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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권위를 포기하게 만드는 교묘한 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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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Don Carson /  작성일 202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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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구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권위와 관련해 여러 가지 명백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단지 위협이 명백하다는 사실만으로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눈에 띄지 않게 다가오는 교묘한 위협이 회의론을 조장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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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오늘날 서구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권위와 관련해 여러 가지 명백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단지 위협이 명백하다는 사실만으로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눈에 띄지 않게 다가오는 교묘한 위협이 회의론을 조장한다는 사실이다. TGC 전 대표인 돈 카슨(Don Carson)은 데멜리오스(Themelios)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포기하게 만드는 교묘한 수법 열 가지를 설명한다. 다음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그의 에세이 발췌 내용이다.  

선택적 증거에만 의존하는 위험성에 관해


선택적 증거에만 호소함으로 말씀의 권위가 약해지는 표류의 가장 심각한 형태는 건강, 부, 번영의 복음을 의미하는 HWPG(Health, Wealth, Prosperity Gospel) 설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번영을 주신다는 구절과 왕의 자녀가 되는 사실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구절을 서로 연결하라. 그러면 확실한 이론(case)이 하나 만들어진다. 거기에도 조건이 하나 따라온다. 우리가 앞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내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 아니 그런 고난이 사실상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이라는 등의 생각은 깨끗하게 머리에서 지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말씀 왜곡은 너무나 자명하기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조금도 어렵지 않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교묘한 것이다. 교회 내 논쟁을 피하려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는 언급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기 싫다는 이유로 뜨거운 주제(빈곤, 인종차별, 동성애 결혼, 남녀 차별)에 관해서 진통제(anodyne) 치료법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런 골치 아픈 문제들이 알아서 사라지겠지라는 비참한 희망을 붙들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슬프다. 아무리 어려운 주제라고 해도 우리가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올바른 사고체계를 갖추려고 하지 않는다면, 교인의 대부분이 결국에는 세상 문화가 만들어주는 사고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가장 좋은 해독제는 체계적인 강해 설교이다. 왜냐면 강해 설교는 텍스트가 말하는 그대로 설교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주제 설교는 얼마든지 어려운 텍스트를 피해 갈 수 있다. 물론 문화적으로 맹목적 시각에 빠진 사람들은 바른 설교를 하는 설교자를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다. 


난처한 구절과 주제의 회피에 관해


설교자가 이따금 특정 주제를 피하는 이유는 주제가 주는 어느 정도의 난처함 때문이다. 당혹감을 느낀다는 것은 설교자가 스스로 보기에도 설교를 통해 선포할 만큼 특정 주제(예를 들어 종말론이나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주제)를 충분히 연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낸다. 또는 주제 자체에 느끼는 일반적인 불편함(예를 들어 예정론) 때문에, 교인들이 너무도 싫어하는 주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또는 성경에 반복해서 등장하나 설교자 자신이 정말로 싫어하는 주제라서(예를 들어 지옥과 영원한 심판) 그럴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추한 형태의 말은 이런 것이다. “오늘 아침 우리는 누가복음 16장 19절부터 31절의 말씀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이 본문도 예수님의 생애를 공부하다 보면 만나는 다른 많은 구절과 마찬가지로 꽤 충격적인 방식으로 지옥을 묘사하는데요. 솔직히 저는 이 구절에 관한 설교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구절은 무엇보다 저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이런 구절을 완전히 무시하고 설교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엄연히 성경에 있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설교자가 공식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설교자는 사실상 자신을 예수님보다 더 동정심 많고 민감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사악한 것 이상으로 기만적인 이러한 태도는 실제로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비정통적인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성경 남용에 관해


최근에 존더반 출판사는 ‘동성애, 성경 그리고 교회에 대한 두 가지 견해(Two Views on Homosexuality, the Bible, and the Church)’를 출간했다. 이 책은 두 가지 견해를 각각 “지지(affirming)”와 “지지하지 않음(non-affirming)”으로 구분하고, 두 명의 저자가 양쪽의 견해를 대변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양쪽 다 말로는 “성경을 근거로” 논쟁을 벌인다고 한다. 한때 “지지” 쪽의 견해조차 신앙고백적 복음주의자가 견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왔던 반면,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지지하지 않는 견해뿐만 아니라 지지하는 쪽의 견해도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일종의 대안적 복음주의 입장이다. 그러니까 같은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성경이 동성애 결혼을 금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이 동성애 결혼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내용을 읽는 독자라면 천년왕국, 선택, 지옥, 세례 등의 주제와 관련해서 세 가지 견해 또는 네 가지 견해를 표방한 책이 시중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동성애에 관한 이 새 책도 다르지 않다.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지적할 필요가 있다. 


