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어떻게 용서를 이루는가
by 이춘성2020-12-31

인간은 빈틈없이 완벽한 사람으로 칭찬받고 싶어 한다. 또한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에 두려워할 뿐 아니라 분노한다. 더하여 이를 막기 위해 살인에 준하는 잔인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위선은 진실한 사과와 용서를 불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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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윤리(마 5:23-26)


1. 위선 없는 용서는 가능한가?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인인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용서에 대한 에세이를 통해 무조건적인 용서만이 진정한 용서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무조적인 용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꿈꾸며 내가 생각하는 그 자체의 이름으로서의 가치있는 용서의 순수성이란 권력 없는 용서일 것이다. : 무조적이지만 권능이 없는 용서(On cosmopolitanism and forgiveness (Thinking in action). Routledge, 2001, 59.)


데리다가 말한 조건 없는 용서란 권력 없는 용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가해자가 용서를 빌었을 때, 피해자는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이러한 권리와 힘을 얻었을 때 용서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혹은 피해자는 미래에 자신이 직접 가해자를 응징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자 한다. 가해자를 응징한 후에 무릎 꿇리고 용서를 빌게 하고 멋있게 용서하겠다는 영화 같은 상상을 한다. 데리다는 이런 것은 용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응징, 복수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주장하는 용서란 극단적으로 말해 가해자가 뉘우치지도 않고, 용서를 빌지도 않았으며, 피해자는 피해를 지속해서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는 용서를 의미한다. 이러한 용서가 가능할까?


데리다 또한 이러한 용서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가 조건 없는 용서를 주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용서, 그 자체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그는 용서 속에 있는 위선의 요소를 철저히 경계한다. 많은 사람이 용서라는 형식을 빌려 또 다른 가해와 복수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용서는 화해 없는 용서를 부추긴다. 진정한 용서란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이유가 없는 화해가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용서하지만 화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미워하는 감정이 무감각해지는 것, 이것이 다수가 생각하는 용서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용서의 말을 하지만, 몸은 상대를 증오한다. 피해자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과해 보인다. 그렇지만 화해 없는 용서는 결국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이것이 데리다가 경계한 용서를 위협하는 ‘위선’의 문제이다. 위선은 용서의 거룩함과 순수성을 해친다. 불행히도 데리다는 용서에서 위선을 제거할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위선 없는 순수한 용서는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2. 위선과 이원론


예수님은 분노와 살인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라카(바보)’, ‘모레(미련한 놈)’라고 욕과 분노로 결국 살인을 저지른 어떤 사람에 대해서 가르치셨다(마 5:22).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폭력을 행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누구보다 경건하고 종교적이었다. 마태복음 5장 23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은 이 사람에 대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는 하나님에게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 성전으로 가고 있다. 그는 형제를 향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하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용서받고자 하는 이율배반의 태도를 지니고 성전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이 사람의 상태를 표현하는 한 단어가 있다. ‘위선’이다. 그리고 위선의 뿌리에는 기독교 세계관에서 주로 언급되는 이원론(dualism)이 자리한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위선의 뿌리인 이원론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실존적 이원론’이다. 이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자신의 잘못, 문제를 인정하지 못하고 모든 문제는 외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높은 자존감 때문에, 스스로 실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도 인정하기 싫어한다. 외부의 평가에 민감하며, 수치의 감정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이는 일종의 완벽주의라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완벽하지도,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자기 자신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이 때문에, 결국 이런 사람은 현실과 다른 자아를 만든다. 이것은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부케(부 케릭터)를 주케(주 케릭터)로 착각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이 사람의 실체를 알기 때문에 수군거리고, 그는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시기한다고 생각하면서 더 깊은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간다. 사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위선적이다. 주케와 부케를 오가면서 현실보다 더 나은 나를 추구한다. 이러한 실존적 이원론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에게나 있다.


