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by 이승구2021-02-02

섭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호기심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겸손과 경건으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바르고 공정한 판단을 존중하며 높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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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올바른 섭리론이란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비록 우리가 그 과정과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잘못되고 과도한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를 탐구하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타락하기 전의 인간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니, 타락한 사람이 그것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주어진 정황에 대해, 어떤 특정한 시공간의 하나님의 역사 전체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므로 섭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호기심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겸손과 경건으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바르고 공정한 판단을 존중하며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바르고 공정한 판단은 때로는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우리가 경험하는 코로나19 같은 것이 아주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반대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섭리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우리는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경건하게 그리고 모든 겸손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모든 정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들’이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들을 배우고, 그 한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오래전(1561년) 벨직 신앙고백서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던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계시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을 배우려고 하고, 그 한계를 넘어 가지 않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를 즐겨하며 자신들의 이해를 자랑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이는 매우 적실하고 중요한 생각이다. 그들은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니 그럴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 면에서 우리는 교만한 것이 된다. 16세기에도 하나님께서 그 말씀 가운데 드러내어 보여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한계를 넘어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런 신앙고백이 행하여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든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그 타락성을 따르면, 항상 주어진 말씀 안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 한계 밖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인간성을 만족시키기는 하나 항상 잘못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어 주는 한계 안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이 고루해 보이고 진취적이지 않으며, 탐구 의욕을 꺾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문제성과 피조물의 한계성을 참으로 인정하는 겸손이며 경건이다.


이런 겸손과 경건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되는 것이라고 믿었던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한 사람들(the Epicureans)이나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우연히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참으로 겸손한 사람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히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기계적인 섭리 과정만 있다고 하면서 그것에 우리가 노예적으로 순응해야 한다고 믿었던 스토아 학파 사람들처럼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했다(행 17:18). 바울이 그 사람들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의 철학적 사유와 그들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이 세상의 사유들이 옳지 않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분명히 천명하면서 그 말씀이 가르치는 한계 내에서 사유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진정한 모든 것은 다 말씀의 한계 내에 있는 것이다. 종교와 모든 것을 ‘이성의 한계 내에서만’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항상 모든 것에 대해서 이성이 아닌 말씀의 한계 내에서 생각해야 한다.


말씀의 한계 내에서 섭리 과정을 보면 나타나는 놀라운 결과


말씀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생각하면 섭리 교리야말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 교리’다. 왜냐하면 말씀의 한계 내에서 생각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덕분에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관리하심과 돌보심에 의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같이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돌보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불러 왔다. 모든 것이 잘되는 순조로운 환경에서는 이것을 인정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죄와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예를 들어서 모든 시대의 순교 현장이나 전쟁 등의 상황에서, 그리고 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을까?


그러나 바로 이런 데서 섭리 신앙의 묘미가 나타난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죽는다고 해도 그 존재 자체는 하나님에 의해 보호된다. 그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다가,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몸이 부활하여 영육간의 온전함을 화복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몸과 영이 하나 되어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사람들이 불행한 일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본질적 존재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물리적으로 죽는 죽음을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의 어려움과 죽음은 심각하고 큰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우리의 근본적 본질에는 아무런 손상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의 가장 위협적인 것이 사망과 음부고, 이 세상의 가장 큰 권세가 음부의 권세(음부의 문)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 속에 있으며, 고난과 물리적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배울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버지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물리적 죽음 뒤에 더 심각한 영혼의 고통이 따르고, 예수님의 재림 후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들의 죄악에 대해 정죄받고, 그에 상당한 형벌을 선고받아 영원히 몸과 영혼의 고난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가르쳐 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심지어 성경의 그런 가르침을 무시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성경은 명백히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난 사람들(갈 2:20)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나의 자리에 서서 정죄를 받으셨다는 이 복음의 선언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내가 받아야 할 형벌과 저주를 나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받으셨음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갈 3:13) 바울처럼 선언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삶의 과정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큰 고난이 있고, 심지어 자신이 물리적 죽음에 처해도 그것이 자신의 본질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그런 실재를 삶으로 드러내면서 산다. 이것이 섭리를 믿는 사람들의 삶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섭리인 소위 ‘아주 특별한 섭리(providentia specialissima)’에 대한 말이지만, 이것도 섭리의 하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그 백성을 위해 온 세상에 대한 주재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사이’의 구조 속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즉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을 위해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인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은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돌보심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혹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고난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능히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면서 마음의 안식을 가지고 고난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는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믿기 때문이며, 때로 그 고난이 이해할 수 없고 큰 것일수록 그 과정을 통해서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욥과 같이 고백한다. 그리하여 참된 성도는 결국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와 같이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다.

말씀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생각하면 섭리 교리야말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 교리’다. 왜냐하면 말씀의 한계 내에서 생각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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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승구

이승구 교수는 기독교교의학(CHRISTIAN DOGMATICS)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로서, 총신대 기독교교육과 졸업, 합동신학대학(MDiv)과 영국 The University of St. Andrews(PhD)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