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장의 큰 그림을 그려주는 신학
by 김상일2020-12-07

신앙 성장이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하나님의 길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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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은 단순히 의지력만으로는 변화될 수 없다. 성경의 원리들을 배워 실천에 힘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영속적 변화는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마음에 속속들이 배어들게 해야만 가능하다. 말하자면 복음을 늘 섭취하고 소화해 자신의 일부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탕부 하나님, 164쪽)

신앙 성장이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하나님의 길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을 알며, 또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은 단지 이론적인 신학적 연구와는 다르며, 아울러 목회적인 상담 테크닉이나 교회 성장론과도 확연히 다르다. 왜냐하면 신앙 성장의 핵심으로서 1)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복음이란 어떤 소식인지를 아는 것이며, 2) 하나님의 백성을 안다는 말은 현대인이 가진 온갖 질문과 욕구, 고민 속에서 복음이란 어떤 소식인지를 그들이 깊이 공감할 수 있게 해주며, 마지막으로 3)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길을 안다는 말은 현대인들이 가진 질문과 욕구, 고민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어떻게 해결 가능하며, 더 나아가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닮는 사랑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성경과 신학 전통에 대한 통찰 뿐만 아니라, 현대인과 그들이 속한 문화에 대한 이해 또한 요구한다. 그러므로 신앙 성장은 그 자체로 성경과 신학 전통을 현대인과 그들이 속한 문화 속에서 전달하고자 고민하는 신학함 즉 중간 지대의 신학함을 필요로 한다. 팀 켈러는 신앙 성장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한 큰 그림을 다음과 같이 그려낸다.


1)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일은 복음에 대한 집중이다.
2)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을 아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3)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길은 복음에 집중함으로써 경험하는 정체성의 변화로 대변된다.


1)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일은 복음에 대한 집중이다


“우리는 복음이 결코 세상에 대한 단순한 종교적 재활 프로그램인 것 같은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복음은 완성된 대안 사역이다. 우리는 복음을 어떤 것(예를 들면 천국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복음은 무엇(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런 실수를 한다면, 복음은 또 다른 종류의 공로 구원(salvation by works)이 되고 만다. 복음은 믿음에 의한 구원이다.” (센터 처치, 57쪽)


켈러에 의하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이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여기에 인간이 어떤 기여를 할 여지는 전혀 없다. 복음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그 일하심을 믿는다는 말이 삶과 관계에서 어떤 뜻인지를 숙고하고, 또 그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공로 구원의 여지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함의 중요성이 무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알면 알수록 행함과 믿음이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복음 자체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켈러는 2006년에 고든콘웰에서 했던 ‘마음에 설교하기(Preaching to the Heart)’ 강연을 비롯해서, 자신의 모든 저서들과 설교, 강연에서 계속해서 이런 요지의 주장을 반복한다. “만약 정말 복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러이러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말은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복음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서, 복음은 우리가 복음을 온전히 믿을 때 원수를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켈러에 의하면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복음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뿐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 즉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들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견지에서 켈러는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신앙 경력이 오래 되었든 그렇지 않든, 아무도 복음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사람의 마음의 기본값은 종교(=하나님의 수용과 인정을 스스로의 노력과 성취로 얻어내려는 시도)이며, 복음이 아님을 발견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주된 통찰이기도 하다.) 즉 신앙 성장이란, 복음을 더 온전히 믿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다음의 설명은 그런 켈러의 확신을 잘 드러낸다.


“사람들은 구원이 오직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과, 거저 주신 구원의 결과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성장에서 성도의 노력이 갖는 구체적 역할이나 성질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마르틴 루터가 말하듯, 모든 죄의 뿌리는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이며 의(righteousness)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유일한 노력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믿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 노력이란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칭의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성화는 복음을 충분히 열정적으로 믿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센터 처치, 147쪽)


이런 식의 화법은 복음을 믿는다는 말의 무게를 신자들이 실감하게 해줄 뿐 아니라,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인 복음이 우리 삶에 가져오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숙고하게 해준다. 즉 복음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과연 복음이 우리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고민들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식인지를 고민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켈러는 이 점을 두고 신앙이 성장하려면 ‘복음이 우리 삶에 더 자주, 더 많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2)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안다는 일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얻어내려는 시도가 현대인의 삶을 규정짓는 특징 중에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왜 성공하려고 하는가. 왜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가. 모르긴 몰라도, 이런 일들의 배후에는 현대인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얻어내려는 욕구가 숨어 있다. 자신의 저서 일과 영성에서, 켈러는 현대인이 고민하는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얻어내려는 시도는 어떤 이야기를 살아내느냐의 문제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의 행동이란 ‘몸으로 구현해내는 내러티브’라고 주장한다. 저마다 삶의 의미를 주는 정신세계의 이야기를 살아내고 있다. 환경을 지키는 따위의 대의를 실현하려는 대의라든지, 불리한 사회적 신분과 기대를 딛고 일어서서 성공하려는 갈망과 씨름하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또는 한 가정을 억압받는 상황에서 끌어내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자유와 평등에 관한 내용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남들의 편견에 저항해서 저만의 성적,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사연일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든,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참한다면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거라고 굳게 믿는 커다란 이야기 속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간다.” (일과 영성, 196-197쪽)

