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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에 대해 기억해야 하는 다섯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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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Emma Scrivener • Glen Scrivener  /  작성일 2018-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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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Patrick Schneider on Unsplash

신앙에 대한 의심의 문제에 있어 가장 힘든 부분들 가운데 하나는 의심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의 믿음은 마치 도미노와 같아서 한 곳에 의심이 생기면, 전체가 다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불안을 줄 수 있다.


의심은 보통 작은 데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빠른 속도로 증폭된다. 예를 들어, 종종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로부터 시작된 의구심은 곧 ‘하나님이 과연 들으실까?’ 또는 ‘하나님이 나에게 신경을 쓰실까?’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하나님이 계시긴 한 건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대된다.


이런 신앙적 의심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할 때, 우리는 심지어 무신론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불신이 겉으로 드러나지 못하도록 가슴앓이 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주일학교 교사, 구역장, 또는 기독교 단체에 몸 담고 있다면, 이러한 의심을 어떻게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혹은 당신의 가족이 모두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마음 속 불신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 의심은 당신의 마음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당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그 존재는 마치 잡초와 같아서 모른 척 내버려 두어도, 어느새 한 뼘이나 자라나 곧 당신을 삼킬 듯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심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다음의 다섯 가지 사실을 기억하라.


1. 모든 비기독교인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


믿지 않는 친구들을 바라볼 때, 마치 그들은 믿음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대상인 듯 부러워하지 말라. 모든 사람들, 심지어 가장 완고한 무신론자조차도 정신적으로는 의지하는 구석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 존재를 자신이 눈으로 보거나 입증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는 우주의 지속성, 감성과 이성의 실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진, 선, 미, 그리고 사랑 같은 보이지 않는 가치에 매달리기도 한다. 이들 중 그 어떤 것들도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믿는 그 대상 안에는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이 붙드는 진, 선, 미, 그리고 사랑의 뿌리에는 사실상 변치 않는 어떠한 진리도 자리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이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무신론과 비교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2. 모든 성도들도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의심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다. 때때로 나는 나의 결혼, 친구들, 합리성, 요리, 저술,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의심한다. 가끔씩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다. 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의심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8:26)라고 책망하셨다.


나는 종종 죄를 짓고, 의심도 한다. 양자 모두 그 자체로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놀랄 일도 아니고 예상치 못할 일도 아니다. 의심 없는 기독교인은 마치 죄 없는 기독교인이 존재할 수 없듯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죄의 모든 시작은 불신이므로 사실 의심과 죄는 함께하는 것이다(요 16:9).


요한1서 1장 8-9절을 이러한 관점에서 풀어보는 것도 지나친 확대는 아닐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의심]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의심]을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의심]을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


3. 믿음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혈당과 함께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호르몬의 작용이다. 만일 감정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감정은 나의 직장과 결혼, 신앙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선천적 기질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요르(즉 곰돌이 푸에 나오는 캐릭터로 이요르는 항상 우울한 당나귀)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티거(마찬가지로 곰돌이 푸에 나오는 캐릭터로 활기찬 호랑이)이다. 티거가 밝고 명랑하다는 이유로 믿음의 영웅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단지 운 좋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 물질인 세로토닌 복권에 당첨되었을 뿐이다.


정신적 건강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병적인 우울증은 누군가에게는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아래 5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금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우울증에 걸렸더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 


4. 믿음은 환상이 아니다


우리는 증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설득되었기 때문에 믿는다. 믿음은 배의 근육에 힘을 잔뜩 주고 어둠 속으로 대담하게 발을 내딛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이미 반짝이는 찬란한 빛을 향해 우리의 눈을 뜨는 일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눈 뜰 수 있을까?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라고 말씀한다. 로마서에서 이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무려 274개의 구절이 앞서 배치된 것을 생각하면, 이는 무척 중요한 메시지임을 알 수 있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당신에게 읽고 들을 말씀이 있음을 기억하라.


믿음은 반이성적인 것이 아닌, 이성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설득력 있는 진리에 대한 응답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계속해서 들으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어떤 의심이 생기더라도, 복음의 길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라. 성경과 성경의 인물들로 당신을 둘러싸라. 그러면 당신은 계속 참된 것에 젖어 있게 될 것이다.


5.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가 애써서 끌어당기거나 혹은 밀어내는 무언가가 아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와 그의 이름을 ‘믿는’ 자가 병행을 이루고 있다. 이는 구원을 위해 힘껏 통과해야 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관문이 아니다. 이들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두 가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혼인을 ‘결혼하다’(능동적)와 ‘아내가 되다’(수동적)의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믿음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두 가지 묘사이다.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의심의 시간 속에 있다면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 성경, 성례, 기도,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해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갈 때,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은 다시 살아난다.


우리가 ‘믿음’이 무엇인가에 골몰하는 것보다 예수님께로 시선을 옮길 때, 의심은 줄어들고, 상대화되고, 대체되며, 심지어 새롭게 승화된다. 의심의 여정은 어쩌면 당신이 예수님에 대해 보다 깊고, 풍부하게 알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방법인지도 모른다.




원제: 5 Things to Remember About Doubts
번역: 주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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