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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을 어떻게 도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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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Clarissa Moll  /  작성일 2021-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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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stock

우리는 종종 사라지지 않는 슬픔의 지속성에 놀라고, 어리석게도 그것이 믿음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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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장례식이 있기 며칠 전, 친구에게 네 명의 자녀와 함께 나를 묘지로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 롭의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이었다. 끔찍한 슬픔의 어둠 속에서 안정을 찾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면서 동시에 당장 장례식 날을 어떻게 견디어내야 할지 미리 생각해야 했다. 일단 묘지를 먼저 둘러보고 그가 묻힐 곳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예배가 열릴 그 자리에서 잠시 앉아있을 생각이었다. 그 뿐 아니라 나는 장례식 날 신을 새 신발을 미리 집에서 신고 다니면서 길을 들일 생각이다. 


친구가 모는 차가 묘지 입구에 들어섰을 때 나는 엔진을 꺼달라고 했다. 토요일이면 하이킹을 하기 위해 우리 가족이 자주 오던 산이었다. 예전에는 이 산에 공동 묘지가 있는지도 전혀 몰랐다. 조용히 앉아 공동 묘지 입구 너머의 고요하고 푸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정말 아름답고 고요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완벽한 휴식처였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차가 공동 묘지 안으로 들어갈 때 나는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서 기쁘다고, 최소한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충격은 아니라고. 


지난 일 년 반 동안 슬픔을 상대할 때면, 묘지에 갔던 그날처럼 미리 준비하고 또 선제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슬픔은 여행처럼 계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정을 미리 예측하고 준비할 수 없다. 슬픔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풍경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고, 또 거기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슬픔이 주는 놀라움은 종종 우리의 영적 생활을 힘들게 만든다. 물론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그리스도를 따라 고통받는 것이라는 복음의 경고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기꺼이 동참함으로 그분의 생명이 주시는 충만함을 누리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C. S.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에서 이렇게 썼다. “고통은 인생에 이미 예정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프로그램 되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까지 있을 정도다. 그리고 나는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나는 고통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적이 없다. 물론 고통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그리고 상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만날 때 모든 게 달라진다.”


고통에 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다가오고 슬픔이 뒤따를 때 우리는 놀란다.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교인을 위로하는 경험을 거의 정기적으로 하게 된다.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찾으라”는 부르심을 넘어서 고통이 주는 슬픔의 시련으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다음 네 가지를 통해서 당신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좀 더 잘 도울 수 있다.


1. 슬픔이 얼마나 아픈지를 공감하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저주가 가진 깊이와 넓이 때문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이다. 죽음과 슬픔은 우리의 연약함, 통제력의 부족, 그리고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자녀라는 혈통을 가진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에덴동산의 가장자리에 서 있던 고대 조상들처럼 우리 또한 묘지에 서서 과거를 한탄한다. 먼지인 당신은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무덤에서 바로잡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도 죽은 이는 듣지 못한다. 죽음이 주는 종착역이라는 고통은 살을 찢는 아픔이다. 그룹(cherub)들이 불칼을 들고 지키는 에덴동산을 바라보던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도 놀라서 그냥 서 있을 뿐이다. 이별의 고통이 이토록 큰 상처를 줄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힌 아담의 저주를 인정함으로 우리는 고통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를 줄 수 있다. 우리는 부활이라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몸은 썩어가고 있고, 비극이 일어나며 죽음은 혼란을 가져다준다. 이 세상은 고통스러운 곳이다(롬 8:1-23). 상실의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 내내, 조용히 곁에 앉아 함께 아파함으로써 우리는 그나마 작은 위로를 제공할 수 있다.

 

2. 오래 지속되는 슬픔의 현실을 인정하라


나이 든 여인의 부고에 그녀가 신생아 자녀를 잃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 내용을 읽을 때면 나는 놀라곤 한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물론 나는 슬픔이란 평생 지속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삽 속의 흙이 관을 덮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슬픔은 여전히 남아있다. 새로운 자녀를 낳아도, 재혼을 해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이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중심으로 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슬픔은 여전히 예전의 사랑과 삶을 기억한다. 


