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레위인의 고백
by Justin Loans2020-11-12

교회 안에서 실업 문제나 재정적 문제를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지역 사회에서는 10~15%가 실직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If you are seeing almost no unemployment or financial need in your church, while 10 percent to 15 percent of people in your community are out of a job, why is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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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따뜻한 일요일 아침, 나는 두 딸과 함께 교회로 걸어가고 있었다. 큰길을 건너 교회 건물로 향하는 옆길로 들어섰을 때, 긴 수염에 초라한 셔츠를 입은 한 노인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를 향해 외쳤다. 

“이 불쌍한 참전 용사를 좀 도와줄 수 없습니까?”


기왕이면 그 노인에 대하여 극적인 변화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그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나는 그 노인과 함께 예배하기 위해 교회로 데리고 갔고, 예배 후에 그는 여러 명의 집사를 통해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게 되었다. 또한, 그 날 교회 방문에서 느낀 사랑과 환대 덕분에 그는 우리 교회에 계속 나오게 되었고, 숙소를 제공하며 중독을 상담하는 지역 기관과도 연결되었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내게 소리치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행여 그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여 나는 바닥만 보고 걸었다. 교회로 가는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재촉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나는 저 사람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는 집도 없고, 보나 마나 정신 질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내 딸들의 안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요즘이 어떤 상황인가? 코로나 시대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접촉하는 건 말도 안 되지 않은가? 


내 변명을 다 쓰려면 하늘을 두루마리도 삼아도 부족할 것이다. 나는 그날 교회 뒤편에 앉아서 내가 한 행동은 예수님이 말씀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레위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2).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보고도 나는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에게서 도망쳤다.


레위인으로 가득한 교회?


내 이야기가 많은 기독교인에게 모두 해당하는 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와 직면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돌리고 일상을 살아간다. 


최근 들어서 나는 그런 경향이 더 커지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지난 일 년 사이에 미국은 대공황 이후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나는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글을 썼다(사 58:10). 차머스 센터(Chalmers Center,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도움을 주는 단체)에서 나는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상처를 주지 않고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는 방법을 찾는 일을 한다. 올해 들어서 나는 이런 식의 대화를 많이 나눴다. “경제가 붕괴한 후 많은 사람이 교회에 기부했어요. 그런데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기부받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거죠?”


목회 전략에 관한 보다 긴 대화라는 맥락 안에서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게 되묻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실업 문제나 재정적 문제를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지역 사회에서는 10~15%가 실직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서구의 복음주의 교회는 교인들이 다 레위인으로만 채워진 것일까? 우리는 사실상 반대편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고,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 계급의 투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고립시킨 건 아닐까? 교회가 물질적 빈곤이 가져다주는 현실에 지금보다 더 밀접해질 수만 있다면,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비와 장기적인 관계 접근이라는 점에서 교회가 제공할 것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분명한 성경적 명령에 직면한 우리는 오히려 혼란과 두려움으로 반응한다. 


‘아픈 사람을 도울 때(When Helping Hurts’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차머스 센터의 창립자이자 회장인 브라이언 피커트(Brian Fikkert)는 차머스 센터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교회인 서아프리카의 교회들이 교회 중심의 저축 및 소액 금융을 통해 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고향인 테네시주 채터누가(Chattanooga)에선 극히 소수의 사람을 돕는데 그쳤을 뿐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피커트는 이렇게 말했다. “차이는 이것입니다. 채터누가의 교회는 대부분 중산층 또는 상류층이 다니는 곳이에요. 그들은 자기 동네에서 물질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을 돕지요. 그런데 서아프리카에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다 가난해요. 달리 말해 그들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과 사역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죠.”


되찾아야 하는 사랑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 몇 가지 제안이 있다. 


교회가 더 넓은 지역 사회에 참여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또 더 큰 비전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깊이 성경에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윤리적 명령을 더 찾아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적 맥락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방안을 찾고 적용하도록 하자.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롬 12:16),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약 2:9),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1 3:18). 모세의 율법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윤리적 명령이 들어있음을 기억하라.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레 25:35). 


겸손함을 잃지 않는 동시에 의도성을 가지고 사회 경제적 경계를 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라. 타락한 세상에서 만나는 사회적 계층화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큰 장애물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가치 판단이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더 많은 부와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더 우월한 도덕성을 부여하는 경우에 그 장애물은 더 높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지금보다 더 효과적으로 봉사하기를 원한다면, 계속해서 지역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천천히 하라. 천천히 움직이라. 무엇보다 신뢰를 쌓아야 한다. 기억하라, 중요한 것은 교회 웹 사이트에 올리는 인증 사진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관계 그 자체이다. 이를 통해서 대다수에 해당하는 백인 교인들은 흑인 교회의 형제와 자매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피커트가 말했듯이 빈곤한 현실에서 서로를 돌보는 세계 교회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빈곤과 지역 사회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자원을 찾아라. 물질적 빈곤이라는 뿌리에서부터 깨어진 관계를 해결하는 곳이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차머스 센터가 하는 사역의 핵심이다. 짧은 글을 싣는 것에서부터 온라인 과정 진행, 소그룹 연구를 통해서 관계 개발 사역에 깊이 파고드는 커리큘럼에 이르기까지, 차머스는 바로 그런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역을 하는 게 차머스 혼자가 아니다. 룹톤 센터(Lupton Center)와 기독교 공동체 개발 조직(Christian Community Development Organization)과 같은 조직은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이웃 치유를 위한 자원과 훈련을 제공하고 있으며, 또한 Love In the Name of Christ (LoveINC)와 같은 파트너는 지속적인 변화를 위해 교회와 커뮤니티 조직을 하나로 모으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마지막 말: 회개


교회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교회가 오랜 기간 안락함과 안전에 위협이 되고, 가족 프로그램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이웃들로부터 고의적 혹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분리해온 것이 사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아닌 동정과 경멸의 대상으로 그들을 바라본 것도 사실이다. 그 모든 것은 주일 아침에 내가 참전 용사를 외면한 것과 비슷한 수천 가지의 작은 일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 결과 교회는 인류가 겪는 일반적인 고통을 향해 거의 눈을 감아버린 곳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사역 모델은 교외 부유층을 지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이 세상의 고통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며 죄의 무게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신성한 아래로 이동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사 53장; 빌 2장; 고후 8장). 우리는 왕에 대한 사랑과 순종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이 겪는 삶의 고통, 위험, 불편함에 기꺼이 ‘나’ 자신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의 평안과 안락함을 우선시하고, 문화와 계급, 정치 또는 신학에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자비를 베풀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더 통렬한 회개이다. 우리는 회개함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방향을 돌려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눅 3:8).





원제: Confessions of a Levit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지금보다 더 효과적으로 봉사하기를 원한다면, 계속해서 지역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천천히 하라. 천천히 움직이라. 무엇보다 신뢰를 쌓아야 한다.

If you want your church to more effectively serve your community, you need to get out in the community on an ongoing basis. Take your time. Move slowly. Build tr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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