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by 이춘성2021-01-28

모든 인간의 권리와 가치의 평등에 기초한 동해보복법이 이스라엘의 율법이었다. 이 법은 당시에 누구도 과도한 복수와 보복을 당할 수 없도록 했으며, 감정에 치우친 사적 복수나 부당하고 이기적인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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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악이 가득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소에는 그런 사람이나 현상을 보기 어렵지만 살다 보면 자신이 악행의 피해자가 되거나 악인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악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악의 노예가 되어 영혼을 팔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도 악을 행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고 변명이 있다. 그렇기에 악을 행한 것에 대해서 누군가 처벌하려 할 때, 부당함을 느끼고 자신이 지은 악보다 더 큰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복을 계획한다. 반대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에 비하여 가해자인 악인이 충분한 벌을 받지 않는다는 불만이 있다. 자신이 본 피해에 상응하는 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정한 처벌을 위해서 피해자의 피해를 어떻게 측정해야 정확할까?


자연법으로서의 동해보복법


이러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족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그것이 동해보복법(lex talionis)이다. 이 동해보복법은 성경에도 나온다. 이것은 일종의 창조의 원리인 자연법과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다. 또한, 동해보복법은 합리적이며 이상적인 법 원칙에 속한다. 그러한 이유로 이 법은 현실에서 지켜지기 어려운 법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사건 이후에 가인의 증손자 라멕에 의해서 행해진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 4:23) 라멕의 잔인한 복수는, 타락한 인간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언제든지 자신의 상처가 가장 아프고, 남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으로 여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해보복법은 자연의 인과 법칙의 원리지만, 인간의 자기 중심성의 주관성은 이를 결코 실현할 수 없도록 한다.


이러한 자연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성경보다 먼저 문서로 남겨놓은 나라가 있다. 이것이 수메르의 함무라비 왕이 만든 함무라비 법전이다. 기원전 16~17세기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에도 동해보복법이 나온다. 하지만 이 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수메르의 동해보복법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노예나 이방인, 여자, 아이들은 법 적용의 예외 대상이었다. 이는 오직 성인 남자이며 귀족과 왕, 종교지도자에게만 적용되는 법이었다. 만약 노예가 귀족에게 상해를 입히면 동해보복법은 적용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노예를 죽여도 귀족 한 사람의 상처를 대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가치로 취급받은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


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 적용은 다른 나라들과 민족들과는 전혀 달랐다(출 21:23-25; 신 19:21; 레 24:17-22). 십계명이 누구나 지켜야 하는 법이었듯이 동해보복법도 남녀, 아이, 성인, 이방인의 차별이 없었다. 모든 인간의 권리와 가치의 평등에 기초한 동해보복법이 이스라엘의 율법이었다. 이 법은 당시에 누구도 과도한 복수와 보복을 당할 수 없도록 했으며, 감정에 치우친 사적 복수나 부당하고 이기적인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만나는 이상적인 법 집행이 가능하였다.


라멕 효과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에는 동해보복법의 이상적인 원칙에 따라 그 정신과 원리가 잘 나타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성경에서 말하는 동해보복법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이 풀려야만 보복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피해와 남의 피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라멕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이나 현재 우리 기독교인 모두에게 예외가 아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동해보복법은 유대교의 성경 연구 운동과 경건 운동을 이끈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었다. 또한 그리스 철학으로 계몽된 유대교 학자들은 동해보복법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하지 않았다. 당시의 랍비들은 동해보복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금전적 보상으로 전환하였다. 그렇지만 금전적인 보상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부자들은 진정한 회개와 용서 없이 피해자들에게 금전적인 보상만으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보상과 보복에서 진정한 사죄와 처벌이라는 인격적 요소가 제거되고 단지 경제적 보상과 물질만 남은 것이다.


동해보복법의 비관주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9절에서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은 가해자가 악한 자라고 한다면 이들을 향해 동해보복을 요구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동해보복법으로는 결국 온전한 정의와 사랑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주의가 내재해 있다. 이것은 법치주의라는 이상이 현실에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관주의에서 절망으로 나아가지 않고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셨다. 그리고 세상이 예상하지 못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셨다. 바울은 이것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하였다(롬 12:21). 예수님은 이를 산상설교에서 네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이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차례대로 소극적 방법 세 개와 적극적 방법 한 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1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6장 29절은 뺨을 때린다고만 하였지 그 방향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마태는 정확하게 오른편 뺨이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어느 쪽 뺨을 맞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증거다. 만약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왼손으로 때리지 않는 한 오른손일 경우 손등으로 때리는 수밖에는 없다. 당시 이런 행동은 상대를 구타하려는 목적보다는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오른 손등으로 상대의 오른뺨을 툭툭 치면서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수모를 당할 때, 왼편을 돌려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상대가 나에게 도를 넘어 수치스럽게 하고 있다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본질이 아닌 것으로 약을 올리고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주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 많은 경우 참고 넘어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들의 행동이 정말 나쁜 행동이었다는 것은 알려주라고 하신다. 참고 있지 말라는 것이다. 오른뺨을 살살 건드려 사람들 사이에서 나에게 수모를 주려면 차라리 그 오른손으로 내 왼뺨을 세게 후려치라는 것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2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 5:40)


