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속 우산보다 강한 피난처, 나의 하나님
by Christopher Catherwood2018-11-14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19세기 영국인 판사였던 찰스 보웬(Charles Bowen)은 저명한 법조인이었다. 반면, 시인으로서는 그다지 명성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법적 판결이 현대의 영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듯이, 그가 남긴 짧은 시구는 여전히 선한 영향력으로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한다. 


의로운 자들을 향한 비

그리고 악한 자들에게도 내리는 그 비

왜 정의로운 자들에게 더 가혹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우산이 악한 자들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으로 그다지 뛰어난 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지은 이 짧은 시구에 뛰어난 신학적 통찰이 담겨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TV를 떠들썩하게 했던 홍수나 태풍을 떠올려 보라.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그 엄청난 재난을 피할 수 있었을까? 무서운 장마가 크리스천의 집만 비껴갔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믿음과 상관없이 태풍의 영향권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집이 물에 잠기거나 목숨을 잃는 고통을 경험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더 가혹한 고통을 겪는 일도 빈번하다. 특히, 크리스천들이 종교적 이유로 박해받는 땅에서는 그 고통의 정도와 빈도가 더 심하다. 이와 같은 지역에서 하나님을 믿는 일은 자신의 직업과 자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베드로는 박해에 대하여 ‘믿음을 향한 아름다움이니 고난으로 여기지 말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박해의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실로 감당하기 힘든 수많은 고통을 수반한다.


한국이나 기독교 국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이러한 박해의 위험에 크게 노출되지 않은 채 살아간다. 하지만 실천적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일이 미래에도 지금처럼 평온한 일상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보았을 때, 찰스 보웬의 시에 담겨 있는 신앙적 고민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종종 듣게 된다. 하지만 돈 카슨(Don Carson)은 그의 명저인 ‘얼마나 더 인내해야 하는가? 고통과 악에 대한 고찰’(How Long O Lord? Reflections on Suffering and Evil)에서 이러한 세속적 사고가 신학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모든 사람은 영적 죄인이다. 이미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모든 사람은 선하지 않다. 우리는 타락했으며 죄인이다.


그리고 죄로 가득한 타락한 세상 속에 살아간다. 


하나님의 백성(의인 혹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이나 동일하게 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만약 우리가 범람 지역에 거주한다면,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홍수를 겪는다. 또한 우리가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살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재해를 만날 수 있다.


고난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와 동일한 이치를 개개인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질병이나 죽음 등 인간의 삶과 동떨어질 수 없는 난제들을 만난다. 때때로 이러한 고통은 설명되지 않는 문제로 느껴진다. 그러나 고난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결과물이다. 욥 역시 왜 그러한 고통의 시간을 겪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처럼,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설명이 불가능한 일로 다가온다.


지속적인 간구


이 문제에 대한 묵상 중에 시편 121편을 읽게 되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다. 이 시편의 내용이 곧 크리스천의 삶이자 운명이다. 우리는 절대 홀로 버려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보호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고, 하늘과 땅을 지으신 구세주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시는 나의 보호자이다.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는가?


고난에 부딪힌 인간은 기본적으로 분노로 반응한다.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분노함으로써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이 과연 우리의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그러한 반응은 오히려 고통 위에 분노의 감정까지 더해 상황을 더욱 버티기 힘든 상태로 몰아갈 수도 있다. 또한 유일한 희망인 하나님과 대적함으로써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망연자실에 빠질 수도 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영원한 안식에 닿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아내는 2018년 10월로 예정되어 있던 장인어른의 100세 축하파티에 무척이나 함께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날을 3개월 앞둔 지난 8월, 아내는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기대하던 기쁜 날을 잃어버렸고, 나는 아내 없이 홀로 축하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님 역시 크리스천이셨기에 사랑하는 딸을 영원한 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그 마음을 잠잠케 하셨다. 한 친구는 내게 위로하기를 “함께할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안타까워”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내를 다시 만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아내와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재회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함께할 수 없던 아픔과 슬픔을 영원히 회복할 수 있으리라. 이것은 감정적인 위안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나게 될 예정된 사실이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분노하고 맞서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죄다. 홍수와 태풍, 그리고 죽음의 근본적 원인인 인간의 죄성과 싸워야 한다. 반대로, 우리의 구원자이며 진정한 희망인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난을 피할 수 없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방패가 세상 속 호우를 잠시 면하게 해 줄 우산이 아니요, 구원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God Is Better Than an Umbrella

번역: 정새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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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Christopher Catherwood

크리스토퍼 케터우드는 Winston Churchill Memorial Trust의 멤버로 영국 캠브리지에 위치한 William Perkins 교회에서 25년 동안 리더로 섬겼다. 저서로 'Martyn Lloyd-Jones: His Life and Relevance for the 21st Century'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