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 통신 8: 영역 주권은 신정주의적인가?
by 김은득2020-10-22

모든 삶의 영역의 절대적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지만, 각각의 인간 삶의 영역(예를 들어,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은 하나님께서 영역 그 자체에 부여하신 일종의 파생된 주권, 영역 주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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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 1880년 10월 20일에 화란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를 설립하면서 ‘영역 주권(Souvereiniteit in Eigen Kring)’이라는 취임 연설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라!’ 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 유명한 연설 문구를 일생에 한번쯤은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풀러 신학교(Fuller Seminary) 전 총장 리차드 마우(Richard Mouw)는 정작 유명해진 이 연설 레토릭(rhetoric)에도 불구하고, 저의 영역 주권 사상에 대해선 그 누구도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마우의 지적은 미국 개혁주의를 향한 것이었지만, 한국에도 충분히 적용할만한 그런 비판입니다. 신정주의적(theocratic) 뉘앙스를 지닌 그런 레토릭이나 용어들이 유명해지면서, 제 영역 주권 사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각각 미국과 한국에서 기독교 정부/국가(Christian State)를 추구하는 운동이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유대학교의 설립식 자체는 암스테르담의 신교회(Nieuwe Kerk)에서 상징적으로 이뤄졌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신교회(Nieuwe Kerk)가 차지하는 국가(민족)적 위상은 암스테르담의 가장 주요한 광장인 담 광장(Dam Square), 그것도 바로 왕궁(Royal Palace) 옆에 위치한 교회인 것뿐만 아니라 1815년부터 시작된 왕족의 대관식이 예외없이 이곳에서 치뤄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마치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이나 미국의 워싱턴 내셔널 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과 같이 한 국가(민족)을 대표하는 종교 기관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역사적으로 네덜란드가 자랑스런 기독교 민족/국가(Christian Nation)임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 국가(Nation)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정부 기관으로서의 국가(State)라기 보다는 민족(People)에 가까운 단어입니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민족-국가(Nation-State)로 변모하였습니다. “신교회가 차지하는 국가(민족)적 위상” 혹은 “한 국가(민족)을 대표하는 종교기관”에서 언급되듯이, 국가와 민족은 혼용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국가 교회(National Church)라고 할 때, 정부 기관에 포함된 국가 교회도 존재하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 교회, 즉 민족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교회도 있음을 알아야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에 암스테르담의 신교회(Nieuwe Kerk)는 어느 국가 교회에 속하는 것일까요? 정답은 둘 다입니다. 원래 신교회(Nieuwe Kerk)는 도르트 총회 이후 화란 민족을 대표하는 공적인 국가 교회인 화란 개혁 교회에 속하였습니다. 그러나 1816년 빌렘 1세의 일반 조례 이후 화란 개혁교회가 정부 기관의 감독 아래 들어가면서 민족을 대표하는 교회에 정부 기관에 속한 국가 교회의 색채가 덧입게 됩니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유아 세례 증서가 신앙 고백을 따른 결과이면서도 더 나아가 유아의 출생을 증명해 주는 공문서라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민족을 대표하는 공교회이면서 정부기관에 속한 교회인 신교회(Nieuwe Kerk)에서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라!’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쳤으니, 어쩌면 제가 신정주의자라고 보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1886년 정부기관에 속한 화란 개혁교회와 결별함으로써, 교회는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교회(free church)가 되어야 함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1886년 애통(Doleantie) 교단의 출범은 사실 신교회(Nieuwe Kerk)의 당회실을 점거하고자 제가 당회실 패널을 직접 톱질하여 떼어버린 사건에서부터 출발합니다. 1886년 1월 5일에 저는 당회원으로서 신교회(Nieuwe Kerk)의 당회실에 들어가고자 했는데, 당회실 문이 어떤 열쇠로도 열리지 않도록 목재 패널로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몇 시간을 허비하다가, 다음날 아침 변호사들을 대동한 채, 저는 그 패널을 직접 톱질하여 떼어버립니다.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저는 화란 개혁교회에서 면직을 당하게 되고, 저와 함께 면직된 분들과 더불어 애통 교단이 출범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신교회(Nieuwe Kerk)의 당회를 신교회(Nieuwe Kerk) 자체가 운영하는가 아니면 정부 기관과 결탁된 국가 교회의 운영을 따라야하는가의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저희가 국가 교회와 결별한 가장 큰 이유는 교회는 국가의 하부 기관이 아닌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영역 주권 원리가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어떠해야 함을 잘 보여줍니다. 교회는 신앙의 순결을 위해 기꺼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대두된 문제는 국가 교회와 결별한 애통 교단이 어떻게 화란 민족을 대표하는 공교회가 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화란 민족에게서 개혁파 교인들이 공공성을 획득하려면, 교회(교단) 내부에만 갇혀 지내서는 안되고, 적극적으로 세상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게 하라고 개혁파 교인들을 독려한 것입니다. 