둘째는 ‘문화적 이원론’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은 열등하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고 영적이며, 신에게 속했으며,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기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손으로 하는 노동은 노예들과 여자의 일이었다. 반면 성인 남자 자유인들은 여가의 시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추구하였다. 폴라톤(Plato)은 이러한 문화적, 사상적 이원론을 주장한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당시 로마는 정치에 있어서는 로마의 고유 스타일을 따랐지만, 문화와 사상은 그리스의 것을 따랐다. 그래서 당시를 그레코-로만(Greco-Roman) 사회라 부른다. 당연히 로마의 통치를 받았던 유대인들도 문화적으로 그리스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그리스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하는 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이 더 가치 있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에 비해서 중요하지 않거나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지금 성전에 가고 있는 이 사람은 단순히 둘 중의 하나의 이원론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실존적 이원론은 모든 인간이 지닌 위선이다. 또한, 문화적 이원론은 당시 그레코-로만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위선이었다. 지금도 이 두 이원론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빈틈없이 완벽한 사람으로 칭찬받고 싶어 한다. 또한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에 두려워할 뿐 아니라 분노한다. 더하여 이를 막기 위해 살인에 준하는 잔인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위선은 진실한 사과와 용서를 불가능하게 한다.


3. 우리 주변의 위선


스마트폰을 소재로 하여 위선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재규 감독의 “완벽한 타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실존적 이원론의 영향에 얼마나 깊숙이 빠져있는지 깨닫게 해 준다. 멋진 새집에 친구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모두 교수, 의사, 작가 등 사회에서 인정받는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추문과 돈 문제, 거짓으로 얼룩진 어두운 면을 숨기고 있다. 이들은 스마트폰에 온 메시지와 통화 내용을 공개하는 놀이를 시작한다. 예상할 수 있듯이 각자의 위선이 들추어지고 모든 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그러나 영화는 이 모든 것이 상상이었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상상이 아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기독교 변증가인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는 강의 도중에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온종일 녹음기를 옆에 둔 후에 녹음기를 틀어보면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더하여 한국 사회는 문화적 이원론에 깊숙이 젖어있다. 한국 사회는 사농공상이라는 오래된 사회문화 구조에 영향을 받아 왔다. 지금은 덜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교수나 의사, 법조인이나 정치인, 학자를 더 우대하고 노동자들을 열등하게 여긴다. 외적으로는 노동이 중요하다고 말하나, 여전히 건설 노동자, 배관공들, 공장의 하청 노동자의 일은 대기업 사원이나 의사의 소득에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험은 배나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 구조와 실존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만 위선자가 아니라고 그 결백을 주장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세상에서 보내며, 기도하며 말씀을 보는 시간보다 세상의 이론과 논리에 더 잘 길들어져 있다. 그런 상황과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에 가감 없이 실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타성에 빠지고, 영적인 무감각증에 빠져 세상의 문화와 개인의 이기적인 실존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 그러다 혹시 모를 죽음에 대한 불안이 엄습하면,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일요일, 하루 중 몇 시간을 예배에 투자하는 것으로 불안을 해소한다. 만약 이것이 우리 신앙의 본모습이라면 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4. 예배의 신비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위의 사람과 같이 실존적 이원론과 문화적 이원론의 위선에 빠진 사람에게도 변화의 기회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다. 이는 데리다가 포기했던, 위선 없는 용서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이 사람이 제사를 드리러 가고 있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 5:23) 이 사람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제사장에게 제물을 건네려 하는 그 순간,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불현듯 생각난다. 하나님 앞에 서니, 자신의 위선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아무 문제없이 경건으로 위장된 위선의 삶을 잘살고 있던 사람에게 이질적인 자각, 각성이 일어났다.


