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미디어가 양극화 대신 설득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by Tim Keller2021-08-01

점점 더 세속화되는 사회에서 하나님과 믿음은 더 이상 정체성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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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크리스 베일(Chris Bail)의 ‘소셜 미디어 프리즘 깨기: 사회 플랫폼이 어떻게 해야 덜 양극화될까 (Breaking the Social Media Prism: How to Make Our Platforms Less Polarizing)’


최근에 나는 기자와 학계가 주도하는, 점점 더 심해지는 미국 문화의 양극화 현상에 관한 줌(zoom) 포럼에 참석했다. 포럼 중 한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민간 담론을 훼손하고 또 사회적 분열까지 조장하는 공개 포럼을 만들고 싶다면, 트위터 계정만큼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소셜 미디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거의 일 년 동안 일해 온 존경받는 여성 저널리스트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그들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셜 미디어엔 엄청난 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는 특히 젊은이들 정신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젠 아무리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소셜 미디어를 무시할 수 없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목적에 도움을 주는 책이 한 권 나왔는데, 듀크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 크리스 베일(Chris Bail)이 쓴 ‘소셜 미디어 프리즘 깨기: 사회의 플랫폼을 어떻게 해야 덜 양극화시킬까(Breaking the Social Media Prism: How to Make Our Platforms Less Polarizing)’이다. 이건 종교 서적이 아니라 사회 과학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또 소셜 미디어를 어떻게 소비하는 게 옳은지에 관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게다가 저자가 제시한 최종 원칙 중 많은 부분이 기독교 윤리와 실질적으로 일치한다.


다음은 그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다.


소셜미디어는 사상(ideas)이 아닌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양극화 문제에서 시작하여 소셜 미디어가 양극화에 어떻게 기여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짐으로 저자는 책을 시작한다. 양극화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알고리즘이 내가 원하는 진영의 뉴스와 의견만 계속 노출시킴으로 우리를 메아리실(echo chambers) 또는 거품 속에 가두고, 그 결과 점점 더 분열과 극단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일은 다른 연구 결과는 제시하는데, 오히려 반대되는 정치적, 문화적 견해에 매일 노출될 때 사람들이 자신의 기존 견해를 더 강하게 그리고 훨씬 더 극단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인 사람일수록 기존 견해를 전혀 조정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더 균형을 잡거나 온건해지지도 않았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에게 소셜 미디어는 자신을 더 잘 관리하고 지키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반대 견해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인식한다.


찰스 호튼 쿨리(Charles Horton Cooley)는 “다양한 나의 모습을 제시할 때 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나 자기에 관한 개념을 더 발전시키는 방법”에 관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쿨리는 인간에게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존감은 그다지 필요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진짜 중요한 자존감과 정체성은 사실상 다른 사람들이 내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해서 어떤 말을 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쿨리의 “거울을 보는 자아(looking-glass self)” 개념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실제로 매우 유사하다. 거울이 스스로 빛을 생성할 수 없고 반사만 하는 것처럼 우리는 외부의 검증이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검증할 수 없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님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국가를 얼마나 잘 섬겼는가에 따라서 정체성을 확보했다. 정체성과 관련해서 우리는 (1) 가족과 이웃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를 발견하고, (2) 우리의 행동에 대해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3) 그러한 기대에 따라 삶을 재정렬함으로써 매일 얼굴을 대하면서 사는 공동체가 인정하는 사회적 확인과 인정을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모바일, 개인주의, 치료 중심, 그리고 기술이 주도하는 문화에서 우리는 점점 더 직접 얼굴을 보며 소통하는 대면 공동체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세속화되는 사회에서 하나님과 믿음은 더 이상 정체성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의 관계는 얇아지고 정체성은 이제 더 취약해졌다. 비록 현대에 만연한 치료 문화가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권고하고 있고,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 자신에 관한 확신을 키우라고 하지만, 저명한 많은 사상가(대표적으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이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며, 우리는 사실상 환원 불가능한 수준의 관계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연약한 자아를 가진, 게다가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들이 어떻게 스스로에게 필요한 긍정을 찾을 수 있을까? 소셜 미디어는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에 관한 포스팅(presentation)을 통제하도록 하고(굳이 사람들과 매일 직접 대면할 필요가 없음), 전례 없는 규모와 속도로 포스팅에 대한 피드백을 받도록 하며(51쪽), 그런 다음 (가능한 한 큰 규모의) 내가 속한 커뮤니티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조율하도록 한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는 결코 사상 토론의 장이 아니다. 사상은 단지 자신을 정의하고 내가 속한 그룹에 신호를 보내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내가 반대하는 그룹과 관련지어 다른 사람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는 사람의 말을 가능한 한 가장 무자비한 의미로 해석하는 악의적 글 읽기 기술(the art of bad-faith readings)이 완성되는 것을 목격한다. 논증을 논증 자체로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려는 노력이 사라진다. 목표는 나와 생각이 다른 글쓴이를 어떻게 하든지 수치스러운 “외부 집단”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소셜 미디어에서 토론이 진행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이 방식이 가장 빈번하게 담론을 형성하는 소셜 미디어의 역동성이라는 베일의 진단에 나는 동의한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에서의 공개 토론은 새로운 사회의 등장과 함께 공백이 생긴 과거 사회의 역할인 정체성 형성, 지위 추구 및 사회적 유대라는 기능을 새롭게 담당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53쪽).