저 역시 정치 영역에 직접 참여하여 오랜 상원 의원 활동뿐만 아니라 반혁명당 당수 및 수상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신정주의적 기독교 정부를 구성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먼저 정교분리를 강조했던 프랑스 혁명 이후, 신정주의적 기독교 정부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저 역시 영역 주권을 통해 교회는 정부의 권력과 어떤 결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다음으로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세속 정부를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정치 영역의 주권은 얼마나 정의를 실현하고 공공선에 기여하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각자의 신앙 양심에 걸맞게 가장 정의롭고 공공선에 최상으로 기여할 만한 정치인을 지지하고 투표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독 정치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정치 영역에 들어가 정의와 공공선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이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제 평생의 신학적 비전이었다면, 이 비전을 이루는 것에 있어서 영역주권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은 정치적으로도 엄청납니다. 당시 네덜란드 정치 영역은 모더니즘이라는 하나의 꽃으로만 도배된 정원과 같았고 다른 꽃 특히 종교적 색채를 띠는 꽃은 그 정원에 심겨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치 영역이나 공론장에서 신정주의적이라는 비판 아래 기독교적 양심이나 목소리가 제거 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침묵을 강요받는 화란 개혁파 대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독교 사회로부터 세속적으로 변해버린 정치 세계에 어떻게 적응할지, 또 무엇보다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이 그 세계에서 드러나게 할지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저의 해답은 영역 주권(sovereignty in its own sphere)이었는데, 모든 삶의 영역의 절대적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지만, 각각의 인간 삶의 영역(예를 들어,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은 하나님께서 영역 그 자체에 부여하신 일종의 파생된 주권, 영역 주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 영역은 그 영역 자체의 원리와 운영방식에 적합하다면, 어떤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가졌든지 간에 누구나 자유롭게 그 영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치 영역에서 누구든지 정의와 공공선을 실현하는 것에 있어서 자유롭게 경쟁하면서 그 영역 자체의 권위를 획득하고 책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역 주권이 함축하는 구조적 다원주의(Structural Pluralism)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제 레토릭이나 용어가 유행하면서 저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 즉 신정주의자로 묘사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언급했듯이, 주권이라는 용어는 어떠한 방해나 반대 없이, 아니 반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사실상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이런 권한은 성경적으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런 영역 주권을 마치 하나님께서 기독교인에게만 부여한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정치의 영역에서 주권은 누가 정의와 공공선에 더 기여했는지, 학문의 영역에서 주권은 누가 더 진리에 충실했는지, 예술의 영역에서 주권은 누가 더 아름다움에 기여했는지에 있는 것이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부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 레토릭 자체가 전투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해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공적 영역을 모더니즘의 손아귀에 내버려둔 채, 개인 영성과 교회 활동에만 만족하는 개혁파 교인들을 각성시켜서 하나님의 군사로 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해두어야 할 부분은 제가 그런 전투적 이미지와 레토릭을 사용한 것은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청중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라!’ 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문구는 불신자들도 포함된 공론장에서 외친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원칙에 따른 기독교 사립대학을 설립하는 역사적 현장에서 부르짖은 연설입니다.


한국의 성도 여러분,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를 넘어서 정치적 영역에 들어갈 때, 굳이 이런 신정주의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울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주권이 성경적 용어일지라도, 불신자들이나 더욱이 안티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공론장에서 전투적인 레토릭을 사용하여 불필요한 논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 영역 자체에 창조 때부터 부여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신뢰한다면 각 영역에 걸맞는 탁월한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 정의를 실현하고 공공선에 기여하는 탁월한 기독 정치인 혹은 기독 시민이 되십시오. 학문의 영역에서 탁월한 지식인이 되시고, 예술의 영역에서 창조적인 예술인이 되십시오. 직장의 영역에서 실력 있는 직장인이 되시고, 종교의 영역에서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십시오.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라!’ 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문구는 불신자들도 포함된 공론장에서 외친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원칙에 따른 기독교 사립대학을 설립하는 역사적 현장에서 부르짖은 연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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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은득

김은득 목사(PhD., Calvin Theological Seminary)는 신칼빈주의,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공공신학을 한국적 문맥에 맞게 상황화하길 원하는 신학자로서 현재 미국 애리조나 투산에서 드림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