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성경 사이 간격 제대로 이해하기
by Trevin Wax2020-12-04

이러한 평등주의는 진리의 기준이 다양한 진리 주장자들(truth-claimants)이 살고 있는 삶의 형태나 사회적 맥락 속에 엄격히 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Such egalitarianism means that the criteria for truth are strictly immanent to the form of life or social contexts in which the different truth-claimants live.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지난 첫 번째, 두 번째의 글에서 나는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조심해야 할 두 가지 위험에 관해서 지적했다.


- 첫 번째는 포스트모던 관점 이론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읽는 경우이다. 이럴 때 우리는 사회적, 문화적 위치 또는 특정 공동체의 “살아있는 경험”의 영향을 강조하는 해석학을 채택함으로, 애초에 철저한 본문 해석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상대주의적 해석 방식에 빠지게 된다.
- 두 번째는 텍스트를 대할 때 가지는 “선이해”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대화 상대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모더니스트 또는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으로 돌아감으로 포스트모던 식의 해석학에 반응하는 위험이다.


이전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했다.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거리(시간, 문화, 지리, 언어) 영역을 최소화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과장해서도 안된다. 이번 글에서 나는 거리를 최소화해서는 안되는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를 과장하는 위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거리를 과장하게 될 때 우리는 아예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성경 읽기에 있어서 “선이해”의 영향을 어디까지 인정하고 또 본문 속 바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1. 진짜 지식과 전지적 지식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라


참된 겸손과 거짓된 겸손을 구별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진짜(genuine)” 지식과 “전지적(omniscient)” 지식을 구별해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확실성(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또는 “하나님의 눈”이 존재한다는 관점)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에 설득된 일부 성경 독자들은 진정 겸손한 자세는 우리가 진짜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두 손을 들고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건 진정한 겸손이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짜 지식을 얻기 위해 전지적인 지식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어떤 진실을 완전히(전지적)는 모르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부분적으로나마 진실(진짜)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D. A. 카슨(D. A. Carson)은 이렇게 썼다.


“성경은 우리의 창조자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향한 생각과 적극적인 믿음,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적절한 확신으로 응답함으로 인간이 얼마든지 지식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암묵적으로 그러나 때로는 명시적으로까지 보여준다.”


지식에서 자라나는 성장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또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그분의 말씀에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에 귀를 막기 위해 종종 편리하게 사용되는 변명인 “겸손함”에 호소함으로써, 우리는 진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2. 모든 성경 해석을 문화적 산물로 축소하지 말고 성경 해석에 문화가 미친 영향을 정확하게 인식하라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본문을 대할 때 가지는 “선이해”의 측면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사회 및 문화적 상황(location)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성경 공부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문화는 우리의 해석에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해석학에 미치는 영향은 모든 것을 문화로 축소시킨다는 사실이다. 케빈 벤후져(Kevin Vanhoozer)가 경고했듯이 모든 것이 “위치, 위치, 위치”가 된다. 그 결과 해석학적 과제는 진짜 지식이 가지는 보편성에서 각각의 성경 독자가 가진 위치와 상대성으로 옮겨진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케냐의 로잔 문서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가진 문제점은 다름 아닌 성경의 권위에 대한 기능적 거부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편성에 대한 모든 주장이 그 주장을 발생시키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상대적일 뿐이고 또 관점의 차이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근거 자체가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어떤 관점으로도 누리지 못하는 특권 지위라는 우월성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듯 다양한 관점에 혈안이 된 세상이다. 관점의 다양성이 칭송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대한 권리가 있고, 그 의견이 원칙적인 측면에서 도전받지 않는 경우라면, 이 세상에 잘못된 의견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성경이 다른 종교 서적보다 더 권위가 있을 이유가 없다. 모든 경전은 다 각각 서로 다른 종교적 맥락에서 관련이 있으며, 이제 그 누구도 진리에 대한 배타적인 경로를 주장할 수 없다.”

