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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의 짧은 만남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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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Megan Hill  /  작성일 202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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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stock

관계가 가깝지 않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오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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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린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다. 코로나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 우리는 거의 매주일 교회에서 만나면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또는 복도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를 자주 안아주었고 우리는 이번 주에 할 일에 관한 세부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린과 나는 성격도 다르고 생활 환경도 비슷하지 않다. 사실 그런 차이가 우리의 대화를 즐겁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린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가끔 교회의 예배실 건너편에서 그녀를 봤지만 우리는 더 이상 마주치지 않는다. 코로나바이러스는 화장실에 있는 사람들의 수를 제한하고 복도에서 우리 사이의 거리를 넓혔다. 우리 교회는 예배 사이에 있던 커피 타임을 폐지했고, 뉴잉글랜드의 추운 겨울은 주차장에서 서로 만나는 시간마저 줄어들게 만들었다. 


린과 이야기하던 시간이 그립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지만 정기적으로 전화를 하거나 무슨 모임을 갖는 것은 우리 관계의 특징이 아니다. 코로나 관련 팟캐스트 멤버를 선택할 때도 우리는 상대방의 멤버에 속하지 못했다.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다. 단지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사이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한다.


린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특히 교회에서 나누던 소소한 잡담을 사라지게 만든, 전염병이 가져다준 슬픔의 한 예일 뿐이다. 내가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예배가 끝나면 내가 앉은 의자에 와서 장난을 치던 아이들도 그립다. 그 아이들은 이제 예배실에서 부모님과 함께 예배드리고 다른 문으로 총총히 떠날 뿐이다. 십대들과 농담하던 때도 그립다. 분홍색 카펫이 깔린 펠로우십 홀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 번에 오 분씩 이 사람 저 사람과 얘기하던 그 시간이 그립다. 


사실 교회에서 주고받는 이런 식의 잡담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그 시간을 그리워할까?


우정의 범주(category)


아만다 뮬(Amanda Mull)은 디아틀란틱(The Atlantic)지에 실은 글을 통해 주변(peripheral) 관계의 실종을 한탄했다.


“코로나는 인간 관계를 가족 및 가장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에게로만 묶어버렸다. [중략] 코로나는 우정의 전체 범주를 증발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또한 인간의 건강함을 부양하는 기쁨을 고갈시켰다.”


사회 과학은 우정의 다양한 범주를 식별하고 또 가장 사소한 관계조차도 우리의 웰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러한 약한 관계 내지 중간 고리 관계 또는 가벼운 관계는 소속감에 기여하고 커뮤니티를 강화하며 심리적 행복을 증가시킨다. 이 범주는 또한 교회에서의 우정을 포함하여 우리의 규칙적인 상호 작용을 설명한다. 


현대 심리학이 탄생하기 수천 년 전에 예수님과 바울은 모두 다 다양한 범주의 우정이 주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지상 사역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요한)에 대한 특별한 사랑, 세 사람(베드로, 야고보, 요한)과의 친밀한 우정, 열두 명에 대한 깊은 헌신과 일흔 두 명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에게도 친애하는 동반자(디모데), 몇 명의 동역자(디모데, 실라, 에바브라), 사랑하는 많은 친구들(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유오디아, 순두게), 그리고 수많은 헌신적인 지지자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없는 예수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가 없는 바울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사역을 지원하고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수십 개의 느슨한 유대가 없는 그들을 상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때때로 교회에서 우리는 소그룹, 멘토링 관계 또는 책임 파트너십을 통해서 자라나는 친밀한 우정을 특히 강조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매우 중요한 연결이다. 하지만 관계가 가깝지 않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오산이다.


이름을 부르며 친구와 인사하자


요한의 마지막 서신서는 이런 명령으로 끝난다.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요삼 15b).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 훈육을 실천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편지의 결론으로는 약간 이상한 것 같다. 게다가 “쓸 것이 많다”고 말한 후(13절)에, 이런 권고를 하는 것은 양피지 낭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인사하는 관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먼저 '친구'를 맞이해야 한다. 단순한 미소와 환영의 말(또는 더 좋은 날에는 악수)로 우리는 모두가 함께 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스도의 친구는 내 친구라고 말한다. 


