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적 알미니안을 한번 만나볼까?
by Jeff Robinson2020-11-19

점점 더 많은 알미니안이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로 알려지고 있는, 비 웨슬리적(non-Wesleyan)인 다양한 알미니안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A growing number of Arminians are embracing a non-Wesleyan variety of Arminianism that’s coming to be known as “Reformed Armin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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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 핀슨(Matt Pinson)이 강연에서 여러 번 쓴 용어 하나가 며칠 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건 “개혁적 알미니안”이었다. 마치 점보 새우, 가열된 얼음 또는 좌파 보수주의처럼 이 말은 모순적으로 들린다. 


매트 핀슨이 “개혁적 알미니안”이라고 말했을 때, 나름 훈련받은 교회 역사가로서 나는 그가 개신교 종교 개혁에서 나온 여러 인물 중 한 사람인 야곱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의 가르침을 긍정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아르니미우스의 신학은 오늘날 나름 인기를 얻고 있는 현대 알미니안 신학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 이런 내 추측이 맞는 걸까? 나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고, 아래 인터뷰는 내가 매트 핀슨에게 던진 질문의 결과이다. 


내슈빌에 있는 웰치 대학(Welch College, 자유의지 침례교)의 총장인 핀슨은 예일대 신학 과정(Yale Divinity School)을 졸업했으며 벤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Perspectives on Christian Worship’, ‘Four Views on Eternal Security’,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Arminian and Baptist: Explorations in a Theological Tradition’을 포함한 수많은 책의 저자 또는 편집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대 아르미니우스의 교리와 오리지널 아르미니우스의 교리 등을 대조하면서 어떻게 같은 사람이 동시에 개혁주의면서 알미니안이 될 수 있는지를 토론했다. 


“개혁적 알미니안”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점점 더 많은 알미니안이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로 알려지고 있는, 비 웨슬리적(non-Wesleyan)인 다양한 알미니안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에서 이 운동의 주류는 자유 의지 침례교 교단(Free Will Baptist denomination)에서 발견되며, 그 기원은 17세기 영국 일반 침례교 운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접근을 지지했던 초기 신학자 중에는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및 토마스 그랜썸(Thomas Grantham)과 같은 17세기 영국인이 있다. 20세기 들어서 이런 입장을 지지한 사람으로는 자유 의지 침례교 신학자인 르로이 포린스(Leroy Forlines)와 로버트 피키릴리 (Robert Picirilli)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대부분의 현대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좀 더 정통 아르미니우스 신학에 가까운 알미니안주의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포린스와 피키릴리는 토마스 오덴(Thomas Oden)과 같은 일반/자유 의지 침례교 전통을 벗어난 학자들과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가는 복음주의자는 칼빈주의-알미니안 사이의 토론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 개혁적 알미니안은 성경이 예정, 은총, 자유 의지에 관한 전통적인 칼빈주의적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부분의 알미니안이 거부하는 개혁주의의 전통 교리인 전적 타락, 형벌적 대속, 칭의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그리고 (전적이 아닌) 점진적 성화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개인들에게 또 전반적인 칼빈주의-알미니안주의 간의 대화에 있어서도 개혁적 알미니안이 가진 이런 사상의 흐름은 여러 유익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개혁주의 복음주의자 대부분이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별로 읽은 적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의 글을 좀 더 접하게 된다면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우리의 견해도 바뀔까? 


