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의 성경신학적 탐구와 칼빈주의
by J. I. Packer2021-07-18

교회가 논쟁과 거짓 전통에 빠져서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 실패했을 때를 빼고는 항상 일관되게 주장하고 가르쳤던 것이 바로 칼빈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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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 소천 1주기를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J. I. 패커의 유명한 에세이’를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부 

'칼빈주의는 튤립이 아니라 세계관이다'에서 이어집니다.


이제 칼빈주의적 구원론의 본질이 명백해진다. 인위적인 기이함도, 지나치게 대담한 논리의 산물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고백은 성경의 진술이자 동시에 믿는 자의 고백이다. 칼빈주의자는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믿는 것을 고백하는 자이자, 또한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신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다. 또한 다른 모든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구원을 위해 간청할 때, 또는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예배의 충동에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구원의 영광을 오로지 구세주에게만 돌리려고 할 때에 조차도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만을 생각하고 말하는 자이다. 그리고 구원의 모든 영광을 오로지 구세주에게만 돌린다.


칼빈주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사람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새겨지는 신학인 반면, 알미니안주의는 지적 연약함이 빚어내는 죄이며, 심지어 중생한 사람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같이 죄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만 알미니안주의가 자연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주의적 사고는 지적인 수준에서 기독교인이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알미니안적 사고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찾는 데에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교회가 논쟁과 거짓 전통에 빠져서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 실패했을 때를 빼고는 항상 일관되게 주장하고 가르쳤던 것이 바로 칼빈주의다. 그렇기에 ‘5대 강령’의 가르침에 대해 인용할 수 있는 과거 교부들의 많은 증언이 중요하다(오웬은 구속에 관해서 몇 가지를 덧붙였다.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존 길(John Gill)이 쓴 ‘하나님와 진리의 원인(Cause of God and Truth)을 참조하라). 그렇기에 이 구원론을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어찌 보면 가장 잘못된 것이다. 이 구원론이 단지 존 칼빈과 도르트 총회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분명하게 말씀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일 뿐 아니라 개신교를 넘어서 가톨릭 기독교 신앙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지난 수세기 동안 수많은 편견을 양산한 ‘혐오스러운 이름’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 성경의 복음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이제는 우리가 시작한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웬의 작업은 분명히 제한 속죄를 옹호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 그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오웬의 책의 목적은 방어가 아니라 건설이다. 그것은 성경적, 신학적 탐구이다. 그 책의 목적은 단순히 복음의 중심 주제인 구세주의 성취에 관해 실제로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는 구속과 화해, 그리고 그 공로와 그로 인한 완성(satisfaction)에 관한 논문”이다. 기존에 있던 도르트 신조와 마찬가지로 오웬이 정말로 대답하려고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기독교인 모두가 복음이란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의 구속 사역의 성격과 범위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성경은 여기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부여하는 목적과 성취는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오웬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주제를 노골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가 반대하는 건 이런 신학이다. “일반 대속에 대한 생각을 퍼뜨리기 …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그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단순한 일회적인 논쟁이 아니라 체계적인 해설 논문이다. 오웬은 문제가 되는 이 논쟁을 활용해서 적절한 순서와 연결을 통해 구원에 관한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후커(Hooker)의 책, ‘교회 정치법(Laws of Ecclesiastical Polity)’에서처럼 그에게 논쟁 자체는 부수적이며 부차적인 관심사이다. 그의 책이 가진 핵심 가치는 오웬이 스스로 구축한 디자인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주장을 수행하기 위해 그 디자인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다.


그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매우 단순하다. 오웬은 그의 글을 낳게 한 질문, 즉 속죄의 범위가 단지 그 질문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속죄의 본질에 대한 추가 질문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속죄가 결국에는 멸망해서 지옥에 갈 사람에게까지 제시된다면, 그것은 애초에 모든 이를 구원하겠다는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는, 즉 모든 이의 진정한 구원을 보장하는 거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웬은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래의 종류라고 말한다.