(a) 이런 부류의 책이 채택하는 형식, 그러니까 “y에 대한 x의 견해(입장)”에는 본질적으로 함정(slippery)이 있다. 학생들이 단 한 권으로 복잡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접하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되겠지만, 각각의 견해가 다 “성경에 근거해서” 논의되기 때문에 마치 모든 견해가 다 동등하게 “성경적”이라는 잘못된 시각을 전달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도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들이 “성경을 근거로” 펼치는 주해가 매우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전혀 망설이지 않는다. “y에 대한 x의 견해”라는 형식은 이런 측면에서 본문을 바탕으로 정당한 해설을 힘들게 만들고, 그 결과 각각의 견해가 마치 이론적(성경적)으로 볼 때는 모두 다 동등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양 세례를 베푸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y에 대한 x의 견해”는 어떤 측면에서는 유용하지만 다소 조작적이다. 내가 언젠가 다른 곳에서 주장한 것처럼 논쟁이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해서 모든 논쟁거리가 다 제대로 논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b)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y에 대한 x의 견해” 형식의 책이 어느 정도까지는 묵시적 신앙 고백의 틀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인지에 대한 세 가지 견해’ 같은 책은 (아직까지는!) 출판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도 철학적 자연주의에 심취한 자유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고백적 기독교인을 모두 다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제목의 책이 출판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약에 이 책이 출간된다면 그건 신앙 서적이 아니라 ‘비교 종교’에 관한 책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크다. “y에 대한 x의 견해” 같이 분류되는 책은 대부분 주제인 y에 해당하는 구성요소를 현재까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허용하는 주제로만 제한하고 있다. 이 목록을 확장하여 십 년 전에는 그 어떤 복음주의자도 허용하지 않았을 주제(예를 들어 예수의 신성 부정 또는 동성애 행위의 합법성)를 오늘날 다양하게 포함한 이유는 성경이 언급된 주제에 관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함으로 복음주의의 경계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하고 재정의하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규범적 규범(“룰을 지배하는 룰” norma normans)으로서 성경의 목소리가 이론적으로는 여전히 온전하지만, 실제로는 미묘하게 축소되었다.


동성애 결혼에 대해 “지지” 견해를 취하는 것이 구원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을 복음주의 진영 밖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분명한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에세이 ‘성 윤리에 대한 복음주의적 접근(An Evangelical Approach to Sexual Ethics)’에서 스티브 홈즈(Steven Holmes)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오직 믿음(Sola Fide), 나는 거기에 서 있어야 한다. 내가 걷는 곳과 우리 모두가 걷는 곳에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온 세상을 위하여 단번에 드리신 완전한 제사이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새롭게 하시는 보혈이다. 그리고 그 구원이 나를 포함한 것이라면 나의 모든 실패와 혼란 속에서도 구원은 유효하다. 또한 동성 결혼을 긍정하는 나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이 겪는 모든 실패와 혼란 속에서도 구원은 역사한다. 신실하고 믿음이 확고한 내 친구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없다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솔라 피데를 외치는 복음주의 주장의 남용이다. 나는 구원이 믿음을 고백하는 것 이외에 이성애를 긍정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을 만난 적이 없다. 오직 믿음만이 은혜를 전유하는 수단이다. 그 은혜는 너무나 강력하여 인간을 변화시킨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은 왕이신 예수의 주권 아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9절부터 11절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바울 사상의 맥락에서 볼 때 그가 주장하는 것은 죄 없는 완전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보혈로 씻음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그러한 죄(탐욕이나 간음, 동성애 행위 또는 그 무엇이든)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죄가 그들을 정의하고 특징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솔라 피데를 외침으로 구원이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얻는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확증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함이 구원의 산물이지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죄라고 선언하신 것, 그 죄를 짓는 자는 왕국에서 배제된다고 하는 죄도 그게 죄가 아니라고(non-sinfulness) 주장하며, 솔라 피데가 어차피 다 구원할 거니까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성경은 홈즈가 말했듯이 “실패와 혼란”에 빠져 미끄러진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말하지만, 구원을 받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안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는 자신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은 항상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동반한다. 


