맞다면 우리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몸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꾸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가 가진 몸이 우연의 결과에 불과하다면, 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에 비록 몸이 내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캔버스임에도 불구하고, 몸은 그 어떤 식으로도 결코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이런 네 가지 변화는 우리가 사는 이 문화적 시대를 탐색할 때 매우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 성 윤리와 성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적 이해는 결코 기이하거나 구식이 아니다. 그건 단지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위험할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변화들이 단지 세속 사회에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를 다니는 많은 교인들의 의식 깊숙이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물다섯 살 아래의 청년이라면, 이런 생각이야말로 그들이 숨 쉬고 살아온 산소이다. 이런 생각은 그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교회에는 지금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 게 성경적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동시에 비록 성경적으로는 확신하지만 감정적으로는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건 설득력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10월 9일 아티클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이어집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ere to Find Hope and Help amid the Sexual Revolution

번역: 무제

교회에는 지금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 게 성경적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동시에 비록 성경적으로는 확신하지만 감정적으로는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There are many people in our churches who aren’t biblically convinced about how to understand these issues; and many others who are biblically convinced, but not emotionally convinced.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Sam Allberry

샘 올베리는 Ravi Zacharias International Ministries의 국제 강사로 섬기며 미국 TGC의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Is God Anti-Gay?'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