그의 논문 첫 두 권의 내용은 구속주의 죽음이 애초에 의도한 대로 그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사실에 대한 대규모 실증이다. 세 번째 책은 보편적 구속의 가설에 반대하는 일련의 16개 논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논증은 모두 다 한편으로는 성경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멸망하는 자들까지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효과적으로 거부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만약에 애초에 의도된 구원의 범위가 보편적 인류라면, 그 결과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거나(성경은 이를 분명하게 부인하고 있음에도, ‘일반적인 대속’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점을 확인하지 않음) 또는 아버지와 아들이 애초에 가졌던 구원 계획은 완전히 실패한 것,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다. 오웬은 이렇게 말한다. “보편 구원을 주장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완전함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가해를 입힌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는 가치에도 심각한 훼손을 가하고 있다.”


오웬의 주장은 이 딜레마에 대한 일련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책에서 오웬은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 부류의 텍스트(그것은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구절, ‘모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구절, 그리고 마치 그가 대신해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구절을 말한다)가 건전한 주석적 원칙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에 결코 신학적 가르침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 그런 구절에 근거하여 보편 구속 이론을 성립하는 신학적 추론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논증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심지어 멸망하는 자들까지 위해 죽으셨다는 주장에 대한 진정한 복음주의적 평가는 오웬의 책에서 계속해서 나온다. 지금까지 이 주장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대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사랑을 무력한 소망으로 축소시키고, 소위 말하는 ‘구원하는’ 은혜(여기서 ‘구원하는’이라는 말 자체도 잘못된 것이다)를 신이 저지른 기념비적 실패로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와 가치를 확대하기는커녕 그리스도를 헛되이 죽게 만들어 그 가치를 훼손한다.


마지막으로, 믿음에 추가적인 격려를 주기는커녕 성경적 확신의 근거 자체를 완전히 파괴한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구원이 영원하다고 추론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결국 나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내가 나중에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게 된다. 따라서 이 견해는 성경이 마땅히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부터 그 영광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명시적으로 말하는 지점에서조차 셀프 구원이라는 반성경적 원리를 도입한다.


둘 다를 가질 수는 없다. 보편적 범위로까지 확장된 속죄는 감가상각된 속죄이다. 거기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구원은 이제 내 능력에 달린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일반 대속의 교리는 오웬이 거부한 것처럼 심각한 잘못으로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오웬이 제시한 교리는 성경적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 교리는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오직 십자가만을 영광으로 삼고 그들의 희망과 확신은 오직 구주의 죽음과 중보에서만 얻을 수 있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높인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진정한 복음인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복음이며 우리 모두가 공통적(catholic)으로 가져야 할 신앙이다.


성경적으로 복음을 이해하기


오웬의 책이 출간된 이후, 삼위일체 여호와께서 구속 사역에 관해 그보다 더 나은 책을 계획하고 실행하신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 오웬의 작업을 연구하면서 앤드류 톰슨(Andrew Thomson)은 이렇게 말한다. “오웬이 다루는 주제의 막바지에 도달했을 때, 그 글을 거기까지 읽은 당신에게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주의해서 살펴보라. 오웬은 실로 그 주제와 관련해서 다룰 수 있는 모든 영역을 다 다뤘다.” 그건 정말로 사실이다. 텍스트에 대한 그의 해석은 확실하고, 그가 구축한 신학적 구성의 힘은 대단하다. 논의할 필요가 있는 그 어떤 것도 생략되지 않았으며(작가가 발견할 수 있는 한), 그가 다루지 않은 주제와 관련해서는 그의 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그 어떤 찬반에 관한 논의가 있은 적이 없다. 누군가가 개혁주의 신학자가 입장을 확립해야 하는 분명한 분야에서 논리의 도약 또는 비약을 행하고 있는 부분을 찾기 위해 그의 책을 읽는다면, 그 사람은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다. 그가 발견하게 될 것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견고하고 공을 들인 주석과 성경적 사고방식을 주의 깊게 따라가는 연구뿐일 것이다.


