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것은 그리 대단한 급진적 결단이 아니다
by Brett Mccracken2021-03-30

진짜 급진적인, 진정한 반문화적 선택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게 아니다. 진짜 급진적인 선택은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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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인스타그램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자신의 역회심(deconversion)을 발표하는 것은 하나의 문화적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대충 이런 식인데, 전직 복음주의 작가, 목사, CCM 가수, 또는 교회에서 자란 이십 대가 뭔가를 깊이 고민하는 것 같은 엄숙한 표정과 함께 자유로움을 뽐내는 셀프 사진을 올리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뒤로는 보통 아름다운 호수나 산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심혈을 기울여서 찍은, “불완전하지만, 이게 나야”라는 식의 마음을 표현하는 셀카를 게시한다. 그런 게시물에서 흔히 만나는 문구는 이런 것이다. “차마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는 몰랐어.”, “이걸 게시하는 건 정말로 두렵지만”, 그리고 중간중간 '진화', '여행', '두려움', '발견', '정직', '진정함', '자유', 그리고 '희망' 등의 단어가 들어간 내러티브를 늘어 놓는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역회심을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졌을 진지한 고민과 괴로움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내 관심은 이런 움직임이 하나의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장르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제 예측 가능해지고 평범한 일로 전락하기에, '나 자신을 찾는' 시대가 만든 놀라운 결과물이라고 보기 어려워진다.


시대에 역행하는 도발성과는 거리가 멀게도, 이제 누군가가 기존의 제도적 종교와 결별한다는 선언은 사실상 이미 그런 식의 발표를 주류 문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수십 년 전의 문화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을 움직이는 영성을 위해 기존의 교리와 제도적 신앙을 버리는 것은 결코 서구 문명을 거스리는 게 아니라 사실상 서구 문명과 발맞추는 것이다. 


자신의 영적 자율성을 선언하는 것, 즉 죄와 도덕으로 대표되는 구식 사고방식인 기독교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프라(Oprah) 쇼에 나와 그녀의 생각에 찬성하는 중산층 엄마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한계와 경계를 정하고 분노하는 하나님 대신 내가 바라는 '최고의 삶'을 지지하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존 레논(John Lennon) 스타일의 '사랑'과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이고, “선포하라, 그럼 네 것이 될 것이다”라고 설교하는 조 로건(Joe Rogan)과 같은 번영 설교자에게 열광하는 어리석은 청년들 중의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며, 또한 지난 20년 간 나온 '종교, 영성, 그리고 신앙'에 관한 각종 베스트셀러들의 메시지에 동의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청소년 시절부터 믿던 기독교와의 이혼 서류에 사인하기 전에, 무엇보다 당신이 지금 하려는 게 결코 반문화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오늘날 흔해 빠진 이혼처럼 그것은 너무도 뻔한 이야기에 불과하니까. 나는 이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고 진짜 반문화적인 선택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엄청나게 힘들고 또한 무엇보다 현대의 시대 정신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기독교를 체험한 적이나 있는가?


믿음을 지키는 것이 급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참된 성경적 의미의 기독교 신앙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기독교는, 교리에 관해서는 무식하면서도 총기를 소유하겠다는 열망과 국경의 장벽을 더 높이는 데는 열심인, 미국적 문화에 찌든 기독교가 아니다. 또한 동시에 사회 정의 캠페인을 위해 선택적으로 성경구절을 사용하면서 개인적인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는 진보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안락함을 추구하는 형태의 기독교를 '해체'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왜곡된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급진적이지 않다. 


지금 행여나 기독교와의 단절을 고려하고 있다면, 일단 진정한 기독교를 한번 만나 보길 권한다. 이 기독교는 당신의 정치적 성향과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기독교는 끊임없이 여러 면에서 당신을 압박할 뿐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왜곡되거나 조작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이 기독교는 또한 단순히 당신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하지 않고 예수님을 더 닮아 가도록 끊임없이 당신을 밀어 부칠 것이다. 