이렇게 다양한 정체성의 경쟁 구도 속에서, 결국 우리가 원하는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얻어내는 일이란 어떤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살아내야 하느냐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복음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온 몸으로 구현해내야 할) 이야기라면, 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제공해 주는가. 그에 대해서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복음의 진리가 가슴에 깨달아질 때, 우리는 신중하고도 확실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안전하고 확실한 구원을 받았는지, 얼마나 큰 사랑과 용납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알게 된다. 복음을 통해 더 이상 우리 정체성의 기반을 성취한 공로들에 두지 않게 되며,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일들을 토대로 정체성을 갖게 된다.”(센터 처치, 145쪽)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일들을 토대로 얻는 정체성은 첫번째로 변함이 없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기반하고 있으며, 두번째로 내 노력이나 성취와는 상관없는 일들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정체성은 당연히 안전하고 굳건하다. 변화될 여지가 전혀 없는, 너무나 확실한 일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은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성장하게 하는가.


3)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길은 복음에 집중함으로써 경험하는 정체성의 변화로 대변된다

켈러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동기의 변화야말로 바로 우리가 전심으로 복음을 믿을 때 경험하는 바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동기가 변화된다는 말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된다는 말, 즉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라는 것이 켈러의 주장이다. 역으로 우리가 복음을 믿지 않을 때 우리의 동기는 우리의 결핍을 원동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왜일까. 


“진정으로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심성에 배여 있던 극도의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존경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후한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결핍된 마음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스스로가 인생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우리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싶기도 하다. 전심으로 우리를 기뻐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 단지 개념일 뿐이라면, 우리는 결핍에 압도당할 것이고, 이 결핍이 우리의 모든 행동 동기가 될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나 은혜를 조금도 믿지 못할 것이며 마음은 부채 의식 모드인 율법주의로 작동할 것이다.”(센터 처치, 145쪽)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복음을 믿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떤 상태인가? 우리는 어떤 동기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켈러는 디도서 2:12을 읽어내면서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분석한다.


“디도서에서는 독자들에게 불경건한 것과 세상적인 욕심에 대해서 ‘아니다’를 말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절제되고 경건한 삶을 살라고 말한다 (딛 2:12). 당신은 어떤 이유로 불경건한 행동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하는지 생각해 보라.


아니다—그러면 사람들이 좋지 않게 볼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다—그러면 내가 속하고 싶은 그룹에서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다—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과 부요, 행복을 안 주실 테니까
아니다—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지옥에 보낼 거니까
아니다—그러면 나중에 나 자신이 미워지고 자존감이 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센터 처치, 143쪽)

왜 ‘아닌지’에 대한 다섯 가지 동기 모두 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악한 것들에서 멀어지고 경건한 삶을 사는데 있어서도, 복음으로 변화된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항상 자기중심적인 동기로 움직인다. 이런 동기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복음이 말하는 모든 요구 사항에 순종하면서도 여전히 복음을 믿지 않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같은 사람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 중 이런 동기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즉 맏아들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동기들 위에 경건한 삶을 세우는 일은 아주 흔하게 일어나며, 따라서 복음을 믿지 않고도 충분히 경건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신앙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는데서 나오는 경건한 삶의 동기는 어떤 모습인가? 켈러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상 이 모든 동기부여 방식들은 마음의 자기중심적인 욕구들을 사용해서 외부의 규칙에 순응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 바울은 독자들에게 이 중에 어떤 것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을 변화시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디도서에서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관리를 하라고 말하는가?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라고 썼다 (딛 2:11-12). 또 바울은 디도서 3장 5절에서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자비로써 하셨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복음이 당신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르친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훈련하다’, ‘단련하다’, ‘일정 기간 코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먼저 당신과 씨름하게 해야 한다. 복음이 깊이 자리잡게 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이 당신의 관점과 동기의 구조를 바꾸도록 해야 한다. 당신은 복음에 의해서 훈련받아야 하고, 복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센터 처치, 144쪽)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은 우리에게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제공해주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근본 동기를 바꿈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바꾼다. 그렇게 변화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복음을 더욱 더 신뢰하고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그 분을 따르는 삶, 즉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삶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켈러가 말하는 신앙 성장의 큰 그림이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은 우리에게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제공해주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근본 동기를 바꿈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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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상일

김상일 작가는 UC 버클리(B.A.), 고든콘웰 신학교(M.Div) 졸업 후, 현재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육과 실천 신학으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현재 서평 쓰는 남자 블로그(www.likeellul.com)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으며, 팀 켈러에 관해서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 "좋은 나무" 웹진과 시니어 매일 성경에 글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