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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의사결정 원칙: 예배와 자유와 사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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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Tim Keller  /  작성일 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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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Edwin Andrade on Unsplash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이방인을 사랑하며, 가족을 건강하게 부양해야 하며,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어떤 인종이나 민족인지에 상관없이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도덕적 문제를 분명히 말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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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아티클에 이어서 크리스천이 예배와 자유와 사랑이라는 원칙에 의거한 의사결정을 어떻게 현실에서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본다.- 편집자 주


오늘날 우리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하여야 할까? 성경은 우리에게 주목할 만한 자유를 부여한다. 신약성경에는 우리가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고 무엇을 먹어야 하며 무엇을 보고 읽을 수 있고 어디에서 일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제시하는 새로운 레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복음은 넉넉한 양심의 자유를 허용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서 살아가는 과정 중 영적으로 오염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이방인을 사랑하며, 가족을 건강하게 부양해야 하며,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어떤 인종이나 민족인지에 상관없이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도덕적 문제를 분명히 말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이것을 적용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유사하게 오늘날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첨예한 의견의 불일치를 초래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갈등 해결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나?


나는 고린도전서 최우선의 근본 메시지는 바울이 ‘관용’이라는 현대적인 관념을 머릿속에 확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분명해진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에게 관용적이라는 것은 우선 다른 사람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가치나 신념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아무도 자신에게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 권리를 주장하며, 아무도 자신의 가치를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권리도 포기하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이런 원칙을 엎어 버린다. 우선 그는 분명한 비판과 판단을 내린다. 그는 믿음의 ‘약자들’은 나약하다고 말한다. 복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얕다. 그들은 기독교의 정체성과 세계관이 얼마나 첨예하게 다른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나약한 형제들의 이해보다 더 많은 양심의 자유를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의 ‘강자들’에게 말한다. 그들은 확실한 교리와 신학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 바울은 그들의 오만함과 거만한 태도를 질책한다. 그는 화합을 유지하고 성도들이 그들이 바라보는 것들에 대한 공통된 신념과 관점을 갖도록 돕기 위해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내려놓으라고 소위 강자들에게 도전한다. 만약 이에 동의할 수 없다면, 그들은 적어도 형제자매의 감성과 양심을 존중해야 한다. 이 시대를 사는 ‘관대한’ 사람은 “나는 너를 비판하지 않지만, 나의 행동이 너를 화나게 한다면 그건 내 문제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은 정반대로 말한다. “나는 너를 비판하지만, 비록 내 권리의 일부를 포기하더라도 나는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거야.”


로마서 14장에서 다루는 매우 비슷한 내용에 뒤이어 바울은 믿음이 강한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고 기록하였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약자의 실수를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 주석가인 덕 무(Doug Moo)는 “그들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대신, 그들의 태도에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사랑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사랑은, 믿음이 강한 자로 하여금 관용이 함축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베풀어 주라고 요구한다”고 했다.(Douglas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866).


오늘날 그것은 어떻게 실현될까? 필자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현대 기독교 문화 충돌에서, 양측은(문화 구별 진영과 문화 순응 진영 - 편집자 주) 자신을 더 성숙하고 강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도록 하라. (어쨌든 우린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8-10장과 로마서 14장의 내용이 우리를 향해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자, 여러분이 믿음이 강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을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경고와 함께 믿음이 강한 사람들을 위한 그의 꽤 까다로운 규칙을 따라야 한다. 덕 무의 세 가지 단계를 밟아 자신에게 적용해보라.


첫째, “그들의 믿음과 태도를 ‘공감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을 듣기 능력 시험으로 생각하고 잘 들어보라: 여러분은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우리 스스로 그것을 더는 잘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에 이르기까지 듣고 나서 그들의 믿음을 타인에게 전하거나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들이 여러분에게 아직 그런 말을 하기 전이라면 여러분의 인내심은 아직 부족한 것이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자들의 약점을 감싸주지 못하고 있다.