너무 부족한 독서가 초래하는 실패, 특히 오래된 작품의 경우에 관해


책을 너무 읽지 않는 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경의 권위를 방해하는 경향으로 흘러가는 데에 일조한다…. 너무 적은 양의 독서, 특히 오래된 고전을 멀리하게 되면 현재 유행하는 의제에만 열광하게 되고, 그 결과 단순한 유행을 과도하게 흡수할 뿐 아니라 거기에 도취하기 쉽다. 


물론 정반대가 초래하는 실패도 있다. 적지 않은 목회자가 청교도 작품에는 심취하면서 현대 작품을 읽는 데는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쓰는 언어, 사고 체계, 예화 또는 주제를 들으면 거의 4세기 전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이건 여기서 언급할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은 고전, 특히 주석과 탁월한 신학 작품을 읽지 않는 게 훨씬 더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작품만 읽을 때 생기는 문제는 누구나 다 비슷한 소리를 하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나 설교가 저속한 수준(kitsch)으로 떨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주 유창하게 자기 정체성, 환경 문제, 관용의 중요성,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그러나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음) 그리고 성경이 우리의 고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등에 관해서 이야기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재정 관리와 이혼 후 회복에 관한 세미나도 진행한다. 나는 성경이 이런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주제는 결코 성경의 핵심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굳이 세 명의 요한(존)만을 선택해서, 요한 크리소스토모(John Chrysostom), 존 칼빈(John Calvin), 존 플라벨(John Flavel), 이 세 사람의 작품을 더 많이 읽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주제에 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자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죄의 무서움, 복음의 본질, 복되신 삼위일체, 진리, 제자도, 기독교인들이 고난 당할 것이라는 성경의 주장, 잘 죽는 법, 새 하늘과 새 왕국에 대한 소망, 새 언약의 영광, 순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주권자이시며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 회개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믿음의 의미, 인내와 오래 참음의 중요성, 거룩한 아름다움과 지역 교회의 중요성 등등. 다른 세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이 성경에서 발견했던 이런 중요한 주제를 무시하면서, 과연 우리가 성경이 우리 삶과 사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느껴야 할 경외감에 관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떨어야 하는 인간의 능력을 약화하는 요소는 수도 없이 많다. 그 모두에게서 발견하는 공통점은 오만(arrogance)이다. 오만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할 자녀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태도,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또 읽고 다시 읽고 묵상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대신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데이터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상상까지도 늪에 빠뜨린다. 이런 도덕적 타락은 우리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한다. 음란물에 빠져 있거나 성행위를 조장하는 사람들, 또는 심한 경쟁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말씀 앞에서 경외감에 떠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의 무자비한 행동은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성경의 실제적인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는 지적인 의심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때까지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줄어들 것이다. 물론 주님을 향한 두려움의 한 부분은 말씀 앞에서 떠는 경외감이다. 


‘오만한 무지의 기술’에 관해


“오만한 무지”는 이런저런 주제와 관련한 성경 구절이 주석적으로 혼란스럽고 불분명하기에 우리 인간은 결코 해당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만하다…. 이 오만한 무지의 기술이 오늘날 알려지지 않았거나 실행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거쉬(David Gushee)는 최근에 낸 책과 기사에서 동성애 결혼은 우리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수준으로(agree to disagree), 그러니까 예전에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불렀던 ‘무관심한 주제’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보수”와 “진보”가 동성애 문제를 비롯한 몇 가지 다른 문제와 관련해서 불행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예측한다. 그건 그들이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평하게 말해서, 성적 취향이 과연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질문에 덧붙여, 동성애에 대한 성경과 전통의 통일된 목소리는 결코 진보주의 기독교인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특히 도널들 포트슨(S. Donald Fortson III)과 롤린 그람스(Rollin G. Grams)가 쓴 ‘변하지 않는 증인: 성경과 전통 속에 드러난 동성애에 관한 기독교의 일관된 가르침(Unchanged Witness: The Consistent Christian Teaching on Homosexuality in Bible and Tradition)’을 참고하라. 트레빈 왁스(Trevin Wax)가 지적했듯이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과 행동 자체를 혁신하여 분열을 시작하는 “진보주의자”가 도리어 “보수주의자”를 향해서 타협하지 않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분열을 조장한다며 비난하고 있는 형국이다. 