실질적인 결과


베일은 두 가지 실질적인 결과를 관찰한다.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를 조장하고 온건한 사람을 침묵시킨다. 좌파나 우파를 가리지 않고 정치적 또는 문화적 극단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증폭하고 강화하는 한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억누른다. 


1.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를 조장한다


베일은 ‘극단주의자’와 ‘온건주의자’를 객관적으로 정의한다. 사회학자는 미국 대중의 정치적, 문화적 관점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베일이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가 관찰하는 것은 숫자이다. 그가 극단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가장 보수적이거나 가장 진보적인 5-10퍼센트에 속한다. 


베일은 모든 트위터 사용자의 6%가 모든 트윗의 20%를, 그리고 국가 정치를 언급하는 모든 트윗의 70%를 생성하며, 이 6%가 주로 극단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76쪽). 이건 그리 놀라운 발견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책이 깨달음을 주는 중요한 지점은 인터넷에서 시끄럽고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많은 사람들에 관한 연구이다. 


첫 번째로, 그의 연구에 따르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n)이 “부패한 정체성”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 실제 생활에서 그들은 낙오자인 경우가 흔하다. 극단주의자들은 “종종 오프라인 생활(실제 생활)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많은 경우에 소외를 경험한다 (56쪽).


두 번째로, 그들이 온라인에서 보여주는 페르소나는 많은 경우에 오프라인 속 성격과는 많이 다르다. 온라인에서 그들은 훨씬 더 공격적이다(56쪽).


세 번째로, 그들은 일반적으로 (5-10%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극단주의자로 낙인 찍히는 것에 강하게 반대한다. 넓은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위치한 작은 극단주의자나 주변부로 간주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쾌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숫자를 과장할 뿐 아니라 다른 극단의 힘과 숫자도 같이 과장한다. 이 방법을 통해서 양 극단이라는 스펙트럼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대신 두 개의 군대가 싸우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중간에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소수의 겁쟁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극단주의자들은 자기네 진영에 속한 온건파에 대한 공격을 즐긴다. 온건파를 비원칙적인 타협자나 상대방의 은밀한 구성원으로 공격함으로써 그들은 문화를 양 극단 스펙트럼이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주류의 선과 악 사이의 다가오는 전투로 묘사한다. 그렇게 함으로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64-65쪽).


이처럼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자들이 현실과 전혀 다른 자아를 관리함으로, 심각하게 왜곡된 사회 이미지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베일은 소셜 미디어를 개인과 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왜곡하는 “프리즘”이라고 부른 것이다. 