임의의 개인으로 구성된 자발적 조직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상호 연결되고 상호 의존적인 조직이다(고전 12:18). 각 부분은 먼저 그리스도에게 속함으로 인해 전체에 속한다. 서로를 보고 인정함으로, 비록 아주 작은 울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의 일부로서 각 사람의 정체성을 간증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서로 간에 '이름을' 부르면서 인사한다. 이름을 시작으로 상대에 관해서 알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독특한 은사 뿐 아니라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는 은혜의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전 12).


우리의 많은 관계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고, 그러다 보니 주로 관심사를 공유하거나 비슷한 삶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된다. 반대로 우리가 교회에서 맺은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구속받은 광범위한 사람들과의 접촉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나이가 많거나 또는 더 젊은 사람, 성별이나 인종이 다른 성도들의 관점을 통해, 다양한 시련을 겪으며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모든 종류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삶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서로의 짐을 함께 지고


팬데믹 기간 동안 나는 매주 동네 공원에서 산책하면서 다른 교회 교인과 우정을 나누었다. 우리가 걷는 트레일은 약 30분 정도 걸리는 숲길인데, 처음 20분 동안 우리의 대화는 그냥 말 그대로 잡담이다. 날씨 또는 코로나 감염자 수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아이들이나 그녀의 고양이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교환한다. 


거의 차로 돌아올 때가 되어서야 (때로는 실제로 열쇠를 들고 주차장에 서 있는 경우도 있음) 우리는 마침내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함께 산책한 몇 달이 지나면서 깊은 맘을 나누기 시작하는 시점은 점점 더 빨라졌지만, 그럼에도 상호 신뢰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는 항상 어느 정도의 잡담이 필요하다. 


우리는 잡담을 쓸데없는 수다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 신실한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진짜 중요한 시련을 만났을 때 필요한 신뢰까지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2)는 큰 일 뿐만 아니라 작은 일을 위한 명령이기도 하다. 


초대 교회에 보낸 각각의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일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간단한 사실, 회중의 위치와 상황에 대한 인식,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공통된 정체성에 대한 몇 가지 진술로 시작한다. 이 인사말을 잡담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추구하는 목적은 비슷하다. 그들은 각각 당사자가 처한 고유한 상황을 인정하고 서로 간의 관계를 재확인하고 있다. 


바울은 편지의 처음 몇 문장을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쓴 후, 신앙과 삶의 더 깊은 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한다. 누군가의 일이나 취미에 대한 일상적인 세부 사항에 매주 몇 분을 소비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동료 교인들의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결국 그들의 더 많은 문제까지도 맡는 권리를 얻게 된다.


물론 잡담이 사라진 것이 100퍼센트 전염병 때문만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현대 생활 속 기술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우연하고 계획되지 않은 상호 작용의 기회를 서서히 줄여갔다. ‘세 조각의 유리: 우리는 왜 스크린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점점 더 외로워지는가(Three Pieces of Glass : Why We Feel Lonely in a World Mediated by Screens)’ 에서 에릭 제이콥슨(Eric O. Jacobsen)은 자동차, 전화 및 TV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공동체의 사회적 구조를 강화하는 인간 관계를 어떻게 약화시켰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오늘날 스크린 뒤에 숨는 것은 아주 쉽다. 즉, 우연한 대화 조차도 이제는 어느 정도의 의도가 있어야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약해져도 우리는 여전히 교회 잡담 속에서 많은 도전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과의 어색한 대화(중요한 문제일수록 일부러 천천히 언급하는 식의 대화)는 결코 편리하거나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원제: Church Small Talk Was More Important Than I Thought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동료 교인들의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결국 그들의 더 많은 문제까지도 맡는 권리를 얻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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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egan Hill

메간 힐은 목사 사모로 TGC의 에디터와 Desiring God, Tabletalk 등에서 아티클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A Place to Belong'과 'Praying Together'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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