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에게 있어 ‘은혜’와 ‘기도’에 관하여
by 장대선2020-10-17

로마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라고 믿고 사는 우리에게도 별로 생소하지 않은 실정이다. 개혁된 교회에 속한 신자들마저도 기도에 대해 공로적 이해가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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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는 단연코 ‘은혜’(Gratia)일 것이다. 물론 은혜 외에도 ‘감사’나 ‘기쁨’같은 단어들도 흔히 사용되지만, 신앙의 대화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단어가 바로 은혜이며 거의 일상의 감탄사라 할 만큼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동시에 은혜에 대한 이해와 그 용법에 있어, 보편적으로나 광의적(broad sense)으로 사용되는 실정이어서 종종 그 의미와 실천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산을 판매하는 신자에게는 비가 자주 내리는 일을 은혜라고 하겠지만, 또 소금을 판매하는 신자에게는 되도록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 은혜가 되는 모순의 상황에 종종 직면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은혜라는 단어는 다분히 주관적인 개념이며, 자신에게 감사와 기쁨을 야기하는 일련의 현상들이 바로 은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적 의미에서의 은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통용하는 주관적인 개념과 다르게 아주 보편적이고 공적인 개념의 단어다. 대표적으로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 있어 기초적인 바탕을 이루는 인물인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수고(노력)를 반영하는 신학인 펠라기우스 주의(Pelagianism)를 반박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 가운데서 다루어지는 전적인 은혜(summa gratia)가 바로 은혜라고 설명한다. 즉,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반응으로서의 선행(beneficium)에 반대하여,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뤄지는 역사와 은총만을 그 은혜로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칼뱅(Jean Calvin, 1509-1564)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개혁적 신학자들이 말하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전가되는 일련의 내용들을, 특히 구원과 관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총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이미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교리 가운데서 편만하게 용인된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것의 발현으로서의 선행, 그리고 공로(meritum) 등의 사상을 개혁하여,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맥락 가운데 있는 ‘은총론’(gratia doctrina)의 요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그러한 은혜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이나 수고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란,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서만 기인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펠라기우스 주의의 자유의지론과 선행의 이해를 충분히 수용한 로마 가톨릭 신앙에 있어서 은혜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되, 우리의 의지와 노력(수고)이 충분히 반영되어 제시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전적인 은혜를 베푸시되, 아무런 준비나 기대도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준비하며 소망하는 자들, 곧 스스로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에게 베푸신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바로 그러한 공로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다. 고행(ascetismus)을 비롯한 온갖 공로적 도구로서 이해되는 것이 로마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인 것이다.


사실 로마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라고 믿고 사는 우리에게도 별로 생소하지 않은 실정이다. 개혁된 교회에 속한 신자들마저도 기도에 대해 공로적 이해가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은혜’ 혹은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간절하면서도 열심이 있는 기도를 통해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는 것으로 은혜에 대한 진솔한 고백들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7-8절에서 주님은 간절하면서 열심이 있는 기도를 통해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게 되는 은혜에 대하여 다소 지지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구절들 가운데서 또 이르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마치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바 소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최상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분이 분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7장 12절에서 조금 이상한 뉘앙스의 말씀이 이어진다. 갑자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시며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신다. 더구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10장 13절에서는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전체적인 문맥과 다소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이다.


하지만 누가복음 11장의 본문에서는 마태복음 7장과는 다르게 상당히 축약 기록하여 주님께서 전체적으로 어떤 취지의 말씀을 하시려는지를 더 넓게 파악해 볼 수 있다. 즉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Lord's Prayer)에 관한 언급 가운데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신 것이 바로 이어지는 말씀의 문맥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구하여 기도할 것이 바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과 교훈으로 축약되는 율법의 취지를 따라 행하는 것이며, 아울러 이러한 율법의 취지를 깨닫고 따라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시리라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 11장 13절의 언급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의 문맥과 취지를 따라서 우리의 개혁된 신앙에서는 기도가 자신의 소망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한 의지와 노력의 도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적용된 구원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성경의 취지는 이미 개혁된 교회들의 유산인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들 가운데 잘 정리되고 반영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은 제18장에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 가운데서 ‘은혜’를 고백하고 있고, 또한 제21장의 경건한 예배와 안식일로서의 주일에 관한 교리 가운데서 ‘기도’에 관해 다루고 있다. 다만 그 맥락과 의미가 좀 더 포괄적인 범위 가운데서 다루어지고 있어 그 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은혜의 상태’에 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은 1항에서 고백하기를 “주 예수를 참으로 믿으며,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에 따라 행하려 애쓰는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 가운데서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으로 확신할 수 있는데, 이러한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지 않게 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또 제21장에서는 “경건한 예배에 속하는 하나의 특별한 요소”로서 ‘기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기도에 관해 개혁된 신학의 설명이 항상 전체적인 맥락으로서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기독교 교리를 강론하는 일련의 문답서들, 특히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논문 또는 신학의 전체와 실체’(a treatise of christian religion or, the whole body and substance of divinity)라는 책에 담긴 교리문답 가운데서 확연하게 구별하여 살펴볼 수가 있다.


카트라이트의 교리문답 제40장은 기도 혹은 기원(invocation)에 관하여 설명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라고 물은 뒤에 “기도와 맹세다.”라고 답하여, 기도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야 할 것으로 설명한다. 계속해서 “첫째로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둘째로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셋째로 어떤 힘과 능력에 의해, 넷째로 어떤 이유로 기도해야 하는가?” 라는 일반적 질문들을 통해 기도의 속성을 설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는 ‘간구’와 ‘감사’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간구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가 구하는 것”이며, 이는 마태복음 6장과 7장, 그리고 누가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 설명하시려는 의미와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또 카트라이트는 기도의 다른 부분인 ‘감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기도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한다”라며 “일반적으로는 세상의 통치에서, 특히 교회의 통치에서 보여 지는 그 분의 선하심, 지혜, 권능, 긍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한 간구에 의해서 주신 그 특별한 은총들로 인해 찬양하며, 그밖에 우리가 그 분의 긍휼의 손길로부터 받았던 것들로 인해 찬양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교리의 맥락에서뿐 아니라 기도라는 주제에 더욱 집중한 교리의 맥락에서도 확연하게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하고 끌어내는 수단(혹은 도구)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 반응하며 수반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요한 한 요소를 이루는 것이다.


끝으로 기도에 관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간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하여 보면,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들에 대해서는 성령을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곧,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에서 파악할 수 있다. 또 성령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합당하게 구할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바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들이니(마 7:1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 6:31절) 염려하며 간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33절)는 것이야말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절)라고 하는 주기도문의 가르침에 충실한 기도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 우리들이 구하는 것들 대부분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구하는 것들이라면, 우리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은혜라기보다는 믿음의 형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관련해서 이미 주님께서는 가르쳐 이르시기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절)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러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신자들이라면, 아마도 주기도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절)이라고 한 문구의 의미를 깊이 실감할 것이다. 그런 신자들의 기도는 이미 받은 은혜 가운데 있는 믿음으로 기꺼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기도, 곧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에서 고백한 것처럼 “경건한 예배에 속하는 하나의 특별한 요소”로서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개혁된 신앙에서는 기도가 자신의 소망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한 의지와 노력의 도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적용된 구원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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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장대선

장대선 목사는 도서출판 고백과문답 대표와 장로교회정치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교리 연구가로 활동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스터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제2치리서’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