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나님 앞에서 ‘막아선 자’가 될 것인가?
by Don Carson2021-10-16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죄 많은 백성을 대신하여 막아서는 중재자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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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겔 22:30)


내게는 소위 말하는 “인생 구절” 또는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따로 없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구절을 통해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내게 그런 구절이 없다는 건, 내 기억력의 지속 기간이 매우 짧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는 단지 내게 독보적인 영향을 끼친 딱 한 구절을 꼽는 것 보다 내 삶에 지극히 큰 영향을 끼친 백 개(또는 천 개)의 구절을 나열하는 게 더 쉽고 자연스러운 사람일 뿐이다. 


삶에 영향을 끼친 구절들은 종종 인생의 어떤 명확한 시기에 맞춰 내게 찾아왔고, 결과적으로 그 구절은 하나같이 어떤 특별한 명료함과 능력으로 내게 “선포(spoken)”되었다. 예를 들어, 최근 몇 년 동안 복음에 적대적인 환경에서 전도설교를 할 때 나는 시편 36편 1절을 자주 숙고하곤 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신학교 학생 시절부터, 나는 요한계시록 19장 6-7절을 자주 묵상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1-24절도 다른 수백만 명의 다른 신자들처럼 내게 소중한 말씀이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그러나 내가 사역자로 부름받는 데에 있어서는 특별히 구절 하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때 더 헌신할 걸, 하고 후회하지는 않을까? 


맥길 대학(McGill University)에서 화학을 전공할 때 나는 행복했다. 몇 달 동안, 나는 오타와에 위치한 캐나다 연방 정부가 운영하는 화학 실험실에서 대기 오염에 초점을 맞춘 연구에 몰두했다. 나는 정말로 내 삶과 연구, 두 가지를 다 완벽하게 즐기고 있었다.


연구를 하면서도 동시에 나는 주말이면 교회를 개척하는 친구를 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풀타임 사역자로 가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주일 학교에서 배운 찬양의 후렴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아름다운 얼굴, 가시에 그늘진 얼굴,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에게 더 헌신했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오십 년 전인 그때에도 나는 어떤 사람은 화학자로, 또 어떤 사람은 교사로, 또는 폐기물 관리 종사자 등으로 부름받는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그 찬양의 후렴구를 마음에서 지울 수 없었고, “더”라는 부사가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고 있다는 느낌 또한 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막아선 자(Standing in the Gap)


그해 9월, 주일 저녁 몬트리올에 있는 고향 교회에서 나는 아이티 선교사인 리차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이 에스겔 22장 30절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들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리고 그때 나의 전 존재가 이 말씀을 향해서 외치고 있었다. “여기 내가 있습니다! 나를, 나를 보내십시오!”(사 6:8 참조) 이사야서 6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나를 보내달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은 통회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만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도 오만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앞에서 “막아서는” 사람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는 에스겔 22장에 기초한 그 설교는 바로 그 해에 나로 하여금 화학을 떠나 풀타임 사역자가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완성한 퍼즐의 한 조각이 되었다.


이 구절이 어떻게 내게 적용되었는가? 


나는 성경을 읽는 집에서 자랐다. 게다가 우리 형제들은 일찍부터 무엇보다 말씀의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배웠다. 따라서 내가 에스겔 22장 30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을 때,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지금 기원전 6세기 유대 땅에 진노를 퍼붓겠다고 하시는 것이지 결코 1960년대에 죄 많은 캐나다인들을 진멸하시겠다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막아서면서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 나는 묵시적으로 비유를 통한 논증을 전개했다. 하나님이 2500여 년 전에 그의 죄 많은 백성을 대신하여 중재할 사람을 찾으셨지만 아무도 찾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죄 많은 백성을 대신하여 막아서는 중재자를 찾고 있다고 말이다. 


이번에도 아무도 못 찾는 게 아닐까? 이 질문은 내게 실로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젊은 시절에도 그 구절에서 강력한 능력을 보았었고, 그 점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기도를 통해 막아서기 


여러 해 동안 성경을 읽다 보니, 더 많은 성경적 세부 사항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20년 후, 나는 에스겔 22장 30절 및 관련 구절을 주석하는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들었다. 이 설교 역시 주일 저녁 예배 중에 일어났는데,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한 교회에서였다. 설교자는 네덜란드 출신의 테오 도너(Theo Donner)였다.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 아내와 함께 선교사가 되어 콜롬비아 메델린으로 갔고, 그 이후로 그들은 탁월한 사역을 펼쳤다. 내가 지금 언급하는 설교는 그가 케임브리지에서 정기적으로 머무는 동안 한 것이다. 


그가 본문에서 끌어낸 모든 요점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나로 하여금 몇 개의 관련 구절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 사실만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언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유대 민족이 다른 이방 민족처럼 왕을 원했던 자신들의 죄를 사무엘에게 고백했을 때, 사무엘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2-23).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는 사무엘이 받은 부르심의 일부였다.


다른 한편으로, 아모스서에서는 에스겔서 말씀과 관련한 또 다른 역동성이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실 때 아모스는 이렇게 중보했다.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암 7:5). 성경 본문은 계속된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암 7:6).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암 7:8). 중보기도가 가능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곳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사울을 버리신 후에 사무엘이 사울 때문에 슬퍼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을 본다(삼상 16:1). 다시 말해서, 에스겔 22장 30절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또는 금하신) 기도를 통해 그가 당신의 백성의 삶을 어떻게 주관하고 계시는지 잘 묘사하는 구절인 것이다. 섭리의 신비를 묵상하는 데 끌리는 사람들에게 에스겔 22장 및 그 평행 구절에는 실로 너무도 깊은 내용이 숨겨져 있다. 


어둠 속에서 막아서기


다음으로, 에스겔 22장 30절의 앞 절을 보면, 당시에 백성의 죄와 허물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알 수 있다.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선지자들의 반역함이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를 그 가운데에 많게 하였으며 …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 그 고관들은 음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 …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였으며 …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겔 22:25-29). 

이런 상황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내리게 된 맥락이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선지자, 제사장, 왕, 사도, 그리고 복음 전도자를 찾아 세우신다는 성경 구절은 적지 않다. 그러나 에스겔 22장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하나님의 길을 막는 중보자를 찾고 계신다(출애굽기 32-34장에서 만나는 모세와 다르지 않다).


에스겔서가 기록된 당시뿐 아니라, 그 때 내 삶의 맥락에서 이해한 이 구절을 통해 나는 하나님이 내 삶에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훨씬 더 신중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 하나님 앞에 막아서야 할 필요성은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6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시급하다. 



원제: Who Will ‘Stand in the Gap’?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누군가 하나님 앞에서 막아서야 할 필요성은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6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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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on Carson

돈 카슨은 캐나다 토론토 Central Baptist Seminary에서 석사학위(MDiv)와 영국 Cambridge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PhD)를 취득하고, 일이노이주 디어필드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의 신약학 명예교수로 섬겼다. 팀 켈러와 함께 TGC를 설립하고 2019년까지 대표로 섬겼다. The Enduring Authority of the Christian Scriptures를 비롯하여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