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죄로 바꾸는 가십 머신을 아십니까?
by Joe Carter2020-11-16

가십은 누군가에 관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경멸적인 정보가 선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동기로 인해 비밀이라는 허울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는 것이다. 또한 그런 과정에서 조금의 겸손도 찾을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을 보면서도 당신은 그런 행위를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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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구절이 무엇일까? 누군가에게는 신명기 7장 2절에 나오는 가나안 민족의 진멸에 관한 구절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요한계시록 13장 1절에 나오는 짐승의 등장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 경우는 마태복음 12장 3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특히 가십(잡담)이란 형태를 띠고 생각없이 내뱉는 말처럼 내가 인생을 살면서 자주 지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가십이란 말은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일반적으로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일들과 다른 사람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그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하는 대화라고 정의된다. 가십을 성경적으로 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존 파이퍼(John Piper)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가십은 누군가에 관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경멸적인 정보가 선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동기로 인해 비밀이라는 허울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는 것이다. 또한 그런 과정에서 조금의 겸손도 찾을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을 보면서도 당신은 그런 행위를 즐기는 것이다.”


가십은 성경이 정죄하는 심각한 죄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9절에서 가십을 살인, 비방(중상모략)과 같은 선상에 놓았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후서 12장 20절에서도 가십을 비방과 연결시켰고, 디모데전서 5장 13절에서는 게으름 및 마당발(busybodies)과 연관 지었다. 그럼 우리는 왜 가십을 즐길까? 그건 가십이 일종의 사회적 지배의 형태, 그러니까 당신이 생각하기에 누군가를 마땅히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즉, 가십과 비방에 참여하는 목적은 경쟁자가 가진 상대적인 사회적 지위를 낮추기 위해서이다. 


왜 가십을 좋아할까


사회적 통제의 한 형태로서 가십의 장점은 저렴하고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단점으로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서 가십은 크게 확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십은 직장, 교회, 마을과 같은 직접적인 커뮤니티 내에서 확산될 수 있었지만, 더 넓은 형태로 가십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종종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엄청나게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인류 역사의 대부분, 가십의 대량 보급은 오로지 대중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제하는 정부나 언론 매체로 제한되었다.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Tyler Cowen)은 가십의 확장이야말로 사실상 명시되지 않은 미디어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미디어가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역할과 관계없이 실제로 시청자의 관심을 끄는 미디어의 특징은 스토리를 통해서 미디어가 어떻게 특정 개인의 지위를 높이거나 낮추는가 하는 방법이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특정 미디어 소스가 암시하는 개인의 순위는 당신의 생각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 차이가 심하게 난다. 당신의 상태에 관해서 미디어가 통 크고 긍정적이고 또 기억에 남을 만큼 칭찬해줄 때보다 아주 작은 차이지만 당신을 다른 누군가보다 떨어지게 평가할 때 더 큰 원한을 품기 마련이다. 


본질적으로 (일부) 미디어는 항상 누군가의 개인적 순위를 모욕한다. 그런 경우 당신은 언론으로부터 모욕을 받는다고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미디어를 즐긴다. 왜냐하면 당신이 낮아지는 경우 다른 누군가가 올라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미디어야 말로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던지는 파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누군가는 미디어를 향해 더 큰 반감을 품게 된다.

이런 상황이 미디어와 관련해서 항상 옳았는지는 모르겠지만, 1990년대 이후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적 변화는 “미디어”라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바꾸었고, 결과적으로 더 넓고 민주화된 미디어 세상을 열었다. 경제학자인 아놀드 클링(Arnold Kling)은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 스마트 폰 및 소셜 미디어(ISS)는 인간의 의사 소통 수준을 약 이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는 오래 전 작은 부족민으로 살았을 때보다 더 심하게 가십에 의존하면서 살고 있다.”


