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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 통신 10 :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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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김은득  /  작성일 202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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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리는 헌법적 시민 자유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칼빈주의에 근거한 혁명, 바로 권위와 자유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그런 혁명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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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미국의 독립 전쟁 시기에 행해진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의 명연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를 기억하십니까? 헨리의 주장대로 인간에게는 절대로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human freedom)입니다. 명실공히 헌법에 명시된 보통 사람들의 자유는 역사적으로 왕의 권력(혹은 주권)으로부터 쟁취해 내야만 하는 것이었기에, 대개 이런 정치적 자유를 향한 불같은 열정이라면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사실 제(카이퍼)가 활동했던 19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소설 중의 하나가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입니다. 아직도 2012년 뮤지컬 영화로 제작된 레 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가 귓가에 울려 펴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성난 자들의 노랫소리가? 다신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함성!”


제가 이전 카이퍼 통신들을 통해 지적했던 것처럼,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네덜란드 역시 1848년도에 왕에게 주어진 실질적 권력(혹은 주권)을 의회(the parliament)로 이동시키는 헌법 개정을 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후광을 힘입은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은 인민 주권을 내세우며 거의 30년 동안 네덜란드 의회를 장악하였습니다. 이에 발맞추듯이 화란 개혁 교회 내부의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이 프랑스 혁명은 종교 개혁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면서, 장 칼뱅(Jean Calvin)과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에 대한 비교 연구가 성행했습니다. 200년의 역사적 간격을 제외한다면, 둘 다 프랑스 출신으로 동일하게 제네바를 무대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루소 본인이 사회계약론(Social Contract)이라는 저서에서, 칼뱅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칼뱅을 그저 신학자로만 높게 평가하는 자들은 그의 진정한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 모국에 대한 사랑, 자유에 대한 열정에 우리에게서 소멸되지 않는 한, 그 위대한 인물에 대한 기억은 영원토록 축복을 상기시킬 것이다.” 이런 종교 개혁과 프랑스 혁명의 관계 혹은 칼뱅과 루소에 대한 관심은 제 후배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에게서도 나타날 정도이니, 네덜란드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공적 담론의 주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적이든 신학적이든 자유주의자들이 공론장의 대세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젊은 청년들을 제가 창당한 반혁명당(Anti-Revolutionary Party)의 당원으로 가입시키는 것은 매우 힘든 과제였습니다. 그 때 작성한 제 아티클 제목이 “칼빈주의, 헌법에 따른 시민 자유의 원천과 요새(Calvinism, the Source and Stronghold of Our Constitutional Liberties)”입니다. “다신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함성”과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칼빈주의 교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혹은 “신적 선택 교리(the doctrine of divine election)”가 아닐까요? 저는 그런 칼빈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자라난 젊은 세대에게 칼빈주의에 대한 새로운 내러티브를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헌법적 시민 자유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칼빈주의에 근거한 혁명, 바로 권위와 자유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그런 혁명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인간의 자유를 억압할 것만 같은 여러분의 오해를 풀어드리고자 합니다.