진짜 급진적인, 즉 진정한 반문화적 선택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게 아니다. 진짜 급진적인 선택은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이 기독교는 신비로움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무한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과 관련하여 세상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지적 씨름을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해체하려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또한 행여 모든 신앙을 다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신앙 속에 잠재된 모든 긴장은 다 해소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지적 멍청이를 위한 종교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이것이 당신이 경험한 기독교라면, 난 당신을 불쌍하게 생각한다. 당신이 기독교를 떠나려고 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떠나려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돌연변이다. 내가 원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길들여 내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패러다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일 뿐이다. 진정한 기독교는 항상 우리의 패러다임에 도전하고 우리가 편하게 생각하는 영역을 공격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기독교를 만나는 것은 보람 있지만 동시에 많은 대가를 치르는 일이기도 하다.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 중 하나가 지적인 부분이다. 경험적 증거 없이 계속되는 질문들과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역설들, '희미하게만 보는' 믿음(고전 13:12)의 부담을 계속 짊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만족하려는 겸손한 의지가 필요하다. 


세상을 떠난 신학자 J. I. 패커(J. I. Packer)는 이렇게 말했다. 


“이해가 안 돼서 더 이상 믿지 않거나, 이해할 때까지 믿음을 미루는 것은 우리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대신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했듯이,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이 우선이고 보는 게 그 이후가 되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 정한 순서다. 결코 그 순서가 뒤집어질 수는 없다. 따라서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증거는 하나님이 정한 순서를 따르려는 의지다.” 


정말로 이것이, 즉 “믿음이 먼저고 보는 것(이해하는 것)은 나중이다”가 기독교 신앙이 진짜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런 신앙을 계속 갖는 것이야말로 포기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 뿐 아니라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신앙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이성을 힘들게 하는 신앙의 요소들을 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맞춤형 영성의 외로움


단지 제도적 종교의 해체를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완전한 무신론으로까지 전환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기독교의 일부 측면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유동적이며 기분과 필요에 맞는 다른 철학과 의식 또는 영성을 통합하는 식으로, 보다 직관적이고 맞춤화된 영성을 구축할 가능성이 높다. 다음은 종교 칼럼니스트 타라 이사벨라 버튼(Tara Isabella Burton)이 ‘이상한 의식: 신 없는 세상 속 새로운 종교(Strange Rites : New Religions for a Godless World)’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감성적 직관, 미학적이고 상품화된 경험, 자기 창조와 자기 개선, 그리고 셀카의 종교. … 제도, 신조, 신이나 우주 또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형이상학적 진리 주장과 결별했지만,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가치, 목적, 공동체, 의식 등 종교가 항상 제공하던 그 역할을 감당하는 새로운 종교. 


이런 식의 '혼합 및 일치'를 내세우는 종교에서는 기도와 같은 전통 종교의 요소들 일부와 더불어 요가와 명상으로 대표되는 '웰빙' 관행의 일부, 그리고 타로 카드와 같은 뉴에이지 마법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사회 정의 또는 성소수자의 권리 등에 관한 도덕적 열성도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혼재된 맞춤식 영성이 급진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주류 소비주의가 지향하는 부르주아적 반복일 뿐이다. 이것은 특히 자본주의가 좋아하는 종교다. 왜냐하면 종교 기관의 울타리 밖에서 의미를 찾고 갈망하는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제품과 경험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문화적 시위와는 거리가 먼 이런 식의 나만의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당신의 방식대로 만들어 먹어라”라는 믿음의 버거킹 브랜드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극도로 소비주의적인 세상에서 맞춤형 영성을 선별하려는 충동에 저항하고 개인 취향에 맞지 않을 때에도 일관되고 확립된 종교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급진적이다. 


또한 맞춤식 영성은 대개 특권층에게나 어울린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즉, 고급스런 영성을 추구하려면 어느 정도 돈과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가능하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제도의 틀 밖에서 얼마든지 '홀로' 영성이 주는 위험을 의식하지 않고 직관에 따른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생존뿐만 아니라 미래에 출세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구조, 제도, 전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저소득층과 개발도상국에서 무신론과 불가지론을 만나기 힘든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타인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있으려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조건이 갖춰져야 가능한 이야기다. 


따라서 맞춤형 영성(또는 영성 없음)에 찬성하여 종교를 버리는 것은 편안한 소비주의와 완전히 일치하는 부르주아적 선택이다. 그것은 당신을 배신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외롭게 만드는 일이다. 기독교를 떠날 때 새롭고 더 넓은 자유의 문이 열리는 게 아니다. 정반대다. 당신은 자유와 가능성의 지평을 오로지 단 한 사람으로, 즉 당신 자신으로 좁히는 것이다. 대단하게 들리지만, 이것이 소비자주의자로 사는 내 세상(iWorld)의 방식이다. 이런 식의 나 중심의 영성은 결국 밀실 공포증과 외로움으로 귀결된다. 


