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가 기독교적인가 의심하는 당신에게
by Michael J. Kruger2020-12-20

옛 언약도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공로가 아니라 앞으로 오실 구세주를 향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The old covenant was ultimately a gracious arrangement where people were saved not by their works but by the all-sufficient work of the Redeemer who would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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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안에는 많은 책이 들어있다. 그 모든 책이 다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 속 모든 책을 다 열심히 읽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은 주로 바울 서신서(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복음서(요한복음 중심으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상 몇몇 책들, 예를 들어 요한3서와 같은 서신서는 거의 읽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을 고려할 때 왜 특정한 책이 신약성경에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 생긴다. 덜 유명한 책들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 걸까? 이런 질문은 야고보서에 이르면 특히 더 심각해진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epistle of straw)이라고 부른지 어언 500년이 지났지만, 야고보서가 도대체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은 여전하다. 


물론 이러한 회의론이 진보적 신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마틴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는 한 때 야고보서에는 “신학이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의심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더 미묘하게 지속되고 있다. 때때로 야고보서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은 성경 같아 보이지 않는다. 예수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고(딱 두 번만 이름이 나온다) 주로 하는 이야기는 도덕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뭘 해야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만 주로 한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야고보서는 복음주의자로 훈련받은 우리들의 눈에는 율법책처럼 보인다. 구약 시대로부터 전해진 부적절한 유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야고보서에 대한 회의론은 구약과 신약 시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 각각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자.


구약도 은혜에 관한 성경이다


야고보서에 대한 이 비판 뒤에 숨어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미국 복음주의권 속에 널리 퍼져있는, 구약 시대가 주로 도덕주의에 의해 정의되었다는 깊은 인식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가혹하고 차가운 율법 준수라는 공로(works)였다. 게다가 내면에 대한 고려는 조금도 없는, 모든 것이 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정말로 야고보가 그런 구약처럼 들린다면 우리는 야고보서와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캐리커처 초상화처럼 이런 생각에도 진실의 요소가 있다. 확실히 옛 언약은 의식에 초점을 두었다. 옛 언약은 눈에 보이는 유형과 그림자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옛 언약에는 질서라는 강력한 법적인 측면이 있었고, 십계명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캐리커처에서 간과되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옛 언약도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공로가 아니라 앞으로 오실 구세주를 향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은혜와 구속의 맥락이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사람들이 옛 언약의 본질을 오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이 자주 싸웠던 바리새인들이 옛 언약의 이상을 구체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옛 언약 자체에 맞서 싸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산상 수훈과 같은 주요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반대하는 것은 옛 언약 그 자체가 아니라 옛 언약의 바리새인적인 왜곡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신약도 여전히 율법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야고보서의 비판 뒤에 있는 또 다른 오해는 신약 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이나 구절은 그 정의상 복음과 정반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야고보서에는 “율법”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또한 야고보서에는 그 어떤 신약성경보다도 많은 명령이 들어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단지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약 1:22). 그는 또한 편애(2:1-4), 혀 길들임(3:1-12), 탐욕(4:2), 교만(4:6) 그리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5:1-6) 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확장된 도덕적 훈계가 들어있는 책 또는 설교를 비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만약에 도덕적인 훈계를 구원받는 수단으로 제시한다면 그건 분명히 비기독교적이다. 그런 경우 확실히 복음에 반대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식의 율법이 주는 위험에 관해서 길게 썼는데, 특히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 즉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쓰인 서신서이다. 따라서 바울은 종종 율법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갈 3:10).


그러나 율법을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에 필요한 긍정적인 가이드로 제시한다면, 그 속에는 그 어떤 “비기독교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진정한 신자라면 새로운 마음으로 율법을 사랑하고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한 힘을 성령님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한다(겔 36:27; 롬 8:4).


물론 신자조차도 율법이 지향하는 완전한 표준에는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 율법은 친구이다. 우리는 첫 번째 시편을 기억해야 한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 1-2).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반대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복음에 대항하는 각각 다른 적과 싸우고 있을 뿐이다. 바울이 율법주의와 싸운다면 야고보는 반율법주의와 싸우고 있다(약 2:14). 


야고보서가 우리의 사역을 형성하게 하라


도덕에 대한 야고보서의 초점이 전혀 비기독교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 심오한 사역적 함의(implications)가 수면에 드러나게 된다. 첫째, 야고보서는 율법주의가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바리새인 외에 교회를 노리는 위협은 너무도 많다. 그렇기에 성경에 야고보서가 포함되었다. 야고보는 율법주의 뿐 아니라 반율법주의도 교회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야고보서는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러가지 이유로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단지 믿음만으로 얻는 칭의 설교와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복음과 칭의라는 두 단어는 이제 거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야고보서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하는지를 설교함으로써도 우리가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결국 기독교인이 된다고 해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두는 게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오해했었다. 칭의가 복음의 전부라면 야고보서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성화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야고보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성경이다.




원제: Is the Book of James Really Christia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바리새인 외에 교회를 노리는 위협은 너무도 많다. 그렇기에 성경에 야고보서가 포함되었다. 야고보는 율법주의 뿐 아니라 반율법주의도 교회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There are other threats to the church besides Pharisees. This is why we need the book of James in our Bi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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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ichael J. Kruger

마이클 크루거는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에 위치한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신약학 교수이며 학장이다. '성경신학적 신약개론'(공저), 'Christianity at the Crossroads'를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