대부분의 알미니안 복음주의자들이 칼빈의 글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대부분의 칼빈주의 복음주의자들도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거의 읽지 않는다. 이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데,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이랬던 건 아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공동체에는 과거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편협함이 있는 것 같다. 기존에 고수하는 구원론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만 간다. 내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 구속, 성화, 기독교 세계관, 변증론과 인식론, 문화적 참여, 종말론 등과 관련하여(심지어 세례와 성령의 은사와 관련한 부분까지도) 일부 칼빈주의자들과 실로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이런 모든 공통점은 단지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종종 무시되는데, 그건 내가 칼빈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나는 무조건적 선택을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주의자만 이런 식인 건 아니다. 알미니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아 세례,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 및 성령의 은사와 관련해선 서로 간에 아무리 다른 의견을 가지도 있더라도 같은 알미니안끼리는 서로 협력할 수 있다. 그건 칼빈주의자끼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알미니안과 칼빈주의자 사이에서는 그런 협력이 거의 불가능하다. 달리 말해서, 여전히 칼빈주의자냐 아니면 알미니안이냐라는 편가르기는 같은 서클 안에서 복음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이야 말로 피차 상대편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상대편 신학을 피력한 책을 읽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는데, 이는 실로 건강하지 않은 현실이다.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통해서 칼빈주의자가 만나게 될 사람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항상 읽고 인용하는 기존의 칼빈주의 책을 쓴 저자들과 매우 흡사한, 복음을 향한 뜨거운 심장 박동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애초에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칼빈주의자가 가진 영성 및 교리적 신념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한 인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구원이 불가능한 전적 타락한 인간, 오로지 믿음만으로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 그리스도의 대속적 형벌의 의미, 신자가 어떻게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성화되는지, 율법주의 대 율법폐기론 등등에 관해서 칼빈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학을 만나게 될 것이다.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는 최근 내가 쓴 책 ‘알미니안과 세례자(Arminian and Baptist)’에 대해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칼빈주의자들은 개혁주의 알미니안을 통해서 ‘있는지도 몰랐던 사촌들’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를 읽게만 된다면,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비록 그가 예정 및 그와 관련한 교리에서 좀 더 칼빈에 가깝길 바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가졌던 선입관을 깨도록 만드는 완전히 새로운 아르미니우스를 발견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교수님이 속한 대학은 자유 의지 침례교 계통인데, 그 교단의 중요 특징이라면 어떤 것이 있는가?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강조한 사항에 첨부해서, 자유 의지 침례교는 교회와 관련한 교리에서 대부분의 다른 침례교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회의나 협회를 진행할 때 지역 교회 간의 상호 의존성 강화, 침례를 받지 않은 신자들과도 성찬을 나누는 것(물론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침례가 의무이다), 병자에게 기름바름과 같은 보다 다양한 전례 의식, 성도들의 발을 씻기고 (요즘보다는 과거에 주로 더 행해졌지만) 새로 침례받은 신자에게 기존 신자들이 손을 얹고 기도하는 행위 등등을 한다. 하지만 칼빈주의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의식이 비록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일 지 몰라도, 그렇게까지 이상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런 의식은 개신교, 가톨릭, 동방 정교회 등 대부분의 교단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웨슬리 계통 알미니안 신학과 개혁적 알미니안 신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개혁적 알미니안 구원론은 보다 더 광범위하게 개혁주의 범주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웨슬리 및 성결 모델(Wesleyan and Holiness models)과는 다르다. 성결 운동에서 발전한 웨슬리식 알미니안 신학과는 달리,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는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의 원죄와 급진적 타락을 이겨낼 수 있다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입장은 속죄에 대한 철저한 개혁주의 및 형벌 대속을 통한 구원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이며 또 동시에 수동적인 순종이 칭의를 통해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주의 알미니안인들은 대부분의 알미니안주의가 지향하는 완전주의, 완전 성화, 그리고 위기 경험 지향이라는 점에서 많이 다르다. 그들은 또한 기독교인들이 오로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인내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구원에서 배도할 수도 있고, 그 결과 구원을 잃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되지만, 이런 배도도 오로지 믿음을 저버릴 때에만 발생한다고 믿는다. 이런 관점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배도에 관한 개혁적 알미니안의 개념은 개개인이 개별적인 죄를 지음으로써 은혜에서 반복적으로 떨어질 수 있고, 또 동시에 회개를 통해 반복적으로 은혜의 상태로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웨슬리적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는 개혁적 알미니안주의가 현재의 알미니안-칼빈주의 사이의 대화(또는 대화의 부족)를 다시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는 속죄, 칭의, 성화, 영성의 본질에 대한 개혁주의 가르침이 가진 은혜 지향적 입장을 지지하는 동시에, 거기에 신성한 구원의 은혜에 저항하는 예정과 (개종 전후의) 자유에 대한 알미니안의 입장을 결합한 것이다. 그것은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또한 은혜를 붙잡고 있는 독특한 알미니안주의를 제공한다. 


훨씬 대중적인 수준의 복음주의적 알미니안주의가 정작 아르미니우스보다 오히려 웨슬리나 성결 운동의 믿음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지? 


