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라워 항해에 관한 팩트 아홉 가지
by Joe Carter2020-10-12

메이플라워 항해를 이끈 종교 집단은 자신들을 부패 집단이라고 인식했던 영국 교회로부터 분리해서 자치적인 지역 교회를 형성하고자 했던 영국 프로테스탄트 집단으로 청교도 분리주의자였다

The religious group that made the voyage were Puritan Separatists, a group of English Protestants that wished to separate from the perceived corruption of the Church of England and form autonomous local chu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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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메이플라워 항해 400주년을 맞았다. 400년 전 서른다섯 명의 청교도들은 뉴잉글랜드에 최초로 영구적인 유럽 정착지를 설립했다.


여기 미국의 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 항해와 관련해서 당신이 알아야 할 아홉 가지가 있다.


1. 메이플라워 항해를 이끈 종교 집단은 자신들을 부패 집단이라고 인식했던 영국 교회로부터 분리해서 자치적인 지역 교회를 형성하고자 했던 영국 프로테스탄트 집단으로 청교도 분리주의자였다. 분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회중적 형태의 교회 정치를 선호했으며, 공식적인 언약을 기반으로 각각의 개별의 교회가 설립하고, 자체적으로 간부를 선출하고 교회 회원을 “보이는 성도(visible saints)”로 제한했다. 분리주의자 회중은 당시에 종교적인 자유에 좀 더 관용적인 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포위 공격을 두려워했던 그들은 잠시 영국으로 돌아간 다음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기로 결정했다.


2. 청교도들은 신세계가 가져다줄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영국 정착촌은 제임스타운이었는데, 그곳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정착민은 오백 명에 달했다. 그러나 레이덴의 망명자들은 미국에 정착하는 것이 그들의 신성한 의무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진실로 믿고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더 단순한 마음으로 그분을 믿을 때 우리의 노력에 맞게 더 은혜롭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3. 원래는 메이플라워(Mayflower)와 스피드웰(Speedwell)이라는 두 척의 배가 8월 5일에 북미를 향해 출항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세 번이나 배에 물이 샌 스피드웰은 결국 수리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 배에서 선별된 일부 승객들이 메이플라워에 옮겨 탔다. 9월 6일에 메이플라워가 마침내 출항했을 때, 102명(남성 74명, 여성 28명) 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청교도 분리주의자였다. 청교도들은 나머지 승객을 “이방인”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빌린 일손 또는 하인들이었다. 거기에는 네 살에서 여덟 살인 네 명의 형제자매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일종의 계약제 하인들이었다. 그 외에 또 런던 상인에 의해 모집되어 버지니아 식민지로 향하는 농부들도 있었다.


4.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여정의 전반부 동안에는 비교적 별 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반부 항해는 위험했다. 거친 바다와 폭풍으로 인해 메이플라워는 500마일 이상 코스를 벗어났다. 청교도들은 애초에 버지니아 북부(오늘날 뉴욕 주에 있는 허드슨 강 포함)에 입항할 예정이었지만, 배는 거의 난파되어 북쪽으로 돌아 현재 매사추세츠 주 프로빈스 타운의 프로빈스 타운 항구에 도착했다. 청교도들은 정착지를 결정하기 위해 케이프코드 주변 지역을 탐험하였는데 한 달 반을 보내게 된다.


5. 메이플라워가 버지니아에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그들이 애초에 서명한 버지니아 회사와의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유효한 계약도 없고 또 공식적인 정부도 없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청교도의 규칙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급증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수결 합의에 따라 스스로를 판결하기 위한 임시법이 작성되었다. 나중에 메이플라워 서약(Compact)이라고 알려진 이 협정은 식민지 주민들이 자치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영국왕 제임스에게 충성스러운 신분을 유지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짧은 문서였다. “평등한 법률, 조례, 법, 헌법이나 직책을 만들어….” 식민지의 이익을 위해 그 법을 준수하라. 하나의 사회를 만들고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해 함께 일할 것이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 따라서 살아갈 것이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신세계에서 자치를 수립한 최초의 문서였으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초창기의 성공적인 시도이기도 했다.

6. 메이플라워 서약의 전체 문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아래에 서명한 우리는 대영제국, 프랑스 및 북아일랜드의 신, 국왕, 신앙의 수호자, 등등의 은총을 통해, 숭배하는 군주인 국왕 제임스 1세(잉글랜드 왕) 제임스의 충실한 신민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 및 국왕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버지니아 북부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항해를 계획했고, 개척지에서 질서와 유지, 위의 목적의 촉진을 위해서 하나님과 서로의 앞에 엄숙하게 서로 계약을 체결하며, 우리 스스로 민간 정치 체제를 결성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을 제정하여 우리 식민지의 총체적인 이익을 위해 식민지의 사정에 가장 잘 맞다고 생각되는 정당하고, 평등한 법률, 조례, 법, 헌법이나 직책을 만들어, 우리 모두 당연히 복종과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

이곳 케이프코드에서 우리의 이름을 서명한 바와 같다.


제임스 영국 국왕이 통치하며, 프랑스, 아일랜드 11년째, 그리고 스코틀랜드 54년째 통치년,

서기 1620년 11월 11일

7. 청교도들과 이방인들은 혹독한 뉴잉글랜드의 겨울을 대비하지 못했다. 원주민들로부터 식량 지원을 받았지만 피난처가 없었기에 계속해서 배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괴혈병, 폐렴, 결핵이 혼합된 것으로 보이는 전염병이 겨울 내내 이들을 괴롭혔다. 봄이 되었을 때 정착민 53명과 선원의 절반만이 살아남았다. 봄이 되자 정착민들은 땅에 오두막을 지었고, 1621년 3월 21일에 마침내 메이플라워에서 하선할 수 있었다.


8. 정착민의 건강과 경제 상태가 개선되었고, 그해 가을에 윌리엄 브레드포드(William Bradford) 주지사는 이웃 아메리카 원주민을 초대하여 그해의 수확을 “추수감사절”이라는 이름으로 축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플리머스 식민지는 대부분의 지역 부족과 조약을 체결함으로 정착지가 앞으로 유럽에서 올 이민자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곳이 되도록 만들었다. 1640년대 중반까지 플리머스의 인구는 삼천 명으로 늘어났다(그럼에도 메이플라워가 착륙한 지 거의 십 년 후에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에 정착한 북쪽의 청교도 이웃보다는 여전히 적은 숫자였다).


9. 플리머스의 청교도 식민자들은 19세기 초까지 “순례자”로 불렸다. 그렇게 부른 이유에 대한 첫 번째 참조는 브레드포드 주지사가 “순례자”가 되어 네덜란드를 떠난 “성도”에 대해 언급한 원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20년 플리머스 창립 200주년에 정치가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가 그들을 “순례자 선조(Pilgrim Fathers)”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Voyage of the Mayflower

번역: 무제

메이플라워 서약은 신세계에서 자치를 수립한 최초의 문서였으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초창기의 성공적인 시도이기도 했다

The Mayflower Compact was the first document to establish self-government in the New World and proved to be an early, successful attempt at democracy in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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