2. 소셜 미디어는 온건한 사람들을 침묵시킨다


대다수가 가진 정치적, 문화적 견해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온건파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극단주의를 조장하는 것 외에도 소셜 미디어는 이런 온건파를 침묵시킨다. 어떻게 하는 걸까? 


첫 번째로, 온건파는 더 큰 성공과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훨씬 더 많은 대면 커뮤니티를 가진, 강력한 오프라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이다. 극단주의자들은 온라인에서만 지위와 소속감을 얻을 수 있지만, 온건주의자들은 굳이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말을 해서 자신의 경력이나 관계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를 행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극단주의자의 취약한 정체성은 인터넷에서 오히려 많은 부분 은폐되지만, 온건주의자의 정체성은 정반대로 위협받을 수 있다.


두 번째로, 소셜 미디어는 왜곡된 프리즘이기 때문에 온건파는 중간층이 사라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일은 오히려 “잘못된 양극화”(“자신과 다른 정당의 이념적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경향”)가 크게 증가했지만, 정치적 견해의 분포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통계적으로, 정치적 온건파(또는 “자유주의”와 “보수적” 견해를 혼합한 사람들)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세 번째로, 앞에서 살펴보았듯 온건파는 종종 엄청난 비판의 공격을 받는다. 자신이 선택한 정체성을 지지하는 정치적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극단주의자는 그들을 공격해야 한다. 중도파는 자신의 견해가 ‘악의적 글 읽기 기술’(가능한 한 최악의 방식으로 글을 해석하는 것)에 의해서 또는 자신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전혀 소유하지도 않는 사회적 위치나 정체성을 부여받음으로써 공격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정말로 백인 우월주의자 또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네요.” 또는 “지금 당신의 처지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등등이다. 


새로운 플랫폼 만들기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요약해보자. 첫 번째로,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를 주도하고 온건한 사람을 침묵시키기 때문에 결코 사상의 교환이 아닌 정체성 생성의 장소가 될 뿐이다. 두 번째로, 온라인 극단주의는 사회적 현실을 (극단적으로) 왜곡하고, 또한 온라인 페르소나는 종종 개인의 현실과 분리되기 때문에, “소셜 미디어 프리즘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을 왜곡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망상적인 형태의 자기 가치를 만든다”(66쪽).


오늘날 소셜 미디어가 광장 모임, 마을 모임, 신문, 그리고 인쇄 출판을 대체하는, 말 그대로 사상 교환과 토론을 위한 새로운 장소로 부상하기에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소셜 미디어 속에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건 언론계과 학계도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같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가장 강력한 문화의 문지기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인과 학자조차도 여러 연구를 통해 드러나는 소셜 미디어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소셜 미디어가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마지막 두 장에서 베일은 소셜 미디어가 단순히 붕괴되고 그 자리를 더 건강한 무언가가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그러면서 그는 소셜 미디어를 욕하는 사람들이 결국 다시 소셜 미디어로 돌아가는 빈도를 보여준다.


베일이 제시하는 것은 대안이다. 정체성이 아닌 아이디어가 실제로 토론될 수 있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잠정적인 아이디어이다(9장, “더 나은 소셜 미디어” 참조). 그의 아이디어에는 많은 장점이 있으며 우리는 베일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응원해야 한다. 기본 취지는 다음과 같다. “좋아요”를 없애고 대신 해당 포스트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도 소구하는(appealing) 가치를 계산하는, 그래서 그 가치가 큰 포스트에는 더 큰 보상이 따라가는 식의 미터기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 진영의 사람이 해당 포스팅에 동의하는 수준을 표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플랫폼이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양측이 모두 다 공정하고 합리적이라고 믿는 게시물에 대해 보상과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그의 제안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소셜 미디어의 왜곡에 영향받지 않으면서 종교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견해를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가능할 거 같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 해킹하기


8장에서 베일은 소셜 미디어에서 발견하는, 양극화라기보다는 설득을 향한 움직임이라고 믿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내가 확인하기에 다섯 개는 성경에서 스쳐 지나가면서도 내가 주목했던 사실들과 기이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1. 길게 그리고 집중해서 들어라


야고보서 1장 19절을 보자.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즉각적으로 토론에 참여하지 말라. 팔로우하고 잠시 들으라.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가장 잘 구성된 것을 보려고 최선을 다하고 그들이 말하는 내용에서 가치 있는 것을 찾도록 하라.


