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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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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김형익  /  작성일 202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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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Karl JK Hedin on Unsplash

여러분의 장례식에서 나는 거짓되거나 과장된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을 것입니다. 잘 사십시오. 여러분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라도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오늘을 잘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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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너무 섬뜩하게 들리는가? 이 말은 목회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은 아니지만, 목회의 중요한 본질을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동료 목회자들처럼, 나도 목회 현장에서 다양한 죽음들을 보아왔다. 연로하고 기력이 다하여 돌아가시는 죽음은 물론, 사고로 인한 죽음 그리고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심지어 살인사건의 죽음까지 말이다.


죽음은 우리 일생에서 자신의 것으로는 단 한 번 직접 겪는 일이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많이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죽음 이전에, 부모의 죽음은 물론, 배우자나 자녀의 죽음 그 외에도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 죽음은 그리 멀리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의학의 발달로 과거 100년이나 200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죽음으로 인한 사별을 경험하는 일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죽음은 드문 일은 아니다. 그리고 목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이런 모든 죽음 앞에서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장례예식을 집례해야 한다.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도록 준비시키는 목회


내가 목회를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장례예식을 은혜롭게 치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장례예식에서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가족을 적절히 위로하고 모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언젠가 우리도 다 눕게 될 관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영광스러운 사건이 될 수 있도록 살아생전에 신실한 믿음으로 영원을 준비하는 인생을 살게 하는 일이 목회라는 것이다.


이점에서 목회는 영원을 목표로 삼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의 장례식에서 나는 거짓되거나 과장된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을 것입니다. 잘 사십시오. 여러분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라도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오늘을 잘 사십시오.” 그리고 약간의 엄포를 놓을 때도 있다. “제가 여러분의 장례식에서 ‘여러분, 이 분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렇게 산다면 그 죽음은 비참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도록 잘 사십시오.”라고 말이다.


비록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들의 뒤에서 전쟁 포로들로 하여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외치게 했던 로마의 장군들은 얼마나 지혜로운 자들었던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우쭐대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일지라도 언젠가 너의 죽음도 찾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겸손히 행하라”는 말을 들을 만큼 그들은 지혜로웠다.


이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어리석은 시대다. 팀 켈러가 그의 책 ‘죽음에 관하여’에서 말했듯이, 의학의 발달 위에서 비종교화, 세속화된 현대 사회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삶의 쾌락 뒤로 숨겨두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헬무트 틸리케의 말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는 섣달 그믐날 큰 소리로 떠든다. 마치 우리의 무덤 위로 자라나는 풀의 섬뜩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교우들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준비하게 하는 목회는 시대의 정신을 거스르는 일이기에 쉬운 일이 아니다. 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주제를 매주일 마다 상기시켜 주어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나는 강단에 설 때마다 교우들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오늘을 교우들이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말씀으로 깨우치려는 수고를 감당한다. 그리고 성경이 신자들에게 약속하는 영원의 소망을 상기시켜 주려고 한다. 이 세상에 목을 매고 살아가려고 하던 마음이 번쩍 깨어나고 영원의 관점에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목회의 이런 초점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더 진지하게 대할 수 있게 해준다. 죽음을 준비시키는 목회는 정말 진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사별을 믿음으로 직면할 수 있게 하는 목회


목회가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라고 할 때,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통한 이별이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다양한 죽음으로 우리 곁을 떠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먼저 대면하면서 살아간다. 몇 번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결코 익숙해질 수도 없고, 감당하기 쉬운 일도 아니다. 목회는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라는 아픈 현실을 신앙으로 직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는 의미에서도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요즘 교우들과 함께 ‘상실의 아픔을 딛고 서다’(사랑플러스 간)를 읽으면서 ZOOM으로 독서 나눔을 하고 있다. 유전적 병을 안고 태어난 두 아이를 각각 6개월 만에 잃은 데이비드와 낸시 거쓰리 부부가 쓴 책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잃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또 어떻게 믿음으로 이 상황을 직면해야 하는지를 잘 정리해준 책이다.

 
사별은 특히 배우자와의 사별은 인생에서 비교할 수 없는 큰 상실의 경험이다. 토마스 홈즈와 마수수(Thomas Holmes and M. Masusu)는 생활의 다양한 경험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측정할 수 있는 표를 만들었는데(1974, 오래 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다룬 인생의 스트레스의 문제는 여전하다), 여기서 그들은 스트레스 지수를 0점에서 시작해서 최고를 100점으로 정하였는데, 최고의 스트레스를 받는 1-3 순위는 이렇다: ①배우자와의 사별 100점, ②이혼 73점, ③가족과의 사별 63점. 홈즈와 마수스는 스트레스는 축적되는데 한 해 동안의 스트레스 지수를 합산하여 150점이 안 되는 사람들의 1/3 정도가 향후 2년 내에 큰 병에 걸릴 수 있고, 150-300점인 사람들은 4/5가 향후 2년 내에 심각한 병에 걸린다고 말한다.

 
가정은 물론, 좀 더 큰 가정인 교회에서는 먼저 가는 성도들을 보내는 사별의 사건들이 쉼 없이 일어난다. 목회는 이런 상실의 경험을 교우들이 믿음으로 직면하고 잘 감당하도록 돕는 일이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이라는 죽음을 준비시킨다는 점에서, 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죽음


아무리 신자가 죽음의 순간을 영광스럽게 맞을 수 있게 하려고 한다 해도, 죽음이 본질상 선한 것이 아님을 부정할 수는 없다.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들어왔고, 죽음은 죄의 삯이다(롬 6:23). 그럼에도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히브리서 2:14–15)” 주셨다. 믿는 자들에게 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죽음의 의미를 역전시켰다. 여전히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은 슬프고 비통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고 그들의 죽음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 말은 진리지만,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는 그리 쉽지만은 않은 말이다. 우리가 이 진리로 자신을 무장시키고 살아왔을지라도, 정작 자신의 죽음 앞에 서게 될 때에는 잠깐의 두려움이 엄습하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고 결코 달가워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죽음의 강에 이르게 된 ‘크리스천’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모습을 그려준 것이 감사하다. 성도들 중에는 ‘소망’처럼 죽음의 강을 의연하게 건너는 이들도 있고, ‘크리스천’처럼 죽음의 강 앞에서 두려움이 차오르기는 이들도 있지만, 결국 성도는 영광스럽게 그 천성문으로 들어가 사랑하는 주님을 뵙게 될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의 고백은 목회가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나는 결코 다시는 설교를 하지 못할 사람처럼 설교를 했습니다.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듯이 말입니다.” 죽음을 준비시키는 목회의 본질이, 이 땅의 교회들에서 회복되기를 고대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죽음의 의미를 역전시켰다. 여전히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은 슬프고 비통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고 그들의 죽음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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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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