불행하게도 그렇다. 가장 인기있는 알미니안주의는 사실상 웨슬리보다 피니(Finney)에 더 가까운 준 펠라기안(semi-Pelagian)이다. 이제 웨슬리는 오히려 우리보다도 더 개혁주의 신학에서 멀어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발전한 피니와 성결 운동만큼 멀어진 건 아니다. 웨슬리는 완전한 형벌 대속과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교리를 거부했다. 그는 신자들이 회개를 하지 않을 때 반복해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성화와 영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보다 더 위기 경험과 완전성에 대한 것이었다. 내 생각에 웨슬리는 율법폐기론에 반발했기 때문에 율법주의로 방향이 바뀐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후기의 피니보다는 훨씬 더 개혁주의자와 비슷했다. 특히 원죄에 대한 그의 신학은 그로 하여금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펠라기안주의에 반대하도록 만들었다. 칼빈이 사랑하고 즐겨 불렀던 복음으로 풍부한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를 생각할 때, 그 어떤 칼빈주의자라고 해도 “나는 사실 칼빈주의자와 별반 다른 게 없다”라고 말한 웨슬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의 신학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알미니안주의 속에 숨은 개혁주의 요소를 찾아내는 나의 연구 경향 때문에 종종 사람들은 내가 웨슬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나는 칼빈을 사랑하는 만큼 웨슬리를 사랑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얼굴이 담긴 큰 액자 두 개를 사무실에 나란히 걸어놓을 생각이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웨슬리의 신학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했다. 


“칼빈과 웨슬리의 잘못을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고쳐야 할 잘못을 찾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칼빈과 웨슬리도 틀릴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큰 경건함, 더 뜨거운 불, 더 넘치는 은혜, 더 불타는 사랑, 더 강렬한 이타심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칼빈과 웨슬리의 결점을 찾고 비판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 내 경우를 말하자면, 태양 속의 반점을 보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게 여전히 태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태양 앞에서 내가 들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초라한 촛불이라는 사실에 흐느낄 뿐입니다.” 


교수님은 칼빈주의적 개혁주의 전통에 근거한 동시대 및 고전 작가와 신학자의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그런 책을 좋아하는가? 


나는 칼빈, 오웬(Owen), 번연(Bunyan), 에드워즈(Edwards), 호지(Hodge), 스펄전(Spurgeon), 카이퍼(Kuyper)와 같은 역사적인 칼빈주의자들의 책을 좋아하는 것처럼, JI 패커(JI Packer), 칼 헨러(Carl FH Henry),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 러셀 무어(Russell Moore), 마이클 헤이킨(Michael Haykin), 마크 데버(Mark Dever), 해리 리더(Harry Reeder), 데이비드 도커리(David Dockery), 리곤 던컨(Ligon Duncan), 알 몰러(Al Mohler), 로날드 내쉬(Ronald Nash), 칼 트루먼(Carl Trueman), 나단 핀(Nathan Finn),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 나는 현재 그의 책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 of Christ을 읽고 있다), 필립 젠슨(Phillip Jensen) … 등등 어디에서 멈춰야 할 지 모를 정도로 현대 칼빈주의자의 책을 읽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역사적인 개신교 정교회의 풍부한 유산을 소중히 여기며, 속죄받고 성화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개혁적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풍부한 복음주의적 영성을 찬양하며, 오늘날도 교회에서 은혜만을 통한 구원으로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개혁주의 인식론/변증법을 가르치고, 잘 짜여진 기독교 세계관과 그 세계관에 참여하는 문화의 중요성을 믿을 뿐 아니라 땅 끝까지 이르러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가 주신 큰 사명에 인생을 헌신하고 있다.


개혁 교회 목사들이 읽어야 할 알미니안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누가 있을까?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알미니안 신학과 단지 그 신학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자들에 향해서 불공정한 풍자 만화를 그리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개혁주의 목사들이 읽어야 할 건실한 알미니안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적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몇 명만을 인용하자면, 르로이 포린스, 로버트 피키릴리, 스티븐 애쉬비(Stephen Ashby, 개혁적 알미니안)을 들겠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현존하는 웨슬리안 작가인 아지츠 페르난도(Ajith Fernando), 토마스 오딘(Thomas Oden), 로버트 콜먼(Robert Coleman), 티모시 테넌트(Timothy Tennent)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위에서 언급한 칼빈주의 저자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 작가들 뿐 아니라 아르미니우스 자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알미니안 저자들의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칼빈주의자들이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불공정한 풍자 만화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원제: Meet a Reformed Arminia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태양 속의 반점을 보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게 여전히 태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태양 앞에서 내가 들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초라한 촛불이라는 사실에 흐느낄 뿐입니다.

I am as one who can see the spots in the sun, but know it to be the sun still, and only weep for my farthing candle by the side of such a lu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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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eff Robinson

제프 로빈슨은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학위(PhD)를 받고, 현재 미국 TGC의 편집장으로 섬기고 있다.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Christ Fellowship Church의 부목사이며, Andrew Fuller Center for Baptist Studies의 연구교수이며, Southern Seminary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겸임교수이다. 목회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약 20년 동안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공저서로 한국어로 번역된 '천국 묵상'과 'To the Ends of the Earth: Calvin’s Mission Vision and Legacy'와 '15 Things Seminary Couldn’t Teach Me'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