공동체가 주는 제약, 외부 권위의 요구 그리고 제도적 구성이 요구하는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처음에는 개방적이고 낭만적인 자유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약이 사라진 것은 자유가 아니다. 예수님은 “완전하고 무한한 자율이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32). 당신이 만든 진리가 아니라, 참 진리,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진리다. 그리고 그런 자유를 주는 진리는 내면을 들여다보고, 직감을 믿고, 혼자 가는 것으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가 주는 급진적 대가


탈기독교와 세속화 문화에서 해체는 급진적인 행위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말이 된다. 역사적인 기독교는 오늘날 세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낯설고, 그 어느 때보다 변두리로 밀려났으며, 그 어느 때보다 반갑지 않은 존재다. 서구 문화가 지향하는 오늘날, 그 모든 규범을 파괴하는 진정한 기독교를 한번 생각해보자. 


“자신을 믿으라”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자신을 부인하고(마 16:24), 십자가를 지라고(눅 14:27) 요구한다. 

표현을 중시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진정성, 그리고 튀는 개성을 강조하는 “당신은 당신이 만든다”라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라고(롬 8:29), 하나님을 본받으라고(엡 5:1) 요구한다.

소비주의적이고 탐욕스러운 문화에서 기독교는 값비싼 관대함(눅 21:1-4)을 가지고 물질적 소유를 기꺼이 포기하라고(마 19:21; 눅 14:33) 요구한다. 

자기 홍보와 자기 자랑 그리고 셀카로 대표되는 자기 지향적인 세상에서 기독교는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종으로 살라고 요구한다(빌 2:3-4; 갈 6:2; 마 20:26-28).

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진정한 자유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요구한다(고전 6:20).

서로 동의하는 한 자유로운 섹스를 승인하는 진보적인 성 문화에서 기독교는 성은 오로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나누는 언약적 결합이라고 말한다(창 2:24; 마 19:3-6.; 고전 7:2).

'권력'과 '승리' 그리고 '최고의 삶'을 주는 성공을 특권으로 삼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연약함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한다(고후 12:9-10).

당파성을 중시하며 적을 최대한 나쁘게 생각할 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적까지 '소유'하는 것이 삶의 방식인 세상에서 기독교는 그들을 사랑하라는 급진적인 도전을 던진다(마 5:44).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버리고 인종 차별, 성 차별 및 외국인 혐오를 통해 타인의 비인간화를 정상화하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창 1:27) 존엄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열로 가득하고 또한 다른 사람과는 그 어느 때보다 헤어지기 쉬워진 세상에서 기독교는 화해하라고 요구한다(엡 2:11-22).

'모든 길은 어차피 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게 위로가 되는, 다양한 신념의 다원주의 세상에서 기독교는 천국으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하나의 길 밖에 없다고 말하며, 그 믿음을 요구한다(요 14:6).

과학적 합리주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기독교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아이를 낳은 처녀, 죽음에서 부활한 육체, 기적적인 치유).


이것들 중 그 어떤 것도 실행하거나 믿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를 설명하는 목록은 이보다 훨씬 더 길 수 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기독교를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선호하는 정치, 음악 또는 성적 성향 등)에 편리하게 맞추는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또 그리스도의 사역에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가 요구하는 모든 대가를 받아들이고, 또한 기독교의 모든 주장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문화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반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힘들고 이상하기까지 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 자신들이 믿고 실천하는 것 때문에 '괴물'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성경이 말하는 좁은 길을 따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랄 이유가 없다(마 7:13-14). 그렇기에 인스타그램에서 역회심을 발표하는 게 일상이 된 현실을 보면서도 놀랄 필요가 없다. 


정말로 반문화적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기독교를 버리는 게 아니라 기독교를 더 굳게 붙잡으라.


편집자 주:

이 기사는 브랫 맥크레켄(Brett McCracken)이 쓴 '신앙을 버리기 전에: 교회 속 의심을 해체하기(Before You Lose Your Faith: Deconstructing Doubt in the Church)에서 발췌한 것이다.




원제: Deconversion Is Not as Countercultural as You Think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탈기독교와 세속화 문화에서 해체는 급진적인 행위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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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Brett Mccracken

브랫 맥크레켄은 미국 TGC의 편집장으로 Southlands Church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