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해보고 싶지 않으세요?
by 정명호2021-03-14

힘든 문제 속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나 도전이라는 것도 호사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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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은 자기만의 문제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픔이나 연약함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 그럴 수도 있고,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고 해서 내 삶이 달라질 것도 아니라는 현실적인 성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중 누군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여겨지는 사람에게 한두 번 이야기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자리에서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전해 들을라치면 마음이 더 닫혀버리고 말지요. 그래서 마음에 결심합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구에게도, 내 속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어떤 면에서 보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하여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아픈 사람들입니다.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성도들 중 힘든 문제 가운데 살아가는 분들, 고통의 눈물 가운데 기도하며 살아가는 분들에게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하고 물으면 이런 대답을 자주 듣습니다. “그냥 사는 거지요 뭐.” 시간이 흐를수록 이 말이 마음에 사무칩니다. “그냥 사는 거지요 뭐.” 정말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묻고 사는 문제, 그냥 품고 사는 문제들이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 힘든 문제 속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나 도전이라는 것도 호사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인생을 멀리서 볼 때는 ‘인생을 왜 저렇게 살까?’하고 이상하게 여기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게 된 배경 이야기를 듣다 보면 머리를 끄덕이며 그분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데는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 (수가성에서 온 편지)


저는 사마리아 땅에 속한 수가성이라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여인입니다. 처음 한 남자를 만났을 때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할 때까지만 하여도 저는 제 인생에 내리 비치는 행복이라는 햇살의 따사로움이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뜻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내 방법으로 남편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잘해 보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우리 관계는 꼬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더는 버틸 수가 없도록 지쳐버려서 결혼이라는 관계를 깨고 말았습니다. 지옥처럼 여겨지던 결혼이라는 굴레, 나랑은 맞지 않는 이 남자만 벗어나면 내 인생이 나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혼에 실패한 여인으로서 혼자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혼 생활을 지켜나가는 것만큼이나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한 남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 남자와 함께 하는 상상을 하는 저를 발견하고서는 머리를 흔들며 또다시 지옥 같은 결혼의 악몽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고 마음에 다짐하곤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자기도 모르게 끌리고 있었는데, 머리로는 이것은 아니라고 흔들기를 반복하던 중 결국은 가슴이 머리를 이기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그놈이 문제였어! 이 사람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한 번 실패하지 두 번 실패하겠어?’ 나 자신도 반신반의하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의 재기를 꿈꾸며 재혼을 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실패와 아픔을 이제는 잊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 시간이 흐를수록 이 남자와의 관계도 변해갔습니다. 뭔가가 자꾸 뒤틀렸습니다. 이러려고 재혼한 것이 아닌데 … 반복된 실패는 하고 싶지 않다는 강박감까지 더해지자 삶은 더 힘겨웠습니다. 새 남편은 걸핏하면 나의 인격까지 무시하며 이제 툭하면 옛 남편을 들먹거립니다. 누가 결혼에 실패하고 싶어 그랬겠습니까? 참다 참다 또다시 이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두 번을 이혼하고 나니 이제는 남자에 대해서도, 결혼에 대해서도 모든 꿈과 기대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일 뿐입니다. 남자에 대한 기대란 다 부질없는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 같다고 여겼습니다. 누군가가 사랑, 행복, 결혼을 이야기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서라도 ‘꿈 깨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의지해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저를 거쳐 간 남자가 첫 남편을 포함하여 다섯 명,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저를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내가 나를 봐도 싫은데 어느 누가 고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 주겠습니까? 아니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여기고 관심을 꺼 주었으면 오히려 좋겠습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내가 지나가고 나면 뒤통수에다 대고 수군거립니다. 안 들어도 뻔한 이야기입니다.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사는 것에도 이제는 지쳤습니다. 모든 것이 꼴 보기 싫고 짜증스러울 뿐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귀신 만나는 것보다 싫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처럼 집 안에 수도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우물에 가려면 사람들이 가장 뜸한 시간에 가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하답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이 정오의 뙤약볕을 피해 다들 집에서 쉬고 있을 시간에 저는 우물로 갑니다. 터벅터벅 가기 싫은 걸음 억지로 옮기며 … 힐끗힐끗 사람들이 있나 없나를 살피며….