둘째, “그들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것을 삼가라.” 고린도전서 8-10장과 로마서 14-15장의 내용을 통해 바울이 믿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 비판을 주저하지 말라. 하지만 비판을 할 때 여러분은 깊은 애정과 정중한 마음으로 대하여야 한다. 그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모욕, 조롱과 비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종종 말하였듯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복에 당신의 행복을 더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의 즐거움으로부터 즐거움을 얻고, 그들의 기쁨에서 기쁨을 얻는 것이고, 그들이 낙담했다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의 관계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도록” 맺어져 있다.


셋째, 우리는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그들에게 행해야 한다.” 사랑은 언제나 두 가지 기본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그들이 성경의 진리를 더 깊이 연구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고유성과 깊이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더 완전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문화적, 정치적 갈등의 대부분은 기독교인들이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기존의 신념이 닫힌 체계로 구성된 교류에 의해 증폭, 강화되어 사회적이나 정치적인 의견이 극단화되는 현상-역주)의 근원이 되는 소셜 미디어나 뉴스 기사에 의해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발생한다. 바울이 말하듯이, 그 효과는 우리를 세속적이고, 일차원적이며, 비성경적인 인간 본성과 도덕적 가치에 근거한 좌우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만들어 우리의 “양심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기독교는 모든 문화를 (‘일반은총’의 개념으로) 인정하지만, 또한 세속적인 정치 및 사회 이론을 포함한 모든 문화를 비판하기도 한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런 종류의 신학적 원리에 대해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면, 그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노리개로 전락하기보다는) 더 큰 양심의 자유를 누렸을 것이며 다른 정치적 연대를 가진 기독교인들에 대해 더 많은 공감을 가졌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진리를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양육 받았는지와 상관없이, 심지어는 다른 문화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다른 성도들과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사랑 안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이는 여러분의 공동체 안의 여러 분야에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예배의 찬양이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아닐 수 있다. 목회자의 설교가 내가 원하는 특정 주제를 강조하며 다루지 않을 수 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우리가 옳다고 믿고 그렇게 할 권리가 있지만, 주위의 형제자매들을 속상하게 할 수도 있는 언어와 관행은 자제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사랑 안에서 여러분을 향해 희생을 보여준다면, 마음을 하나로 연합할 진정한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빌 2:1-4).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가능할까?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이것이 가능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는 우리의 가장 부정적 평가 가운데 하나를 가능하게 하셨다! 그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때,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다. “너는 너무나 망가져 있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의 죽음 외에는 너를 구원할 방법이 없단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우리와 같은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위해 그의 삶 가운데에 우리가 들어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다.


복음에는 우리와 크게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엄청난 자원들이 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하신 일 위에 여러분의 정체성을 구축한다면, 여러분은 ‘관대함’을 넘어서는 훨씬 더 나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사람들과 어떠한 악의도 없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권력을 행사할 필요 없이, 어떤 우월감도 없이 정직하고 예리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 존경, 경의, 겸손함을 품은 가운데 예리하게 이견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세속주의는 이런 종류의 대화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원을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만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세속주의는 “우리 모두 우리의 방식으로 관용을 베풉시다! 상대주의, 회의적인 인식론을 통해 안전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관용이라는 개념 자체를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은 자유를 희생하셔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셨고 그의 희생적인 사랑은 우리가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겁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과 더 닮았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차이의 장벽을 넘어 어떻게 말하고 사랑하여야 하는지를 아는 수백만의 기독교인들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원제: God, Freedom, and Love

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god-freedom-and-love/

번역: 장명근

복음에는 우리와 크게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엄청난 자원들이 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하신 일 위에 여러분의 정체성을 구축한다면, 여러분은 '관대함'을 넘어서는 훨씬 더 나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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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m Keller

팀 켈러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이이다. City to City의 회장과 The Gospel Coalition의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을 저술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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