2. 그들이 쓰는 단어와 권위를 활용하라


사도행전 17장 23절과 28절을 참조하라. 사도행전 17장에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자들에게 연설하는 바울이 인용하는 사상가는 다름 아니라 그들이 따르는 에피메니데스와 아라투스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복음서 저자 또한 헬라 철학 용어인 로고스를 사용한다.


3. 비판할 때에도 그들이 가진 세계관에서 동의할 부분은 동의하라 


사도행전 17장 29절과 고린도전서1장 22~24절을 참고하라. “당신이 설득하려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상대도 공감하는”(110쪽) 논쟁을 진행하라. “나는 옳고 너는 다 틀렸어”라고 말하기보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좋아요. 근데 이런 것도 믿는다고요? 말이 되는 거 같네요.”라고 말하라. 바울이 사도행전 17장 29절에서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하라. “너희 철학자들의 말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가 만든 우상의 경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가 유대인과 그리스인 모두에게 복음을 어떻게 제시했는지도 살펴보라. 그들의 문화적 목표를 확인하고, 또 그들이 추구하는 우상 숭배 방식에 도전하고, 그리고 나서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내면이 가진 가장 깊은 문화적 열망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꿨다. 


4. 자기 자신에게 비판적이어야 한다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말한다. 당신이나 당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집단의 모든 주장과 행동을 다 옹호하지 말라.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라.


5. 사상과 정체성 사이의 고리를 느슨하게 유지하라


디모데후서 2장 24~26절을 참조하라. 당신과 다른 생각이 당신이란 존재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상을 정체성에 포함시키지 말라. 우리는 지금 소셜 미디어 프리즘으로 정체성을 위조함으로써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라는 성경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행위에 기초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가 값없이 준 선물이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때문에 화를 내지도 또 위축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스스로가 내린 자기 평가에 근거했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고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서 전체 참조).


바울(예수님 포함)도 반대자를 향해 날카롭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건 결코 화가 나서도 또는 위협받는 정체성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종종 소셜 미디어의 집단(tribes) 의식에 빠져 왜곡된 프리즘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조금도 분노나 불쾌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에게 그들의 필요를 근거로 얼마든지 엄격하고 날카롭게 때로는 부드럽게 말하도록 돕는, 굳건한 정체성과 자존감을 제공하는 자원이 있다.


특별한 사랑


기독교인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특별한 사랑을 통해서 이 세상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오셨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요 17;1; 요한일서). 그러나 소셜 미디어라는 매체를 통해 예수님을 드러내는 특별한 사랑을 보여줌으로 세상과 전혀 다른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우리 기독교인이 지금 처한 처지가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도 일부 기독교인이라도 인터넷에서 그들의 사랑 때문에 유명해질 수는 없을까?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믿음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동시에 신중하고 겸손하게 비평가의 말을 듣는 공개 담론이 가능한 새로운 공간까지 재건하는 데에 과연 참여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다. 그럼 거기에 당신도 포함될까? 




원제: Can Social Media Foster Persuasion (Not Polarizatio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를 주도하고 온건한 사람을 침묵시키기 때문에 결코 사상의 교환이 아닌 정체성 생성의 장소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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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m Keller

팀 켈러(1950-2023)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로 섬겼다. City to City와 Faith & Work, The Gospel Coalition을 설립하여 교회 개척, 복음 갱신, 복음 연합에 큰 역할을 했으며,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과 수많은 컨퍼런스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복음적 변증가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