16세기 칼빈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각종 성상이나 동상을 다 파괴하였는데, 이것은 공공 기물 파손(Vandalism)의 행태가 아니라, 우상숭배에 대한 혐오, 특히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에 근거한 활동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왕정(monarchy)이든 민주정(democracy)이든 어떤 인간적 형태로도 재현될 수 없습니다; 다만 칼빈주의자들이 선호한 공화정(republicanism)은 일종의 왕정과 민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신학적 문제점을 보완하는 형태입니다. 도르트 총회에서 인정했듯이,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절대 주권을 부여한다 해도, 타락한 인간이기도 한 왕은 권력을 남용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권력을 잘 사용한다면, 왕에 대한 일종의 우상 숭배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권력에 대한 법적 구속과 견제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중 역시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언제나 그들의 자유 역시 방종이 되기 쉽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다수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소수의 자유를 희생시켰습니다. 루소의 강력한 추종자인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가 루소의 인민 주권 사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 유명한 단두대를 설치하고 공포정치(the reign of terror)로 나아갔던 것을 늘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을 받아들이는 칼빈주의자들은 권력과 자유의 문제에서 양극단을 피하면서, 공화정을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제 정치적 대부인 후른 판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에게 프랑스 혁명은 유럽 문명을 병들게 하는 암적인 존재였기에, 프랑스 혁명의 과실 역시 결코 따먹을 수 없는 금단의 열매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프랑스 혁명이 제공한 인민의 자유는 금지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누려져야 할 소중한 열매입니다. 제가 이끄는 반혁명당의 모습은 시대의 흐름에 반동적인 정당에서 벗어나, 더 나은 매력으로 네덜란드의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는 정당입니다. 제가 묘사한 신적 선택 교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인간은 더 이상 교회(로마 가톨릭)나 성직자들(루터교의 교사 개념)을 매개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필요가 없으며, 개개인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후기 기독교세계(post-Christendom)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선택 교리를 통해 양심의 자유 개념으로 나아가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던 19세기의 상황에서 칼빈주의적 양심의 자유가 다양한 칼빈주의 국가들 내에서 정치적 자유로 발전했음을 보여 준 것은 파급 효과가 상당했습니다. 미국 독립 혁명, 영국 청교도 혁명, 네덜란드의 독립 혁명은 칼빈주의 국가들 내에서 어떻게 인민들이 충분한 자유를 누리면서도 국가의 질서가 안정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실례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제가 살던 시대보다 충분한 사료를 누적하고 있는 여러분의 상황에서 이런 혁명들 가운데 너무나 듣기 불편한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 청교도 혁명에 존재하는 폭력적 내란, 국왕 살해, 아일랜드 지역에 대한 테러 등은 제가 비판했던 프랑스 혁명의 문제점들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던 19세기에 칼빈주의가 하나의 문화적 패턴으로서 근대 시민 국가의 권위와 자유 개념의 원천임을 보여주는데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주장은 당대 지성인들 (조지 밴크로프트(Goerge Bancroft), 막스 베버(Max Weber),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공통된 전제였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사회적 상상력이기도 했습니다. 다소 저의 특이점은 반혁명당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프랑스 대혁명보다 더 나은, 칼빈주의 국가들에서 발생한 혁명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근대 시민 국가의 자유의 원천은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라, 칼빈주의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이런 칼빈주의 정치 철학적 문맥 속에서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을 살펴보면, 영역 주권 교리는 다름 아닌 삶의 각 제반 영역들이 국가나 권력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각 영역 자체의 권위와 책임 하에 운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국가(the State)를 “내재적인 하나님(the immanent God)”으로 신격화하면서 권력이 행정부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 됩니다. 인간의 전적 부패를 다시 한번 상기한다면, 미국의 삼권분립처럼 견제와 균형으로 조화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저는 이런 권력의 분립과 균형이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창조 원리에 따라, 삶의 각각의 영역들은 분화된 권력과 책임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영역은 또 다른 영역에 부당하게 간섭하거나, 자체의 영역에 통용되는 원리를 다른 영역에 부과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중세 크리스텐돔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교회가 학문이나 예술과 같은 다른 영역에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는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국가가 교회를 대체하였을 뿐이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국가나 교회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운 대학교, 즉 암스텔담의 자유대학교 설립식에 영역 주권에 대해 연설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바로 삶의 각각의 영역들이 그 영역 주권에 따라 발달하기 위해서는 그 영역 자체 내의 윤리적 퇴보에 저항해야 합니다. 만일 학문의 영역이 진리에 부합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따라 운영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종교)의 영역이 신앙이 아닌 자본의 논리에 따른다면 어떨까요? 바로 영역 자체 내 윤리적 퇴화가 심화되어 법적 문제가 생겨날 때, 국가의 개입이 그 영역에 대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각 영역의 자유로운 발전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윤리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국가는 모든 삶의 영역들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 문명이 더욱 발달하면서, 국가의 이런 지배적 성향은 더욱 강화됩니다. 한 개인이 이런 국가 권력과 충돌하게 될 때, 소위 시민 사회(civil society)로 구성된 중재 기관(mediating institutions)의 도움이 없다면 정당한 대우를 받기 어렵습니다. 토크빌이 당시로선 신생국가인 미국의 민주주의를 유럽보다 높게 평가한 이유 중 하나가 국가의 권위와 개인의 자유 사이를 중재하는 시민 사회의 역동성이었습니다. 시민 사회의 발달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삶의 각 영역들이 자체 영역 원리에 따라 자유롭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각 영역 자체에 능력이 출중하면서도 도덕성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고, 바로 자유대학교의 존재 이유는 이런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칼빈주의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때론 혁명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사랑합니다. 마치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절대 주권을 행사하는 타락한 국가 권력에 대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기꺼이 외쳐 왔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의 자유에 대한 열정은 혁명의 한 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국가 권력의 부당한 간섭을 벗어나 삶의 각 영역이 그 자체의 영역 주권 원리를 따라 자유롭게 발전하는데 이릅니다. 그러나 이런 칼빈주의자들의 자유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같은 윤리의식과 결부되면서, 국가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왕이든지 국가든지 심지어 민중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의 권력은 부패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의 자유는 방종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칼빈주의가 프랑스 대혁명보다 더 나은 헌법적 자유의 원천이며 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칼빈주의자들은 국가의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교회에서부터, 삶의 각 영역 원리에 따른 자유로운 시민 사회를 구현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칼빈주의적 자유에 대한 열정입니다.

칼빈주의 정치 철학적 문맥 속에서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을 살펴보면, 영역 주권 교리는 다름 아닌 삶의 각 제반 영역들이 국가나 권력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각 영역 자체의 권위와 책임 하에 운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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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은득

김은득 목사(PhD., Calvin Theological Seminary)는 신칼빈주의,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공공신학을 한국적 문맥에 맞게 상황화하길 원하는 신학자로서 현재 미국 애리조나 투산에서 드림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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