오웬의 작업은 복음의 핵심에 대한 건설적이고 광범위한 성경적 분석이며, 그렇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오웬의 주장이 결코 전통적 입장에 대한 특별한 탄원의 일부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제한 속죄가 구속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텍스트에 근거하고 있다는 오웬의 논증을 제대로 논박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제한 속죄 교리를 칼빈주의라는 논리가 만든 괴물이라고 일축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누구도 오웬을 제대로 반박한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지금 복음 회복을 주장하는 당신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이 우리 모두가 다 칼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이렇게 질문했었다.


이 질문이 문제를 삼는 건 아마도 단어가 아니라 사물일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상 역사적 칼빈주의가 이해하는 것처럼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안은 복음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현대 복음주의가 대체로 옛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말했고, 옛 복음에서 벗어나는 정도로 판단할 때, 새 복음은 우리 눈에 성경의 메시지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가진 신학적 화폐의 가치가 떨어졌다. 우리의 마음은 이제 십자가를 제대로 구속하지 못하는 십자가로, 그리스도를 제대로 구원하지 못하는 구세주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도움이 없이는 그 누구라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줄 수 없는 취약한 사랑으로 생각하도록 조정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구원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믿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의 복음을 믿거나 전파할 자유가 없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 인간이 힘을 합쳐야 가능한 시너지 효과의 수고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는 더 이상 복음을 믿을 수도 없다. 믿음과 불신앙이 책임 있는 행위가 되려면 반드시 그 둘은 독립적인 행위여야 한다는 알미니안의 생각에 우리는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 그러므로 구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갈보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믿음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자유는 우리 안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우리는 구원에 대해 당혹스러울 정도로 이중적인 생각을 하며,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다가, 또 다음 순간에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로 인한 정신적 혼란이 초래한 결과는 이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창시자이자 완성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박탈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알 때 얻을 수 있는 많은 위안까지도 나 자신으로부터 박탈하고 있다.


복음 전파와 관련해서, 잘못된 선입견은 우리로 하여금 의도한 것과 정반대로 말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선포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구원을 가능하게 하신 건 맞지만, 사실상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영화롭게 하기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음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자비의 영광이 이러한 사실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간다는 보편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전에 칭찬했던 모든 것을 평가 절하하게 되는데,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결국 뭔가를 추가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는 결정적 요인은 우리 자신의 믿음이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리고 그 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우리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허한 용두사미(anticlimax)의 결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사랑을 갖고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죽음을 죽으셨음을 확증하는 것으로 시작하면서도 보편주의자가 되는 것을 주저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처리했을 때, 우리가 했던 일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우리는 은혜와 십자가를 높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 가치를 깎아내렸다. 아니, 칼빈주의보다도 훨씬 더 과격하게 속죄의 한계를 제한했다. 칼빈주의는 그래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자체로 구원받도록 예정된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그 자체로는 아예 그 어떤 사람도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비록 하나님조차도 그들을 강제로 회개하고 믿도록 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 있는 능력이 그들 자신에게는 있다고 확신시켜 줌으로써 아첨했다. 아마도 우리는 그런 확신을 좀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신앙과 회개를 아주 하찮게 여겼을 것이다(“구원받는 건 아주 쉽습니다. 그냥 주님께 마음의 문만 열면 되요.…”).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효과적으로 부인했으며, 사람이 항상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종교의 기본 신념까지 훼손했다. 그 결과, 실로 많은 것을 잃었다. 오늘날 우리의 설교에서 경건함과 겸손이 사라진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스스로를 회심자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교만하고, 지식에 있어서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고 무엇보다 성경이 참된 회개의 열매로 간주하는 선한 일에 너무도 부족한 것은 그래서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웬의 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분야가 바로 이런 타락한 믿음과 이런 종류의 설교이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는 우리에게 성경의 복음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복음을 어떻게 전파하는 게 바른 방법인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첫 번째로, 그는 우리를 인도하여 진정으로 구원하시는 주권자, 구세주 앞에 엎드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대신 죽음으로 구원한 사람들은 반드시 모든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구속의 죽음이라는 진리 앞에서 그를 찬양하게 하실 것이다. 도르트 신조가 드러내는 방식으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 그러니까 중심에 복음이 위치하며, 그 한편에는 전적 타락과 조건 없는 은혜가,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거부할 수 없는 은혜와 최종 보존이 위치하고 있는, 그런 형태로 복음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결코 십자가의 완전한 의미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십자가의 완전한 의미는 속죄가 이 네 가지 진리로 정의될 때만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값없는 구원의 사랑을 주시기로 결정한 무력한 죄인들이라는, 일단의 무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들이 지은 모든 죄를 감당하며, 그들에 대한 부르심과 보존, 즉 현재와 미래의 최종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한다. 그것이 바로 갈보리의 의미이다. 십자가는 구원했다. 십자가는 지금도 구원한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이다. 카우퍼(Cowper)는 이렇게 노래했다.


