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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은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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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Kathy Keller  /  작성일 201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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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Kyle Glenn on Unsplash

‘도븨라이, 노 프로븨라이’(Doveryai, no proveryai)라는 러시아 명언이 있다. 이 명언은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어 더 유명해졌다. 그 뜻은 ‘신뢰하되 검증하라’이다. 이는 주로 다양한 국제 협상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다. 신뢰하지만 검증하고자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신뢰는 정말 좋으나, 신뢰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 명언이 크리스천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신앙을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기 위한 도약’(leap of faith)이라고 정의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말처럼 ‘신앙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 것’(Faith is believing in what you know ain’t true)이라고 정의한다. 둘다 그럴듯한 표현이다. 나는 이 글에서 신앙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가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크리스천의 신앙에는 신화나 사실이 아닌 것, 혹은 거짓이 포함될 여지가 없다. 인생이 거칠고 비참할 때, 하나님의 진리만이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에 나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역사적이면서도 검증 가능한 사실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신앙이 존재한다. 그중 유일하게 기독교만이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실존 및 그가 했던 말과 행동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만일 그가 죽지 않고(즉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증거도 없었다면(곧 다른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부활해서 걷고, 이야기하며, 음식을 먹고, 제자들과 교제한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7, 19).


‘불쌍한 자’인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각자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이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위안과 평화를 주는 행운의 토끼발(lucky rabbit’s foot)과 같은 부적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죠. 당신에게 예수님이 그런 훌륭한 부적이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게 믿음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때 회의론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신앙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말과 행동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일들이 실제가 아니라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다. 다른 모든 종류의 신앙, 심지어는 과학, 교육, 정치 권력 등에 뿌리를 두는 신앙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의 기초이자 존재의 의미는 좋은 교훈(the good advice)에 국한된다.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특별한 삶을 위해 중요한 규칙들을 잘 지키고 선한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분명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런 삶은 인류 문명에도 괄목할 만한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로 인해 당신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훌륭한 모범으로 여겨질 것이다. 혹 지금 당장에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미래에는 당신의 삶에 대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죽음 이후의 세상에 산다든가(이슬람), 환생의 삶을 경험한다든가(힌두교), 무존재(non-existence)의 평화를 누린다든가(불교), 아니면 ‘뉴욕타임스’에 당신의 부고가 게재되는 보상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다르다. 이 신앙은 성경의 윤리적 교훈에 근거하지 않는다. 물론 성경에도 윤리적인 가르침이 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자신의 신앙, 회복을 향한 소망, 구원의 확신에 대한 근거를 어떤 한 대상,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둔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이 실제 역사 가운데 살고, 죽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만들어진 이야기(a fairy tale)나 쫓으면서 평생을 허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바보처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처럼 말이다.


베토벤과 목격자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목격자들을 열거한다. 바울은 엄격한 로마식 교육을 받은 유대인이었다. 철학과 성경에 정통한 자였다. 그러나 믿음을 증명하는 일에는 자신의 교육 배경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부활을 실제로 보았던 그 목격자들로부터 믿음의 확신을 이끌어 내었다.


나 역시 이런 믿음의 증거들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 부분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익숙한 본문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배울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생각은 틀렸다. 잠시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나는 일탈적인 생각을 자주 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이다.


나는 낡은 러닝머신에서 운동하며 생각하는 일을 즐긴다. 그것도 대부분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Egmont Overture)을 들으면서 말이다(다행히도 나의 오래된 러닝머신에는 이 음악 감상을 방해하는 TV가 달려있지 않다). 이 서곡은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음악 중에 하나다. 나는 그 음악의 마지막 부분, 승리 파트를 들으며 상상한다. 말하자면, 그 마지막 부분을 예수님의 부활을 재현하는 훌륭한 사운드 트랙으로 여기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때 내가 상상하는 내용은 대략 이런 식이다. 천사들이 돌을 굴리고 예수님은 부활한 몸을 입고 기뻐하며 걸어 나오신다. 그리고 자신이 인류의 구원자이며 죽음에서 부활한 첫 열매가 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신다. 이런 상상을 하며 음악이 끝나는 부분에서는 스스로 지휘자가 되어 합창단원에게 부활의 승리를 표현하는 나팔을 불도록 사인을 준다.


그런데 나는 그때 마태복음의 부활 기사를 읽으며 내 상상과는 다른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부활 이야기에 따르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돌을 굴려낸다(그 돌은 몇 톤이나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덤 테투리에서 입구 쪽으로 갈수록 경사는 더 높았다. 아마도 돌이 굴려져서 입구가 막히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힘으로는 돌을 다시 밖으로 굴려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내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그때(즉 천사가 돌을 굴려 냈을 때)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천사가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하러 온 여인들에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마 28:6), “먼저 갈릴리로”(마28:7) 가셨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부활 장면을 세상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엘비스는 이미 쇼를 끝내고 공연장을 떠난 것이다(천사가 돌을 굴려 내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을 떠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천사가 돌을 움직이도록 기다리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은 인간이셨지만, 자신을 싼 수의를 통과해서 돌로 봉해진 무덤 밖으로 나가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요 20:19). 다시 말해, 예수님이 무덤을 나가실 때, 천사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천사는 ‘왜’ 돌을 굴렸을까? 만약 천사가 돌을 굴리지 않고 무덤을 막고 있는 돌 위에 그대로 앉은 채,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메시지를 들은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믿었을까? 아마 믿었을 수도 있고,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천사는 여인들이 믿을 수 있도록 매우 설득력 있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설득력 있는 천사의 말을 직접 듣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돌이 굴려져 무덤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누구나 볼 수 있는 빈 무덤이 거기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증명될 수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빈 무덤을 보지 않은 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헛것을 보았다고 취급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시체가 여전히 무덤 안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천사가 돌을 굴려야 했던 진짜 이유이다. 천사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가시도록 돌을 굴린 것이 아니다. 천사의 행동은 우리를 무덤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이 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하되 검증하라.’ 예수님의 부활은 빈 무덤과 그 안에 놓여 있던 수의를 직접 보았다고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들에 의해 검증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 신앙은 천사가 무덤을 열어 줌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빈 무덤을 살펴보고, 예수님이 더 이상 그 자리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검증된다.


그러므로 늘 질문하고 의구심을 표출하길 바란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가지는 일을 두려워한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역사는 성경을 뒷받침한다. 부활은 이미 일어났고, 그 부활은 모든 것을 바꾼 역사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Our Faith Is Historically Verifiable—Or It’s Nothing

번역: 김재덕

작가 Kathy Keller

케시 켈러는 뉴욕시에 위치한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에서 커뮤니케이션 부디렉터로 섬겼다. 대표 저서로는 'Jesus, Justice, and Gender Roles'가 있으며, 공저로 남편 팀 켈러와 함께 저술한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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