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판단하라, 단 예수님처럼
by Matt Smethurst2021-02-08

자기 의(self-righteousness)는 항상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고도의 기술이다. 정작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는 검정고시 수준이면서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는 박사 학위를 추구하는 것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가장 잘못 사용된 성경 구절(The Most Misused Verses in the Bible)'을 쓴 에릭 바저허프(Eric Bargerhuff)는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참담할 정도로 오용되는 ‘인기 구절’을 조사했다.


그 중에서 일등은 뭘까?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7장 1절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바저허프에 의하면 이 구절을 놓고 성경을 통틀어서 압도적으로 가장 잘못 사용되는 구절이라고 주장한 이도 있다고 한다. 


예수님이 의미한 것이 아닌 것


그럼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 예수님이 이런 것을 의미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비판적 사고를 하지말라.”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말라.”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말라.”


그럼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이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문맥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도덕적인 판단을 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굳이 마태복음, 산상설교, 심지어 마태복음 7장을 다 훑어볼 필요도 없다.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후, 고작 다섯 구절도 지나지 않아서 그의 적을 개와 돼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들을 그렇게 보기를 기대한다(6절). 7장 후반에서 예수님은 양을 삼키는 이리와 같은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도덕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자, 그럼 믿지 않는 우리 이웃이 바라는 흔한 메시지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일까? 


그의 기본 요지는 간단하다.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물론 신학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결코 우월감의 발코니에서 아래를 보며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J. C. 라일(J. C. Ryle)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주님이 정죄하는 것은 … 결함을 찾아내기에 급급한 마음가짐이다. 사소한 잘못 또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를 놓고 언제라도 다른 사람을 비난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성급함에 빠져 서투른 판단을 내리는 습관, 이웃의 잘못과 연약함을 확대하다가 결국 상황을 최악으로 만드는, 그런 성향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입을 열어 말하기 전에 눈과 마음부터 열어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날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을 잘못된 현미경 렌즈를 통해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비극을 맞이하지 않도록, 사람을 볼 때 정확하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정직한 적용


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내가 느끼는 유혹은 그냥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대로 놔두고 싶은 충동이다. 그렇게 하면 맘도 편하고 또 나도 세상 기준에서 볼 때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순간,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다름없는 이 구절을 뒤집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말해버리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마태복음 7장 1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구절이 정말로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최소한 세 가지가 있다.


1. 네 마음 속 위선을 뿌리뽑아라


이 메시지가 바로 이어서 들려주신 예수님 말씀의 포인트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이 말씀은 형제나 자매의 눈에서 티를 부드럽게 제거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당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을 때는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이 구절의 목적은 자기 인식의 겸손, 즉 위선의 사악함을 제거하는 겸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럼 그런 위선은 어떤 모습일까? 


- 누군가가 천박한 욕을 하거나 저급한 농담을 했을 때 잽싸게 그 사실을 지적하고는 다시 원래 하던 잡담을 이어가는 모습.

- 사실상 개인 경건의 시간은 전혀 가지지도 않으면서 누군가의 기도 요청에 시큰둥하거나, 기도와 관련한 누군가의 신학을 바로잡는 모습. 


간단히 말해서, 자기 의(self-righteousness)는 항상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고도의 기술이다. 정작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는 검정고시 수준이면서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는 박사 학위를 추구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죄를 놓고 애통하는 정도까지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애통함을 가져라. 나 자신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관심을 끊어라. 예수님의 말씀 중 진짜 무서운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사랑 또는 정죄만큼 하늘의 재판관이 내게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2. 비판에 앞서 먼저 격려하라 


지난 주에 당신이 비판한 사람과 격려한 사람의 목록을 만든다면, 어느 쪽이 더 길까? 가장 친한 친구는 당신이 비판과 격려 중 어디에 더 능숙하다고 말할까? 


