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는 대계명과 게임 체인저들
by 김형익2021-08-10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와 교제, 기도와 봉사, 구제와 선교보다 더 중요하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대계명의 우선순위를 흔들거나 그 무게를 경감하거나 그 농도를 희석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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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게임 체인저(the Game Changer)’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나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그 다음 이야기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한 서기관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대답하셨다(막 12:28-31). 이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마태복음의 병행본문에서(마 22:34-40), 주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달려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 물었던 서기관은 예수님의 대답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것을 자신의 대답에서 보여주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로군요!(막 12:33)” 누가복음의 병행본문은(눅 10:25-28) 주님께서 부연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들려준다(눅 10:29-37). 이 비유에서 주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표면상의 이유는 분명하다. 제사를 위해서였거나 의식법적으로 정결함을 유지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제사법과 정결법을 위해 대계명을 희생했다는 점에서 틀렸다는 점을 보여주셨다. 이런 일은 지금도 적잖이 일어나고 얼마든지 우리들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와 교제, 기도와 봉사, 구제와 선교보다 더 중요하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대계명의 우선순위를 흔들거나 그 무게를 경감하거나 그 농도를 희석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취와 성공을 추구하면서 경쟁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은 너무나 도전적이며 결코 녹록한 계명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분리시킴으로써 대계명의 부담을 덜어 보려는 시도를 하려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선택사항이고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주님은 이 둘을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마 22:39).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나뉠 수 없다.


세상은 우리에게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는 말도 듣는다. 좋은 대학, 높은 연봉과 평생 보장 직장, 멋진 결혼과 안정적인 가정, 그리고 안락하고 넓은 집, 좋은 차, 조기 은퇴와 멋진 은퇴 계획은 이 세상의 게임에서 포기할 수 없는, 모두가 선망하는 중요한 가치들이다. 이것을 얼마나 성취하느냐가 인생의 승패를 결정한다. 이것을 위해서 모든 가치를 희생하고 달려간다. 영혼 마저도! 이것이 세상의 게임의 법칙이다.


내가 너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일까? 사실, 세상은 이것보다 더 터프(tough)하고 험악하다. “실제로는 영화보다 더 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제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신자도, 이 세상의 게임이 진행되고 있는 그라운드에서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신자들이 더 이상 이 세상의 게임이 아니라 새로운 게임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말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되 더 많이 사랑하는 게임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신자들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이 소명을 부여받는다. 하늘에서가 아니라,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동안에,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을 따라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한 게임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누가복음 6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눅 6:27-37).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만일 신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세상 죄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누가복음 6:38).” 이것은 좀 더 디테일한 새로운 게임의 법칙이다. 우리가 취사선택하거나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의 말씀이다. 당신은 주님의 이 말씀을 알고 기억하는가? 주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신자인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자세히 말씀하신다.


그러나 문제는, 이 땅에서 신자들이 여전히 경쟁과 승리의 게임에 몰두한다는 사실에 있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드리고 예배와 봉사에 열심을 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서기관의 대답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영신학은, 여전히 세상의 게임에 몰두하며, 그 게임의 법칙을 따라 사는 신자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며 그들의 사욕을 채워준다.


신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매 주일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세상의 게임을 하며 살아갈 유혹을 직면하는 성도들에게 매주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거룩한 소명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게 편지를 쓸 때, 이렇게 로마의 성도들에게 거룩한 소명을 일깨워주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사도 요한은 어떻게 그 일을 했는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한1서 3:16–17).”


매주일, 복음의 말씀으로 일깨움을 받는 신자가 이 세상의 게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새로운 게임을 하기 위해, 점검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덜 고생하고 좀 더 편하고 좀 더 안락하게 살겠다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이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거나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이 기준이 작동하는 한, 신자의 소명은 관념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이 기준이 뭐가 문제인데?”라고 반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이 기준이 진짜 숨어있는 문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을 따라 살도록 새로운 게임으로 부름을 받은 신자들이 그 소명을 이루고 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문제가 여기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삶을 눈여겨보았는가? 그들이 조국을 떠나 하나님이 부르신 땅, 그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소명을 위해 덜 고생하고 더 편하고 더 안락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부르신 소명을 따라 살겠다고 한 순간, 그런 기준들은 힘을 잃고 만다. 덜 고생하고 더 편하고 더 안락하게 살겠다는 기준을 포기하지 않은 선교사가 있다면 당신은 그를 존경하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신자가 모두 해외선교사로 부름을 받지는 않지만, 신자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대계명과 모든 말씀에 비추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소명은 이전의 세상의 게임을 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포기할 수 없는 암묵적 기준, 덜 고생하고 더 편하고 더 안락하게 살겠다는 기준을 내려놓게 만든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소명을 따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게임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신자는 이 세상의 게임 체인저로 오셨던 주님을 따라 세상의 게임 체인저들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번영신학은, 여전히 세상의 게임에 몰두하며, 그 게임의 법칙을 따라 사는 신자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며 그들의 사욕을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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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