죽어가는 어린 양, 당신의 보배로운 피
그 힘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대속한 모든 교회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구원받도록

이것은 신약 전체뿐 아니라 옛 복음의 기초가 되는 승리의 확신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웬이 우리에게 분명히 믿도록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오웬은 우리가 그의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성경적 복음을 전파하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 주장은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고 설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종종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신약의 복음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웬이 이 점에 관해서는 간략하고 부수적으로 다루지만, 그의 코멘트는 통찰로 가득하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각각의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셨고, 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각각을 다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고 회중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바로 이해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경우, 청중 모두가 다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되지만, 결코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죽음의 대상이 된다는 지식은 개인의 확신에 속하며, 그 본질상 구원의 믿음을 행사하는 것보다 앞설 수 없다. 따라서 이런 확신은 왜 믿어야 하는지에 관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믿었다는 사실에서 추론해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전적으로 모든 사람이 믿고 행동해야 하는 하나님의 진리로서 다음 네 가지 사실을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선포하는가의 문제이다.


1.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 심지어 최악의 죄인까지도 구원하는 완전한 구세주이다.
3. 아버지와 아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은 은혜를 받은 후 결코 쫓겨남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이 약속은 “(소수 또는 그 이상) 누구를 위한 것이든,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봉헌하는 것이 충분하다는 사실에 근거한 무오한 진리”이다.)
4.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와 믿음을 의무로 삼으셨다. “복음의 약속 안에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또 구원할 수 있는 만유의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향해 당신의 영혼이 다가가도록 하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그의 피의 소중함과 십자가 대속물의 충분함을 통하여, 또한 구원의 목적을 위해 값없이 자신을 바치심으로 모든 영혼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준비와 능력 그리고 의지를 통해 이제 구원받았다.”

설교자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왜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만으로 왜 구원이 충분한지, 그에게 진정으로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 안에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구세주가 되는지, 그리고 앞에 있는 청중들이 어떻게 이 진리를 스스로에게 적용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건 결코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지는 묻는 것도 아니고, 또 청중이 그 질문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누구를 특별히 구원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의도에 관해서 조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유익할 것임을 완전히 확신하는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을 행사한 후에는, “믿는 사람이 자기 안에서 그리고 자기를 향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를 발견함에 따라, 그리고 특히 나 자신을 위해 죽도록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나에 대한 하나님의 선의와 영원한 사랑을 보여주셨음을 확인함에 따라, 자신의 영혼을 확신시키는 책임은 각각의 신자에게 있다.” 그러나 이런 확신은 구원받기 전에 오는 게 아니다. 복음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의해 보증되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오웬이 정리해준 복음 전파의 의미’로 이어집니다.


 


원제: J. I. Packer’s Famous Essay on Christ’s Death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우리가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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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 I. Packer

 J. I. 패커(1926-2020)는 리젠트 대학(Regent College)의 신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스테디셀러 '하나님을 아는 지식' 등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2020년 7월 17일 소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