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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인류 전체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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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Michael Reeves /  작성일 202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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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 Jordaens의 Adam and Eve(1640년, National Museum in Warsaw)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인간의 머리로 아담을 보지 않는 경우,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개인의 운명은 개인이 결정한다는 식의 해석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개인적 결정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기 보다는 단지 닮아야 할 모범으로 보려는 경향도 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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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게재된 아티클 '아담이 첫 사람이라는 게 정말로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인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인류의 선조라는 아담의 대표성(Headship) 


인류와 아담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항상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의 오래된 논쟁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펠라기우스는 아담과 인류 사이의 물리적 연결에 관해서만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구원의 목적와 관련할 때, 그런 연결은 거의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구원과 저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개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저주를 받는 건, 아담과의 근본적인 연결 때문이 아니라 아담처럼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그리스도와의 어떤 근본적인 연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닮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구원과 저주는 다른 사람의 상태(status) 때문에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운명을 가진 대상을 닮는가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런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대한 어거스틴의 대답은 그 무엇보다도 이것이 로마서 5장 12-21절과 결코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는 분명히 사람들은 정죄를 받은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고, 구원을 받는 것도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기 때문을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바울을 이해한 것처럼, 하나님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인류를 다루신다. 아담, 모든 인류 중 최초의 인간이자 최초의 머리, 또는 하나님이 재창조하신 새 인류의 처음이자 머리인 그리스도이다. 


왜 아담의 정체(identity)와 나머지 인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만 나오면 자꾸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까?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구원과 구원에 대한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 사이의 논쟁을 실제로 대표한다는 점에서, 이 논쟁은 근원적 의미(foundational)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2) 논쟁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여전히 현대에도 적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사실은 전체 인구(아마도 신석기 시대)의 상징이며, 그 인구에서 어느날 죄가 나타나서 모든 인류에게 퍼졌다는 주장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적용한다고 할 때 무슨 문제가 생길까? 펠라기우스주의가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가 인류 전체의 문제에서 까마득하게 오래 전 원시 시대 극히 소수가 저지른 잘못으로 희석되어 마치 무시해도 괜찮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라도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논쟁의 틀을 벗어나는 건 힘들다. 따라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인간의 머리로 아담을 보지 않는 경우,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개인의 운명은 개인이 결정한다는 식의 해석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개인적 결정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기 보다는 단지 닮아야 할 모범으로 보려는 경향도 커지게 된다. 