그런데 바로 그날 그 시간에 그 우물가에는 어떤 유대인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 시간에 여기 와 있지? 왜 하필이면 지금이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냥 못 본 척 외면한 채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남자가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제게 마실 물을 좀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남자는 유대인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가 살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을 혼혈 후손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대면하지도 않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서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은 유대인 남자인데 어찌 나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그 남자가 대답하더군요. “지금 내가 당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이 우물 말고 다른 곳에 우물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제게 좀 가르쳐 주세요. 저는 혼자 조용히 그곳으로 물을 구하러 가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 적부터 우리 동네에는 우물이라곤 이곳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와의 대화는 영생, 저의 과거, 예배, 메시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저는 저도 모르게 흥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아니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도 아니고, 무언지 모를 희열, 기쁨, 기대, 감격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남자 아니,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이 분은 메시아인 것 같다!”


그래서 저는 저도 모르게 동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도 꼴 보기 싫었던 동네 사람들에게로 왜 뛰어갔는지 지금도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어쨌든 저는 동네로 뛰어 들어가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리 나와 보세요. 내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가르침을 주는 어떤 분을 내가 만났습니다. 여러분 이리 와 보세요. 이분은 메시아인 것 같아요. 여러분이 저를 잘 알잖아요. 제가 이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시잖아요. 한 번 와 보세요.”


사람들도 의아했던 모양입니다. 그동안 제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랬을지도 모르죠. “드디어 저 여자가 미쳤나 보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떨까? 무엇을 보긴 본 모양인데….”


사람들은 우물가의 예수님을 모셔다가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좋아하던지요. 길 떠나려는 예수님을 그 동네에서 이틀이나 머물게 하면서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몇몇 사람이 저를 찾아와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제 우리가 그분을 믿는 것은 당신이 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귀로 직접 듣고,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그분이 세상의 구주시라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과거가 지워지거나 잊힌 것도 아닙니다. 여인이 지금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여인이 염려하던 막연한 미래에 대한 무슨 보장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달라졌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돈? 지식? 사람의 도움이나 약속? 그렇습니다. 진리와의 만남, 예수님과의 만남,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 바로 그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전과 전혀 다른 태도와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진리를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는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아마 이전에 교회를 다녔거나, 한두 번 교회에 나가 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꼴도 보기 싫을 만큼 상처를 안고 교회를 떠나셨던 분도 계실 것이고, 신앙이라는 것을 허구로 여길 만큼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상실되어버린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 나쁜 경험이 명백한 사실이고, 그것이 신앙을 가지지 않는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나 여러분의 삶은 언젠가 머지않은 시간 안에 끝이 오리라는 것은 누가 봐도 거부할 수 없이 분명한 현실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혼자 사는 인생 얼마나 외롭습니까? 얼마나 지쳤습니까? 왜 또 그 길을 다시, 계속 홀로 가려고 하십니까? 누구를 핑계 대고, 누구 탓이라고 비난해도 여전히 우리 인생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기 다른 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우리가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가는 중에 예수님을 삶의 구세주로,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아버지로, 성령님을 우리의 상담자로 모시고 살게될 때 이전보다 나아지면 나아졌지 나빠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달라졌던 수가성의 여인처럼 더 나은 삶, 변화된 삶, 기쁨의 삶, 적극적 삶, 무엇인가를 기대함으로 기다리는 소망의 삶이 우리에게도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믿음 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


저나 여러분에게나 인생의 목마름이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살아가다가도 불쑥 ‘이게 전부인가?’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으시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이 여인처럼 예수님께 이렇게 구해보면 어떨까요?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4장 15절)

​이런 질문 끝에 혹시 여러분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한복음 4장 28절)

​그렇게도 멀리하던 사람들에게로, 그렇게도 피해 다녔던 그 자리로, 기쁨과 환희의 감격을 가지고 달려 들어가는 여러분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익숙하게 걸어왔던 길 말고도 다른 길이 있습니다. 내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수많은 사람이 이 길에서 새 삶과, 늘 꿈꾸어 왔으나 그동안 어디에서도 얻지 못했던 기쁨, 평안, 확신, 안전과 구원을 얻었습니다. 결심하십시오. 작정하십시오. 성공적인 인생의 새 출발을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 주심과 안아주심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길 축복합니다.


 (이 글은 필자가 최근 발간한 '초청'이란 저서에서 직접 부분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달라졌던 수가성의 여인처럼 더 나은 삶, 변화된 삶, 기쁨의 삶, 적극적 삶, 무엇인가를 기대함으로 기다리는 소망의 삶이 우리에게도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믿음 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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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명호

정명호 목사는 균형을 통한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목회자로, 1948년에 설립된 혜성교회의 6대 담임목사로 섬기며, TGC코리아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전도 대상자를 위한 책 '초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