클링이 ISS(Internet, Smart phones, and Social media)라고 부르는 세 가지, 인터넷, 스마트폰 및 소셜 미디어는 이제 하나로 결합해서 우리가 가십 머신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개체가 되었다. ‘가십 머신이 출현했다’라고 까지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속에 포함된 부분 부분이 상호 작용을 통해서 더 큰 하나의 개체가 만들어 가십 머신 고유한 속성 또는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 가십 머신을 인터넷, 스마트 폰 및 소셜 미디어에 의존하는 어떤 실체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십 머신이 인터넷, 스마트 폰 및 소셜 미디어 그 자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ISS는 가십 이외의 목적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가십 머신이 ISS와 다른 점은 가십 머신이 우리가 생산하는 가십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십을 생산하도록 우리를 더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친구, 가족, 적 등 다른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낮추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욕망은 우리 속 깊숙이 잠복해 있다. 그런데 가십 머신은 잠자고 있던 이런 욕망이 죄로 발현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욕망이 죄로 변하는 세 단계


어거스틴(Augustine)에 따르면 욕망이 죄로 바뀌기 위해서는 다음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암시, 쾌락, 그리고 동의이다. 암시는 기억이나 감각 지각을 통해 우리가 욕망의 유혹을 받을 때 시작된다. 즐거움은 금지된 것을 갖는 것이 즐겁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온다(어거스틴은 이 두 가지가 다 이성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의는 우리가 이성을 통해 앞선 두 가지를 제어하지 않고 그 대신 금지된 갈망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발생한다. 가십 머신은 이 세 단계 각각에 다 영향을 미친다.


암시의 첫 번째 부분은 할 말이 없는데도 굳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자극하는 가십 머신 때문에 시작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조, 지금 무슨 생각을 하세요?”라고, 트위터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죠?”라고 끊임없이 묻는다. 그 결과 사람들은 최소한 소셜 미디어 안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써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암시의 두 번째 부분은 소셜 미디어를 스크롤하여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을 때 나온다. 종종 라이벌의 지위를 낮추기 위해 댓글을 통해 가십과 비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과장하는 것 같다면, 지금 당장 소셜 미디어 속 글을 살펴보고 얼마나 많은 게시물과 댓글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기 위해서 쓰여졌는지 확인하면 된다.


가십 머신은 선동적인 메시지(“라이벌이 지금 귀하의 지위를 낮추려고 합니다!”)를 표시한 다음 당신으로 하여금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까지 제공한다. 그러나 이 기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즐거움까지 제공한다. 가십을 게시한 후에 따라오는 ‘좋아요’와 ‘공유’, 그리고 ‘리트윗’을 통해서 당신의 편견이 공개적으로 입증되는 것을 확인할 때, 뇌 속에서 퍼지는 도파민은 엄청난 희열을 안겨준다. 신경 과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사회적 보상과 금전적 보상을 꼭 닮은 온라인 환경의 고유한 기능인 ‘좋아요’를 주고받는 것은 다른 보상 작업에 관련된 두뇌 회로까지 강력하게 끌어들인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단계인 금지된 갈망에 동의하는 데에까지 쉽게 도달하게 되는데, 죄에 대한 유혹을 피하는 것보다 가십 머신이 가져다주는 쾌락은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기계에 대항하는 분노


그럼 이런 가십 머신에 대항해서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 사실상 신생 매체 ISS와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포르노 머신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서 이겼는지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ISS 가 연관된 음란물에 맞서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 중 두 가지는 회피와 책임이다. 먼저 유혹의 근원을 피해야 한다. 그런데도 유혹에 넘어졌을 경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에게 책임을 묻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다 어렵겠지만, 특히 책임 부분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적의 지위를 낮추려고 펼치는 고귀한 목적의 비방과 험담까지도 죄로 간주한다는 생각에 불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십 머신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 우리는 가십과 비방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심각한 죄로 인식해야 할 뿐 아니라, 평소에도 사람들이 생각없이 내뱉는 부주의한 말을 깊이 고찰해야 한다. 마태복음 5장 22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그 어떤 것을 바쳐서라도 이생에서 지은 죄를 단 한 번이라도 줄이고 싶어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생각해보자. 지금 지옥에 있는 죄인들이 세상에서 했던 가십을 한 번이라도 덜 하기 위해서 그 어떤 것을 희생해도 아깝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면,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가십이라는 죄를 버리도록 동기부여하는 게 무엇이 있을까?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the Gossip Machine Turns Desire into Sin

번역: 무제


우리 모두는 친구, 가족, 적 등 다른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낮추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욕망은 우리 속 깊숙이 잠복해 있다. 그런데 가십 머신은 잠자고 있던 이런 욕망이 죄로 발현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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