대표성에는 존재론적 뿌리가 있다


다시 한번, 데니스 알렉산더는 그의 합성 이론에서 이런 함정을 교묘하게 피했다. 아담을 옛 인류의 머리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중대한 신학적 필요성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아담이 결코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는 자신의 견해를 아담이 인류의 머리라는 신학적 사실과 통합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그가 제안하는 방식은 아담이 인류의 타고난 머리 또는 아버지라는 개념에서 인류의 머리로서 아담이 가지는 법적 또는 연합적(federal) 지위를 분리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모든 호모 디비누스뿐만 아니라, 모든 호모 사피엔스를 대표하는 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처음으로 (고의적으로)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나머지 호모 사피엔스와 아담과의 존재론적 연결 부족과는 상관없이, 아담이 지은 죄를 모든 호모 사피엔스에게 전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시점에서, 호주에 살던 계몽되지 않은 호모 사피엔스(아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앞에서 언급한 신석기 시대 공동체 한 종족을 예를 들자면)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담의 연합적 대표성을 타고난 육체적 대표성과 분리함으로 알렉산더는 이제 뻔한 문제에 다시 봉착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이 다시 한번 존재론적 근거가 전혀 없는 신학적 확언을 하고 있다. 물리적 현실에서 아담은 자신이 전혀 아닌데도, 그 어떤 것(인류의 머리)으로 선언되고 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아담과 하등 관계가 없는 순진한 호주 원주민에게 죄를 전가하는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아담과 지구 반대편에 있는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그들이 아담의 죄를 공유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한 마디로 신의 변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결코 성경이 말하는 대표성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직접 영향을 받는 것은 언제나 후손이다(그렇기에 구약에서 족보는 중요하다). 그런 사례가 무척 많지만, 아브라함, 야곱, 다윗에 대한 축복이 그들의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는 여호야긴에 대한 저주가 그의 자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보라. 반대로,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 안에서” 행동한 것으로 간주된다(히 7:9-10). 즉, 개인의 대표성이나 본성이 결코 실제와 분리 가능한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야기가 “아담 안에서” 어떻게 태어났는지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로 옮겨간다면, 진정한 연결의 필요성이 더 명확해져야만 한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적 없는 일에 근거한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 거듭나거나 의롭다함을 받지 않는다. 그 대신에 신자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진정한 존재론적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된다. 성령이 그러한 연합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의 의는 단지 하나의 법정 소설(legal fiction)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원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육신에 의한 아담과 연합한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다 서로 관련이 있는 존재론적 연결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다 법정 소설이 될 수 없는 것은 온 땅의 심판자가 옳은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굳이 존재론적 토대를 두지 않고도 하나님이 (아담이나 그리스도를 위해) 연합 대표(federal headship)를 세우실 수 있다고 제안하는 데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아담과의 연합의 평행으로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연합의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비록 자유로운 신성한 명령에 의해 개인의 의를 세우셨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은 없다고 상상해 보자. 무엇이 부족할까? 성령이다. 따라서 이 모델은 삼위일체적이지 않다. 바울이 말하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평행선이 맞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어떤 실제적인 연결도 없이 아담과 결합될 수 있다는 제안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에 이를 수 없게 한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의 논리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된다. 아내와 그 어떤 존재론적 연결도 없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는 게 이상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머리로서 아버지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과 아무런 존재론적 연결이 없어도 된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대표성에 대한 그런 식의 가벼운 존재론을 삼위일체에 적용하는 사람이 쉽게 아리우스파나 삼신론에 빠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물론 두 경우 다 그런 식의 결과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왜 대표성에 관한 문제가 경우에 따라서 그렇게 다르게 취급되어야 하는지 물을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아담이 물리적 실재에서 만유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만유의 머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아담이 모든 인류의 기원이 된 한 사람임을 암시하는(행 17:26) 정황적인 성경 증거와는 별개로, 신학적으로 아담이 모든 인류의 머리인 것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아담이 모든 인류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인간성을 입으셨다


이런 사실을 그레고리 나치안젠(Gregory Nazianzen)이 깔끔하게 표현하기도 전에, 사도 이후 초기 교회의 기독론의 상당 부분은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통해서 감당하지 않은 것은 결코 “치유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Schaff, 438), 사상에 의해 형성되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히브리서 2장 11-17절이 체계화하려는 사상이기도 하다. 예수는 구원하러 온 자들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들의 살과 피를 나누어야 이 살과 피가 하나님의 저주를 지나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성육신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천사의 육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것은 참으로 그가 우리와 같아지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을 훼손하고 그분이 가져오신 구원을 훼손하는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한 것은 바로 이런 신학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모든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단절된 호모 사피엔스의 여러 구성원 중 하나일 뿐이라면, 나치안젠의 말은 다소 걱정스럽게까지 보인다.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이 내 육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육체였다면, 그는 결코 나의 가족(kinsman)도 구속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이후의 교회가 히브리서 2장을 제대로 읽었고, 성육신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옳았다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무 인성을 취하신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판결: 아담의 역사성은 중요하다


역사적 사실과 연결되지 않은 교리는 성경이 아닌 다른 데이터 및 이데올로기와 조화를 이루기 쉽다. 물론, 본질적인 면에서 굳이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교리도 적지 않다. 


아담의 정체성 그리고 인류의 육체적 조상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결코 자유롭게 역사와 분리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라는 게 나의 주장이다. 아담의 역사적 실재는 죄와 악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뿐 아니라,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근거(rationale)로서 필수적이다. 모든 인류에 대한 그의 육체적 아버지됨은 아담 안에서 우리를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존하며(같은 추론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도 보존한다), 또한 성육신의 논리를 보호한다. 멋대로 재해석하는 믿음이 초래하는 결과는 실로 심각한 재앙일 뿐이다. 




원제: Does It Really Matter Whether Adam Was the First Ma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아담이 물리적 실재에서 만유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만유의 머리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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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ichael Reeves

마이클 리브즈는 King's College(PhD)에서 학위를 받았고, 현재 영국에 있는 Union School of Theology의 신학부 학장이자 교수이다. 저서로는 크로스웨이에서 조만간 나올 ‘Rejoice and Tremble: The Surprising Good News of the Fear of God’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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