예수님이 금지한 태도는, 수도 없이 다양한 형태의 교만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외모, 지성, 엔터테인먼트 선호도, 육아 철학, 학업 결정, 생활 방식 및 지출 선택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라도 뭐라고 판단하는 것을 포함한다. 단지 당신과 유사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하는 것, 좀 거칠게 말해서, 그들을 볼 때 단지 당신 자신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지르는 판단이다. 

 

비판의 정신은 그럼 어떻게 생겼을까? 항상 강한 주장을 펼친다는 사실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가? 당신의 의견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겠다고 느끼는가? 당신은 언제나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다 파악하고 있다고 간주하는가?  


그리고 역 판단주의(reverse judgmentalism)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 내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난 저기 저 사람처럼 남을 막 판단하고 그러지 않아요. 나는 하루에 두 번씩 자선을 합니다. 물론, 그게 최종 목표는 아니고요”라고 말하면서 다른 바리새인을 비난하는 바리새인이 될 수도 있다. 


3. 다른 기독교인과 교회를 위해 예수님을 찬양하라


어떻게 해야 “비판하지 말라”는 도전을 단지 개인이 아닌 전체 교인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일단 우리는 얼마든지 나 혼자만이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나만이 '교회를 이끄는 바른 방법'을 알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가장 먼저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를 깔봐서는 안 된다. 성숙은 결코 지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건강보다도 교회 자체를 사랑하라(Love the Church More Than Its Health)'는 글에서 조나단 리먼(Jonathan Leeman)은 좀 길지만 충분히 인용할 가치가 있는 말을 썼다. 


우리는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보다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해’라는 비전을 더 사랑할 수 있다. 결혼을 하고도 눈 앞에 있는 아내가 아닌 여전히 머릿속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더 사랑하는 남편이 될 수도 있고, 평소 그리는 완벽한 딸에 대한 이상을 진짜 딸보다 더 사랑하는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교회보다 건강한 교회라는 꿈과 이상을 더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분의 이름을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셨다. … 그는 제대로 무르익지 않고 불완전한 신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교회의 건강보다 교회 자체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지, 그들이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선하고 성경적인 법칙을 지켜서가 아니다. … 누구나 사랑하는 자녀가 건강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부모라면 건강하든 아프든 관계없이 언제나 자녀를 사랑한다. 


바울은 교회가 지닌 수많은 흠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기쁨', 그의 '영광', 그리고 그의 '면류관'(살전 2:19)이라고 불렀다. 당신은 어떤가? 교회를 함께 섬기는 형제가 당신의 기쁨이고 영광, 그리고 면류관인가?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길을 걷는 나그네, 형제 자매, 시민, 군인, 고통받는 자 그리고 상속자라는 진리를 가르친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말이 우리가 영원히 나눌 깊은 연합을 온전히 드러내도록 하자. 


한 가지


궁극적으로, 오직 한 가지만이 위선을 뿌리 뽑고, 비판하고 싶은 욕망을 격려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꿀 수 있으며, 또 남을 판단하는 마음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겸손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주는 바로 그 은혜로부터 오는 겸손이다. 


행여 우월감의 발코니를 오르기 시작했다면 지금이라도 그 걸음을 멈추라. 당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여전히 죄를 짓는 성도, 여행하는 나그네, 여전히 미완성 작품이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올바른 자세로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이 어떤지 살펴보기 전에 나 자신의 성장을 추구하고, 무엇보다 가장 얕보기 쉬운 사람들과 그들의 평판을 높여주는 데 온 힘을 쏟으라. 


은혜가 태양처럼 마음속에서 솟아오를 때 당신 속에 있던 위선과 남의 티를 찾기 바쁜 위선은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원제: Judge People! (Like Jesus Di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지난 주에 당신이 비판한 사람과 격려한 사람의 목록을 만든다면, 어느 쪽이 더 길까? 가장 친한 친구는 당신이 비판과 격려 중 어디에 더 능숙하다고 말할까?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Matt Smethurst

맷 스메서스트는 리치먼드에 있는 River City Baptist 교회의 담임목사이다.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2022)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