두 번째도 같다. 이런 상황은 금전적인 문제로 채무 관계일 경우다.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채무 관계로 이자를 받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채무로 인하여 전당물을 잡아야 하는 경우에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서 임의로 자기가 원하는 담보물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담보물은 채무자가 주는 것이어야 된다. 그런데 만약 채권자가 옷을 전당물로 잡았다면 옷은 반드시 저녁에는 돌려줘야 한다(출 22:26-27).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단벌이었다. 겉옷은 저녁에 담요 역할을 하였다. 즉, 옷을 담보로 잡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옷을 담보로 잡는 것은 최후에 어쩔 수 없는 경우며, 빌려주는 사람은 이것을 결코 요구할 수 없었다(신 24:10-13). 그런데 40절의 고발하는 자는 속옷을 요구하였다. 비록 겉옷은 아니기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해서는 안 되는 요구를 하여 상대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교묘하게 피하는 비겁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렇다면 겉옷도 줘버리라는 급진적인 행동을 명령하신다. 그래서 이 사람의 원래 의도, 겉옷을 원했지만 차마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그 악한 의도를 세상에 폭로하라는 것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3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41)


당시 로마 군인들은 식민지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노역을 시킬 수 있었다.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시켜 강제로 짐을 들고 약 2km(5리)를 가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럴 때 그 두 배의 거리를 가 주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통해 부당함을 항변하라는 것이다. 부당함을 항변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러나 부당함을 항변하는 것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당함을 주장하는 사람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때다. 자신이 당한 손해에 대한 배상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으려 한다는 모습이 보이면 상대는 자신의 부당함을 깨닫지 못한다. 더하여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착각한다.


동해복수의 법칙은 객관적으로 정량화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피해는 대부분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손해를 입힌 사람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황당한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상대가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고 악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내가 손해를 감수하여, 상대나 주변이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게 하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 4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


이 마지막 명령은 이전의 세 개의 예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전의 예들은 피해자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가해자를 향하여 그들의 위선과 부당함을 폭로하는 것을 통해 동해보복을 하는 소극적인 방법에 대한 예였다. 예수님은 일종의 갑과 을 관계에서 을이 당하는 구조적으로 허용된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한 부당함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동해보복의 예로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소극적인 방법을 제시하신 이유는, 사회 구조적인 악을 일시에 제거하고자 폭력적이고 혁명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을 때 오히려 구조는 개선되지 않고 약자의 피해만 가중되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폭로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보이지만 결국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깨고 갈라지게 하듯 변화를 일으킬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듯이 사회는 변하였다. 하지만 문제를 폭로하고 이에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변화의 한계가 있다.


변화는 사람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돈이나 물건을 구하고 꾸려는 자들을 이들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차별한다면, 이 또한 신분에 따라 동해보복법을 차등하여 적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해보복법은 가난한 자도 그들의 필요만큼 돈을 빌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 동해보복법은 노인과 아이, 과부와 고아, 여자와 노예, 이방인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손해를 보상하는 소극적 법인 동해보복법을 역으로 하면 이는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고 차별하지 않는 적극적 법의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레 19:10; 신 15:7-11; 24:19-22).


긍정적인 실천이 많아질수록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는 더 가속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자선 실천이 이전에는 자선이란 개념이 없던 로마 사회에 공적인 자선을 제도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교회사가인 피터 브라운(Peter Brown)에 의하면 초기 교회는 교회 안에 가난한 자들의 명부를 관리하였다. 교회는 왕과 귀족들이 회심하여 교회에 맡긴 막대한 재물을 이 명부를 통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회복지를 실천하였다. 이를 통해 교회는 부의 불평등 구조 속에서도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교회가 약자들의 대변자라는 인식을 얻게 하였고, 자신이 어떤 이유로 과도한 처벌을 받게 되었을 때도 교회가 이를 바로 잡아 주어 동해보복법이 올바로 시행되게 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하였다.      

변화는 사람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돈이나 물건을 구하고 꾸려는 자들을 이들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차별한다면, 이 또한 신분에 따라 동해보복법을 차등하여 적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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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