젠(Jen)과 브랜든 해트메이커(Brandon Hatmaker, 역자 주: 제니퍼 해트메이커와 브랜든 헤트메이커는 미국 텍사스에서 ‘오스틴 새 교회’를 개척했다. 여러 방송 출연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으며, 다섯 자녀를 둔 부부인데, 2020년 이혼했다)의 주장에서도 다소 유사한 패턴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의 게시물 대부분은 선하고 동정심이 많으며 고통과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할 만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최근 들어 일부일처제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의견(move)이 내 눈길을 끌었다. 많은 시간을 들여 그 주제를 연구한 결과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일부일처제일 경우 성경은 동성애 행위를 명백히 금지하지 않는다, 성경이 금지하는 것은 단지 난잡한 행위(이성애자이든 동성애자이든), 강간 및 기타 심각한 범죄에만 한정되어 있다. 해트메이커 부부는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많은 고통을 목격하고 스스로 “깊은 공부와 기도의 시간”을 보낸 후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해명서를 통해서 주장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동성 결혼이라고 해도 평생 일부일처로 산다면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을 말하는 모든 성경 말씀을 조금도 위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이라는 기이한 표현은 별개로 하더라도, 브랜든의 에세이는 윤리학자 데이비드 거쉬를 지나치게 찬양한다. 게다가 그 에세이는 요한복음 13장 34절부터 35절(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명령한 새 계명)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는다.


브랜든의 글에 관한 중요한 반응 중에서 세 개를 골랐다. 


(a) 로자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는 자신의 놀라운 회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독자들에게 진실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조언한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서 다가올 심판을 경고하는, 그런 식의 ‘사랑’은 쉽게 감상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b)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스타일로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짧지만 단호하게 “해트메이커식 해석학”이라고 부르며 맞섰다. 그가 피력한 요점 중 하나를 꼽자면 다음의 내용이다. 


해트메이커의 해석학에 따르면 일부일처제와 음행에 반대하는 논리가 어떻게 서로 연결된다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섹스와 결혼에 관한 정통 기독교 가르침을 완전히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러나 취약한 해석학은 결코 전통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 자, 생식 능력(말 2:15), 남성과 여성의 적합성(창 2:18), 또는 두 개의 상보적인 성이 합쳐져서 하나의 유기적인 결합이 된다(창 2:23-24)는 점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라면, 결혼이 왜 꼭 두 사람으로 제한되어야 하는 건지, 왜 꼭 서로에게 정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파트너 두 사람이 모두 다 서로를 향한 정절을 원한다는 데 동의할 수 있겠지만, 성적 정절이 필수라고 주장하는 결혼의 존재론과 목적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해트메이커가 주장하는 결혼의 모습 속에서 더 이상 정절의 가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혼외 성관계가 왜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해트메이커가 다룬 구절들은 아마도 억압적인 상황만을 다루었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일단 어린이를 향한 생물학적 성적 지향만 제거하고 나면, 도대체 어떤 내부 논리에 근거해서 성인 간의 합의된 성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라면 생물학적 형제자매가 결혼하는 것을 도대체 어떤 기준에 근거해서 비난할 수 있다는 말인가(유전적 기형아 출생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피임약까지 사용한다면)? 결혼에 동성을 포함하도록 재정의하는 순간, 결혼이라는 제도를 확장하여 지금보다 더 포용적으로 만든다고 착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결혼을 결혼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이다. 


(c) 마지막으로 케빈 드영이 2016년 4월 13일 T4G에서 독창적인 스타일로 발표한 “포괄적인 시대의 경계 그리기: 일부 교리는 다른 교리보다 더 근본적인가? 우리는 그 차이를 어떻게 구분하는가(Drawing Boundaries in an Inclusive Age: Are Some Doctrines More Fundamental Than Others and How Do We Know What They Are?)”에서 한 말을 소개하겠다. 


우리 시대에 이 섹슈얼리티 문제보다 “오만한 무지의 기술”이 더 강력하게 호소하는 곳을 도무지 찾을 길이 없기에 나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 다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 성도들이 삶에서 전심으로 성경에 복종하려고 할 때 이 섹슈얼리티 문제만큼 그들을 성경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유혹하는 주제도 없을 것이다. 




원제: How to Subtly Abandon Your Bible’s Authority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동시대 작품만 읽을 때 생기는 문제는 누구나 다 비슷한 소리를 하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나 설교가 저속한 수준(kitsch)으로 떨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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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on Carson

돈 카슨은 캐나다 토론토 Central Baptist Seminary에서 석사학위(MDiv)와 영국 Cambridge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PhD)를 취득하고, 일이노이주 디어필드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의 신약학 명예교수로 섬겼다. 팀 켈러와 함께 TGC를 설립하고 2019년까지 대표로 섬겼다. The Enduring Authority of the Christian Scrip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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