우리는 종종 사라지지 않는 슬픔의 지속성에 놀라고, 어리석게도 그것이 믿음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충만한 삶을 약속하셨다. 그러면, 슬픔이 어떻게 충만한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저주가 완전한 구속의 날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슬픔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마지막으로 패배할 적은 죽음이라고 기록했다. 이 시간표에 따라 우리는 몇 가지 기대치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유족을 돌보는 사역은 한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과 또한 그 사역은 교회의 틈새 사역이 아닌 전적인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유족을 만나는 경우,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다시 일어서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3. 친구를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인정하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쉽게 먹을 수 있는 냉동 식품을 찾는 것은 쉽지만,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친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뻔한 이야기, 또는 침묵, 아주 나쁜 경우에는 비판까지 하는 것이 사람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가장 크게 놀라는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 상태인가이다.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한 욥은 그의 친구인 엘리바스와 빌닷 그리고 소발을 '끔찍한 위로자'라고 불렀는데, 나는 욥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욥 16:2). 이 세 사람은 욥이 고통에 빠졌을 때 자신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고통을 받아들이라며, 마치 주먹으로 얼굴을 갈기는 것 같은 말을 위로라고 했다. 


이 세상에 그런 친구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남편을 잃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친구를 바라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냥 내게 헌신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슬픔에는 관계 자체를 바꿔버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다.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2차 손실'이라고 부른다. 특히 장기적으로 슬픔에 잠긴 사람의 친구가 되고 지속적으로 돕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일에 용기를 내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음식 제공, 연속 기도, 틈새 지원 등등, 교회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상실의 슬픔에 잠긴 사람들과 몇 년에 걸쳐서 친구가 되어 꾸준하게 돕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동정을 담은 이야기를 건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욥의 친구들이 제대로 한 게 하나 있다. 그들은 시종일관 욥의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섬길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처럼 당신이 하는 말이 다 옳을 수는 없다. 한 번 이상 심각한 말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뢰가 깊어지면 교회의 진정한 의도가 빛을 발할 것이다. 옳은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은 누군가를 잃은 후 모든 관계에서 점점 더 거리감을 느끼기 마련인 사람에게 기쁜 놀라움이라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4. 함께 예수님을 찬양하라


슬픔은 타락한 인간의 핵심을 건드린다. 얼마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슬픔은 타락한 세상이 가진 어둠을 드러낼 뿐 아니라 가장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마저도 흔들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분노의 주먹을 흔들지만, 우리가 만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침묵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침묵은 가장 고통스러운 놀라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는 공동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팟 캐스트에서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게 매달린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생의 슬픔이 우리를 압도할 때 예수님의 부활은 희망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이 우리가 고통받는 중에도 우리를 이해할 뿐 아니라 함께 하신다는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자신들의 슬픔을 보게 된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찬양하자. 교회는 승리의 빈 무덤뿐만 아니라 피 묻은 십자가를 계속 강조해야 한다. 슬픔에 빠져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슬퍼하지만 또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자. 슬픔은 깊고 오래 지속된다. 슬픔은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 공동체로부터 고립시킨다. 그러나 슬픔은 또한 우리를 공동체에 더 단단히 묶도록 만들 뿐 아니라, 복음에 더 깊은 닻을 내리도록 한다. 여러분의 교회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원제: 4 Ways to Love Someone Blindsided By Los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동정을 담은 이야기를 건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욥의 친구들이 제대로 한 게 하나 있다. 그들은 시종일관 욥의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섬길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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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Clarissa Moll

클라리싸 몰은 비영리 단체를 위한 자선 모금가 및 작가로서, 현재 슬픔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과 동행하기 위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