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까?
by 이승구2020-09-27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이 목적을 떠나서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그 모든 것을 능히 다 미루어 살필 수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엡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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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선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그것들을 우연이나 운에 맡겨두신 것이 아니고, 그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온 세상을 인도하시고 통치하셔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질서 있는 관여 없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는” 일이다. 성경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이런 의미의 섭리를 믿어야 한다. 이런 성경적 섭리 이해는 기본적으로 몇 가지를 배제한다.


성경적 창조와 섭리 이해를 가질 때 배제되는 사상들


첫째로, 이 복잡한 세상이 그저 있게 되었고, 이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이 배제된다. 성경적으로 판단할 때,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과 말일 뿐이다(시 14:1). 이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무신론적인 생각을 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들은 이 세상이 말하는 “합리적”이라는 말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적으로 조정된 합리적인 판단에 의하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라고 한다. 그러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는 바울의 말이 심각한 말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롬 1:28). 사실 여기서 “마음에”라고 번역된 말은 우리 말 성경 난하 주에서도 잘 밝히고 있듯이 “지식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니 “지식에서 하나님을 분별하거나 인정하거나 생각하기를 싫어하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28-32절 말씀은 이론적 무신론과 실천적 무신론이 인간의 모든 악의 근원이 됨을 잘 지적하고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나 그 후에는 그 피조계를 그냥 내어 버려두셨다는 생각이 배제된다. 특히 물론 그 이전에도 비슷한 생각이 있었으나 17세기 말에 시작해서 18세기에 만연해 나간 소위 이신론(理神論, deism)이 배제된다는 말이다. 록크(John Locke)와 뉴톤(Isaac Newton)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이신론은 영국의 콜린스(Anthony Collins), 미들튼(Conyers Middleton), 톨랜드(John Toland), 틴달(Matthew Tindal), 쳡(Thomas Chubb), 그리고 울스톤(Thomas Woolston), 허버트(Lord Herbert of Cherbury),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 독일의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렛싱(Gotthold Lessing), 그리고 칸트(Immanuel Kant),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워싱턴(George Washington), 제퍼슨(Thomas Jefferson), 그리고 페인(Thomas Paine) 등이 그 대표자들이다. 대개 기독교권(Christendom) 안에서 자라나서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아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 가운데, 창조 이후에는 일종의 자연 법칙이 주어져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자연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것이지 매순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이런 생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아이작 뉴톤(Isaac Newton, 1642-1727)이라고들 논의합니다), 이런 것이 구체화된 것이 이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연적인 과정을 중요시 하니 이를 자연신론(自然神論)이라고도 한다. 성경을 따라서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합리성(그러므로 잘못된 합리성)을 따라서 생각하다가 나타난 잘못된 생각이다. 이신론의 아이러니는 섭리는 부인하는 사람들이 창조와 창조자의 의도와 그 창조자의 존재는 인정하고 변호한다는 것이다. 대개 이신론은 초자연을 거부하면서 자연만을 인정하는 자연 종교(natural religion)와 구속과 이적과 기도 등을 거부하고 도덕률 중심으로 종교를 이해하는 도덕 종교(moral religion)를 참된 종교로 제시하려고 했다.


셋째로, 이 세상이 신과 동일시 될 수 있다는 고전적 범신론(汎神論)과 이 세상의 과정이 하나님의 전개 과정이라는 헤겔적인 범신론, 그리고 이런 생각들에 대한 많은 공격과 비판을 감안하면서 근자에 나오는 이 세상의 과정이 하나님 자신은 아니지만 이 세상의 전개 과정 중에서 신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또는 범재신론(汎在神論)이 배제된다. 근자의 만유재신론은 이 세상에 넓게 퍼진 생각이고 점점 더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에 우리의 주의를 요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성경적으로 믿는 사람은 만유재신론적 생각을 할 수 없다.


성경적 섭리론의 의미


이런 잘못된 사상들이 배제되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나아갈 때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말하게 된다.


첫째로, 창조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존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한순간도 하나님께서 보존하지 아니하시면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라는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생각해야 한다. 매순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유지된다.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붙드시지 아니하시면 이 세상은 사라진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시편 기자와 같이 다음 같이 말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 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 도다.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시 104:10-13). 이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므로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하거나 유지해 갈 수 있는 것은 없다. 바울이 이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우리들도 “우리가 그를[즉,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고 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과정을 그저 보존하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정하신 목적지로 이끌어 가시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심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온 세상을 통치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엡 1:11). 온 세상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통치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것을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이라고 해왔다. 이 세상의 되어지는 모든 일은 숨겨져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옛날에 이것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참으로 인정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엡 1:10)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궁극적 목적이기에 이 목적을 이루시려는 그 계획은 이미 창세전부터 있었던 것이다(엡 1:3). 이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고, 그 경륜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 세상의 역사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이 목적을 떠나서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그 모든 것을 능히 다 미루어 살필 수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엡 1:11).


셋째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지만, 대개는 이 세상의 과정과 함께, 그러므로 소위의 제2의 원인들(causa secunda)과 함께 섭리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즉 비상섭리와 일상적 섭리를 모두 다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직접적 역사를 비상 섭리(extra-ordinary providence), 즉 이적이라고 한다. 이것을 부인한 것이 앞서 말한 이신론이나 이신론을 향해 나가는 생각들이다. 필요하면 제2의 원인이 없이 또는 이 세상의 일상적 과정에 역행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아버지가 없이도 마리아에게 수태되도록 놀랍게 역사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놀라운 이적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느냐에 달려 있다. 이적은 우리의 필요나 우리의 열심이나 우리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시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비상 섭리(非常攝理)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과정이 이 세상의 제2의 원인들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 일상적 섭리(日常攝理, ordinary providence)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입장은 제2의 원인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 부모님이 있어야 우리가 태어난다. 우리의 존재에 있어서 부모님이 제2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이적도 제2의 원인을 사용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홍해를 가르신 사건도 다음과 같이 일어난 것이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 그러니 비상섭리가 아닌 일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섭리를 참으로 믿는가?


이제 중요한 것은 이런 섭리를 과연 믿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일어 날 수 없다. 그러므로 섭리를 참으로 믿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섭리를 참으로 믿는가에 달려 있다.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을 믿어야 한다. 사실 모든 것이 잘 될 때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고 믿는다고 하기는 비교적 쉽다. 물론 그런 순경(順境)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이신론적 사고가 나타나고 한 것을 보면 순경 가운데서도 섭리를 믿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역경(逆境)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믿음의 행위이다. 우리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고 한 선배들처럼 우리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그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존해 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 신앙이 있다. 이 상황이야 말로 참으로 우리의 믿음이 있는지 없는 지가 드러나는 위기(crisis)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위기는 종국적인 위기(the final crisis)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위기”라는 말이 “판단하다, 심판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크리노”에서 왔음을 잘 생각하면서 이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을,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역경(逆境)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믿음의 행위이다. 우리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고 한 선배들처럼 우리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그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존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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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승구

이승구 교수는 기독교교의학(CHRISTIAN DOGMATICS)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로서, 총신대 기독교교육과 졸업, 합동신학대학(MDiv)과 영국 The University of St. Andrews(PhD)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