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상식적인 신학을 할 수 있을까?
by 김상일2020-10-05

상식을 추구하는 신학, 선교적 교회의 신학은 신자들과 비신자들, 교회의 직분자들과 초신자들 사이에 담을 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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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중간 지대에서의 신학함은 상식적인 신학을 추구한다. 여기서 상식적이라는 말은 켈러의 신학이 1) 일상성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인 동시에 2) 공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켈러의 신학이 상식적이라고 할 때 그 말이 뜻하지 않는 것도 있다. 우선 1) 켈러의 신학에 드러난 복음이 시대의 상식 안에 갇혀버린 나머지 동시대인들에게 아무런 도전을 주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는 뜻은 아니며, 또한 켈러가 자신의 신학을 상식적이 되게 하기 위해서 2) “기독교 고전 교리에 수정을 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센터처치, 563).


왜 이런 신학함이 켈러에게 중요하게 되었는가. 켈러는 그 시대적 배경을 후기 기독교 왕국 시대(post-Christendom)의 도래에서 찾는다.


“우리는 후기 기독교 시대 또는 후기 기독교 왕국 시대에 진입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서구 사회에서 교회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이제 문화의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로 이동했다. 예전에는 교회가 사회 문화 제도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러한 기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압력과 관행을 뚫고 교회로 발걸음을 향할 것이라 기대할 수가 없다. 이미 시대가 달라진 것이다.” (센터처치, 536)


요약하면, 기독교 국가라는 맥락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교회 문화를 이해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따라서 켈러는 영국 출신의 인도 선교사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을 인용하면서 서양 교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서구 문화권이 기독교 세계라는 안일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서구 문화권은 이미 기독교에서 멀어진 문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켈러가 사역했던 뉴욕 맨하탄은 계몽주의 시대부터 서서히 진행되어온 서구 문화권의 이런 기독교 이탈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곳이며, 기독교적인 용어가 당연히 외부 문화에서도 통용될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사역하는 교회들은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켈러는 앞에서 언급한 뉴비긴이 창안한 선교적 교회 담론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선교적 교회란 무엇인가. 비록 이 공간에서 선교적 교회에 대해서 자세하게 논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개념을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는 있다. 켈러의 중간 지대에서의 신학함은 모두 선교적 교회라는 맥락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란, 외부 문화가 교회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며 문화적으로 동일성을 가진다는 안일한 가정을 벗어나서, 마치 제3세계의 선교사들이 그러하듯이 서구 문화를 이방 문화,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문화로 접근하려는 교회이다.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켈러는 자신이 사역했던 리디머 교회를 선교적 교회로 이해하고. 맨하탄에서의 사역을 펼친다. 하지만 켈러가 바라보는 선교적 교회는 기존의 선교적 교회와는 약간 다르다. (켈러가 리디머 교회의 상황에서 선교적 교회론을 채택하는 과정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면 센터 처치 518-573쪽을 참조하라) 그리고 그런 차이는 켈러의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드러난다. “나는 한 교회가 고전적인 복음 교리를 강력하게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여전히 선교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여전히 서구 문화와 선교사적 만남을 가지면서 동시에 교회에 다니지 않던 비전통적인 비그리스도인들을 전도하고 제자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센터처치, 562-563)


이 질문에 대해서 켈러는 교회가 서구 문화와 선교적 만남을 가져야 한다고 답하고, 선교적 만남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정리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가 바로 상식적인 신학의 추구이며, 그러한 신학은 특별히 일상용어의 사용과 공동선의 추구가 두드러지는 신학이다. 우선 일상용어의 사용부터 생각해 보자. 켈러는 신학이 일상용어로 표현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 국가에서는 교회 내부와 외부의 언어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초기 미국 의회의 문서들은 성경의 인용과 암시로 가득 차 있어서 당시 비교인들도 신학적 용어를 이해했다. 그렇지만 선교적 교회에서는 용어들이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비신자들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이웃들이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참여하고 있는 듯이 말한다면, 결국 더 많은 이웃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거나 초대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적 교회는 교회만의 언어나 기도와 예배를 위한 특수하고 고어체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피해야 한다.” (센터처치, 566)  


상식을 추구하는 신학, 선교적 교회의 신학은 신자들과 비신자들, 교회의 직분자들과 초신자들 사이에 담을 쌓지 않는다. 오히려 켈러에 의하면 이런 신학은 “투과성”을 가지고 있다. “투과성”이란 교회 내 내부자와 외부자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언어나 문화를 가능하면 만들지 않고, 대신 항상 교회가 외부인들을 향해서 열린, 좀 더 유동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 비신자들이 항상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모든 활동을 진행하면 교회에 비신자들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 이미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신앙이 없는 자신들의 친구를 교회로 데리고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투과성의 효과는 신앙이 없는 이들이나 초신자인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이 어떤 메시지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복음을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으로 이끄는지를 실제로 보여줄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복음이 삶 가운데 어떻게 체화되는지를 그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복음 메시지를 소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센터처치, 567)  


하지만 이렇게 투과성을 가지는 공동체, 즉 선교적 교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목표가 전통적 교리를 변질시키거나 타협해야 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켈러는 특히 복음을 설명하는 고전적 교리들이 여전히 서구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하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속적 속죄와 법정적 칭의의 고전적 메시지는 이 세상에서 보다 검소하게 살며 정의를 행하는 강력한 신학적 토대와 내적 동기 부여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교리를 거부하는 것은 서구 문화와의 만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센터처치, 563).