처음에 그는 이 이질적인 생각과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단지 자신이 하나님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생각해 보면서, 자신의 제물이나 헌금에 어떤 문제는 없는지, 자신이 혹시 절기나 주일을 잘 지키지 않았는지, 아니면 성전에 오기 전에 나쁜 생각을 한 것은 없는지 점검해 본다. 그러나 이 문제가 어제 옆집에 게으르고 가난한 사람을 향해 무심하게 던진 말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는 그런 욕을 얻어먹어도 되는 그런 무가치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위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잉여 인간 같은 존재, 기생충과 같은 존재에게 정신 차리라고 모진 말 한번 한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뒤에서 욕하지만, 이런 말이라도 해주는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다수 사람은 이런 경우 예배드릴 때 느껴지는 찔림이 자신이 누군가를 향해 행한 구체적인 사건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가 당연히 들어도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찔림은 그가 만난 특정 사람을 향한 구체적인 말과 행동 때문이라고 가르치신다. 더 정확하게는 그 행동 때문에 상대방이 품게 된 미움과 적개심 때문이다.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멸시-증오-복수’의 시스템을 작동하게 만든 엄청난 사건이다. 한번 시작된 ‘멸시-증오-복수’의 시스템이 무서운 이유는 무한 반복하기 때문이다. 주먹만 한 눈덩이가 돌고 돌면서 집채만 한 눈덩이로 불어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눈사태를 일으키듯 말이다. ‘멸시-증오-복수’의 시스템은 죄악 된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지만, 동시에 종국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핵폭탄과 같다.


5. ‘멸시-증오-복수’ vs. ‘회개-용서-화해’


그런데 예배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예배는 ‘멸시-증오-복수’가 아닌 ‘회개-용서-화해’의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예배는 이것을 예배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이 예배를 중단하게 만든다. 예배의 요구가 이들에게 너무나 무겁고 감당할 수 없는 요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사를 통해 용서의 요구에 관해서 설명하신 것은 구약의 제사는 ‘회개(각성)-용서-화해’의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사람은 죄를 각성하고 이를 용서받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나온다. 그리고 제사장은 제물을 받아 죄인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낸다. 그런 후에 제사장은 제물을 다 태워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런 후에 사람은 하나님과의 원래의 관계로 돌아간다. 화해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용서-화해’의 시스템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우리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화해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영적인 관계만이 아닌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으로 확장된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예배의 완성은 하나님과의 화해와 사람과의 화해가 교차하는 지점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마 9:23-24). 예수님은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깨워 각성하게 만들며, 이때 예배를 잠시 중단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단순한 예배의 중지가 아니다. 이는 예배의 확장을 의미한다. 예배의 잠시 중지는 성전과 예배당 밖으로 예배를 확장해서 우리의 삶의 터를 지성소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가 삶 속에 침투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공적 예배의 기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공적 예배 장소 밖으로 나가 또 다른 예배를 마쳐야 한다.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 또는 형제에게 죄를 용서받는 것, 이후에 회복하는 것이다. 마치 성전에서 ‘회개-용서-화해’의 시스템이 제사를 통해 성취되듯이 말이다. 참 그리스도인의 예배란 ‘회개-용서-화해’의 거룩한 시스템이 예배당 바깥세상에서 작동하게 한다. 바울은 이를 산 제물로 드리는 참 예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또한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의 기도(주기도)로 정하셔서 매일, 매순간 기억하고 고백하도록 명령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6. 용서와 예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철저히 이원론과 위선을 거부하는 예배이다. 하나님과의 화해와 사람과의 화해는 동전의 양면이다. 만약 사람과의 화해가 없다면 하나님과 화해도 없다. 한쪽만의 용서와 화해란 위선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가 없는 세상에서 용서는 위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의 용서는 정치의 차원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도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데리다가 제시하는 순수한 용서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예배 속에서만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는 이를 마지막까지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있는 인간의 종말의 모습이다.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교만을 인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오만함 말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예수님은 ‘멸시-증오-복수’를 반복하는 위선적인 사람은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위선은 자각 증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한 듯,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 하나까지 ‘멸시-증오-위선’의 씨앗이 하나님 나라에 뿌리 내리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위선이 뿌리내릴 땅은 단 한 곳도 없다. 이것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화해하신 성부 하나님의 단호함이다.

참 그리스도인의 예배란 ‘회개-용서-화해’의 거룩한 시스템이 예배당 바깥세상에서 작동하게 한다. 바울은 이를 산 제물로 드리는 참 예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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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