물론 사회적 상황(social location)이 성경 이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또 다른 문화권의 신실한 기독교인들과 대화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성경 본문에 대한 더 넓고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리가 개인의 관점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는 강하게 저항해야 한다. 로잔 문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평등주의는 진리의 기준이 다양한 진리 주장자들(truth-claimants)이 살고 있는 삶의 형태나 사회적 맥락 속에 엄격히 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합의된 표준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는 대신, 여러 관점과 차이를 포용하도록 하는 관용의 문이 열린다.”


3. 흔하디 흔한 문화적 분열을 가로질러 광범위한 합의를 이룬 영역에 기뻐하라


다시 말하지만, 성경을 이해하는 능력에 대한 사회적 위치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 거리가 주는 차이를 최대화하는 것을 막는 방법 중 하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찾아낸 광범위한 합의점을 인식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D. A. 카슨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이며 누구라도 성경 말씀에 따라서 수정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만 서로 동의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과 관련해서 얼마나 많은 합의를 얻을 수 있는지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나는 지금 행복했던 나의 십 년이라고 부르는, 당시 세계 복음주의 펠로우십(World Evangelical Fellowship)이라고 불렸던 곳에서 사역하던 때를 기억한다. 실로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옳다고 하기 보다는 열심히 노력하고 인내하며 토론과 상호 비평을 하며 겸손하게 본문의 바른 의미를 찾으려는 목마름 등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되었던 그때를 기억하면 나는 지금도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다.”

물론 핵심은 모든 해석자가 다 성경이 최종적 권위라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자세는 성경에 복종하는 자세이며, 같은 본문에 대해 같은 마음과 열정을 공유하는 형제자매들의 통찰력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런 경우, 결과는 일반적으로 불일치보다 합의일 때가 훨씬 더 많다. 여기 의미있는 사례를 가지고 카슨이 다시 이야기한다.


“몇 년 전 아프리카 성경 주석이 출판되었을 때, 출판사와 마케터들은 마침내 우리가 다른 대륙에 사는 기독교인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성경의 의미에 대해 그들의 해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럼으로 기독교인에게 더 풍성한 성경 해석의 기회를 주게 되었다면서 흥분했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것은 놀라운 진실이다. 아프리카 성경 주석은 서양에서 나온, 퇴마에 관한 책 한 권 전체 분량의 주석보다 더 많이 그 주제를 다뤘다. 그 뿐 아니라 마법, 조상 숭배를 둘러싼 질문 뿐 아니라, ‘건강과 부요함을 약속하는 번영 복음’을 향해서도 중대한 도전을 던졌다. 그러나 그 주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이 사실이다. 주석의 90% 또는 95%의 내용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 복음을 믿는 그 어떤 기독교인이라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그 어떤 신학자가 썼다고 해도 90% 또는 95%의 내용은 일치했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똑같은 책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런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좁은 시야에 갇혀 독자의 반응(reader-response)에 연연하는 해석학에 너무 매혹되기 전에 우리는 아프리카 성경 주석이 어떤 면에서 혁신적이지 않고 또 결코 혁신적이어서는 안 되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다음 글에서는 인식론적 겸손(epistemic humility)을 유지하면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방법을 제시하려고 한다. 인식론적 겸손이란 다른 문화와 배경이 던지는 목소리의 장점을 인정하는 동시에 또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얼마든지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겸손한 자신감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제: Understanding (Not Exaggerating) the Distance Between Us and the Bibl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실로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옳다고 하기 보다는 열심히 노력하고 인내하며 토론과 상호 비평을 하며 겸손하게 본문의 바른 의미를 찾으려는 목마름 등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되었던 그때를 기억하면 나는 지금도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다

I was invariably pleasantly surprised by how much unanimity could be achieved by hard work, patient discussion, mutual criticism, humility of mind, and a greater hunger to be faithful to the text than to be thought right.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Trevin Wax

트레빈 왁스는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