그렇다면 신학이 상식적이 되어 일상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투과성을 가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히려 고전 교리를 공교하게 맥락화함으로써 아직 온전히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복음 제시가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센터처치, 563).


즉 고전적 복음의 메시지를 타협하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메시지를 어떻게 맥락화시키느냐의 문제가 바로 켈러가 말하는 “투과성”이다. 따라서 이런 상식적인 신학,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담을 쌓지 않는 신학을 만들어 간다고 해서 굳이 세상 속에서 교회가 지켜내야 할 복음의 맛을 잃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켈러는 여전히 교회는 세상의 공동체와는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으로, 켈러는 자신이 추구하는 상식적인 신학이 “공익을 추구하는 반문화”라는 점을 강조한다. 공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교회와 외부 문화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준다. 연결과 소통이 가능하게 해준다. 하지만 교회는 복음을 공고히 붙잡을 때에만 공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복음을 공고히 붙잡는 교회는 저절로 반문화(counterculture)적이 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복음을 추구함으로써 반문화적 공동체가 되지만, 또한 정확히 복음을 붙잡을 때에만 공익을 섬기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교적 교회는 섬기는 공동체로 반드시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공익을 추구하는 반문화(counterculture)이다. 서구에서 수백 년 동안 교회는 종교적 관심사에만 자신을 제한했으며 광범위하게 절반 정도만 기독교적인 큰 문화권 안에서 느슨한 모임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비기독교적인 주변 문화와의 급진적인 단절을 의미하게 되었다. 교회는 더 이상 조합이나 동호회와 같은 것이 될 수 없고, ‘두터운’ 대안적 인간 사회로서 관계들이 강하고 깊다. 그 안에서 성, 가족, 정체성, 권력 등이 경건하고 구별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실천되는 곳이다. 그리스도인 교회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교회는 또한 주변에 속해야 하며 주변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이웃들에게 교회가 섬기는 공동체임을 보여주어야만 하며, 희생적으로 시간과 제물을 도시의 공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센터처치, 566)


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어떠한가. 장년층에서는 비록 여전히 기독교 신자가 상당하지만, 청년층으로 내려가면 이제 교회는 더 이상 그들에게 친숙한 집단이 아니다. 더군다나 최근 코로나-19에 대한 일부 교회의 비상식적인 대응이 언론 보도를 통해서 마구 퍼지면서 이미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던 교회의 대사회 신뢰도는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교회가 투과성을 추구하는 일을 놓치게 된다면, 즉 불필요하게 특수한 언어 사용을 고집함으로써 사회와의 담을 스스로 쌓거나,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복음이 가진 공익적 특성을 놓치게 된다면 교회는 한국 사회 안에서 앞으로도 더욱 환영받지 못하는 집단이 될 수밖에 없다.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상식적인 신학을 할 것인가. 일상 언어로 복음의 핵심 개념을 소통할 뿐만 아니라 교회 문화 안에서 오직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특수성을 걷어내고, 비신자와 신자, 오래된 신자와 초신자 사이의 모든 벽을 헐어내는 신학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 말은 동시에 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통해서 공익을 추구하는 반문화가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는 뜻이다. 이런 명확한 목표들을 가지고 교회가 각각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어떻게 이런 일들을 이뤄갈지를 고민한다면, 성령께서 분명히 각 교회에 지혜를 주실 것이다.


교회는 초기부터 외부 문화에 열려 있는 공동체였다. 하지만 동시에 외부 문화와는 다른 공동체였다. 특히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섬김, 사회 전체의 공익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달랐다.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가 이런 복음의 공익적 성격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명령 중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온 에너지를 집중한다면,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서로 완전히 다른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한다면, 교회는 한국 사회 속에서 환영받는 공동체, 한국 사회를 섬기는 공동체로 남아 있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사회를 향해서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그 일을 할 수 있다.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온 에너지를 집중한다면,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서로 완전히 다른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한다면, 교회는 한국 사회 속에서 환영받는 공동체, 한국 사회를 섬기는 공동체로 남아 있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사회를 향해서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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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상일

김상일 작가는 UC 버클리(B.A.), 고든콘웰 신학교(M.Div) 졸업 후, 현재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육과 실천 신학으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현재 서평 쓰는 남자 블로그(www.likeellul.com)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으며, 팀 켈러에 관해서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 "좋은 나무" 웹진과 시니어 매일 성경에 글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