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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신학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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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김형익  /  작성일 2020-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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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과 그의 친구들(Ilya Repin 1869년 작)

고난의 신학을 설교하라는 조엘 비키의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방편으로서의 고난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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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복음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참 복음을 선명하게 전하는 일처럼 효과적인 일이 없듯이, 번영 신학에 중독된 교회가 필요로 하는 해독제는 성경적 고난의 신학이다.


조엘 비키는  ‘설교에 관하여’(복있는사람, 2019)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질주의와 심리학은 우리를 속여, 인생의 가장 큰 유익은 자신의 신체적, 재정적, 정서적인 번영에 있다고 믿게 만든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쳐올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이 진리인지를 의심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일을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작정해 두셨는지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바로 그 다음 구절을 살펴야만 한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29절). 성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선택하셨으며(엡 1:4),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거룩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죽으셨다(엡 5:25-27).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그 아들의 형상을 좇아 거룩해지도록 인도하기 위해 그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여러분은 회중에게 고난의 신학을 설교하기 바란다.”(656-657쪽).


고난의 신학을 설교하라는 조엘 비키의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방편으로서의 고난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교회의 강단에서 성경적 고난의 신학을 설교로 듣는 일은 드문 일이 되어 버렸다. 한편 소위 번영 신학에 기반한 거짓 복음은 많은 강단을 오염시켜왔고 많은 교인들은 번영 신학의 가르침에 중독되어 갔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신체적(건강), 재정적(물질), 정서적(안정)인 번영이 되었고 교인들조차 이것에 몰두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는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복음은 박해를 동반하였고,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 전쟁을 치르고 모두가 가난했던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난의 신학은 설교에서 종종 다루어져야 했던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나 ‘잘 살아보세’를 기치로 하는 새마을운동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고도의 경제 성장의 흐름 속에서, 가난과 고난은 깨쳐버려야만 할 악덕으로 간주되기 시작했고, 이런 외부 세계의 거대 흐름은 강단에서 전해져야 하는 고난의 신학마저 왜곡시켜버리고 말았다. 이후 80년대를 지나고, 88 서울올림픽을 거쳐 소위 90년대의 경제번영기에 접어들게 되는 동안, 번영 신학은 특정 교단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교파 교단을 망라하는 보편적 가르침이 되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아무리 좋아진다고 해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법이다(요 12:8). 가난한 자만이겠는가? 20세기를 20년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병든 자, 실패한 자, 상실을 경험한 자, 신체적, 정서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번영의 신학에 물든 거짓 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일은 할지언정,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에서는 현저하게 실패하게 된 것이 아닐까(롬 12:15).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거나, 우리가 건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 성경은 우리가 소유한 물질과 건강과 성공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라거나, 가난과 질병과 실패가 하나님이 버리신 결과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성경의 가르침에 물을 탄 번영 신학의 가르침은, 물질과 건강과 성공을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증거라고 말함으로써 일부 사람들에게 거짓된 확신을 심어주는 반면,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가 바라는 물질과 건강과 성공으로 축복하실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허황된 희망 고문이나 영적 좌절을 안겨주게 된다. 그래서 번영 신학은 속이는 것이고 거짓 복음이다.


죄의 결과로 주어진 고난의 본질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동일한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욥의 고난의 차원이 있는가 하면, 복음을 위해서 받는 적극적 고난의 차원이 있으며(딤후 1:8), 조엘 비키가 말했듯이 일반적인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번영의 복음이라는 이름의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과(딤후 1:8)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는 말씀과(딤후 3:12) 같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피해가려고 애쓸지라도, 고난은 그들 자신의 인생에서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고난을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피해갈 수 있는 논리는 불가능하다. 이런 시대에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을 성경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게 해주는 고난의 신학이다.


욥기는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책이다. 욥기는 욥의 고난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놓고 욥이 세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길게 소개한다. 욥기 1-2장을 읽은 독자들은 욥의 고난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있지만 정작 욥 자신과 친구들은 모른다. 하나님께서 욥의 순전한 믿음을 사탄에게 자랑만 하지 않으셨어도 욥은 그 고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욥의 믿음을 조건적인 믿음이라고 폄하하였다.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기 1:10–11).” 믿음에 대한 사탄의 관점은 철저하게 극단적인 번영 신학의 논리를 적용한 관점이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과 신앙을 수단으로 삼는 이기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셨다. 말하자면, 참된 신앙은 고난이 주어져도, 가진 것들을 잃어버린다고 하여도 여전히 배신하지 않는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과율이라는 율법주의에 근거한 번영 신학의 논리를 깨뜨리기로 하셨다. 욥의 신앙을 자랑하는 것이 사탄의 마음을 격동하여 욥을 건드리고 싶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르셨을 리 없다. 그래서 고난이 깊어갈 때 욥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 고백은 마치 망치로 독자들의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준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욥 13:15).” 이것은 개역개정역의 난외주로 소개된 번역인데, 실로 무서운 고백이 아닌가! 참된 신앙은 이런 고백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욥의 고난의 이야기는 욥이 믿음을 지켰다기 보다 하나님께서 욥을 믿어주셨고 그를 끝까지 붙들어주셨으며 그의 믿음을 지켜주신 이야기다. 욥은 이유를 알 수도 없었던 이 고난을 통해서 결국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5–6).” 욥은 이 고난을 통해서 더 깊이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가게 되었다. 시편 기자의 고백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고백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67,71).”


루터는 좋은 신학자의 세 가지 조건을 기도, 묵상(성경), 시련(고난)이라고 말했다. 세 가지 조건 중에 고난이 들어간다고? 놀랍지 않은가? 기도와 묵상(성경)만으로도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기도조차 없는 신학자들이 너무 많으니까), 루터는 여기에 시련(고난)을 더했다. 그리고 루터 자신이 바로 그 세 가지 조건들 속에서 종교개혁의 신학을 세웠다. 사실, 이 세 가지 조건은 좋은 신학자의 조건을 넘어, 좋은 신자의 조건이라고 말해야 한다. R. C. 스프로울이 자신의 책 제목에서 밝힌 대로, 신자는 사실 모두 신학자이기 때문이다(Everyone’s a Theologian, 2014).


루터의 말이 옳다면,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빚어져가는 일에 기도와 말씀묵상 만큼이나 고난이 필요한 요소라면 성경적 고난의 신학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그 고난의 신학은 오늘날 번영의 신학에 중독된 신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해독제가 될 것이다.

루터는 좋은 신학자의 세 가지 조건을 기도, 묵상(성경), 시련(고난)이라고 말했다. 세 가지 조건 중에 고난이 들어간다고?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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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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