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사랑
by 전재훈2019-01-11

우리가 믿는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라는 말의 어원을 한울님 혹은 하늘님이라고도 하지만, 생태여성신학자인 구미정 교수는 《한글자로 신학하기》에서 이는 조상들이 신을 부르던 ‘한늘님’에서 변화된 이름이라고 추정했다. 무한히 크다는 뜻의 ‘한’과 언제나 존재한다는 ‘늘’이 합쳐진 말로서 조상들은 신을 무한히 크고 언제나 존재하는 ‘한늘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신명이 한늘님이건 한울림이건 그것은 신이 우리 조상에게 계시해 준 이름이 아니라 조상들이 신의 존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상상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신을 엘로힘이라고 불렀다. 이는 전능자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능한 자를 ‘엘’이라고 불렀고, 그 능력이 무한히 발휘되는 전능자를 ‘엘’의 장엄복수형태인 ‘엘로힘’이라고 불렀다. 엘로힘은 야훼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움을 하던 때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엘로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엘로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라고 말했다. 즉 엘로힘이라는 말은 신을 지칭하는 그들의 언어였다. 그런 탓에 엘로힘을 번역할 때, 영어로는 ‘GOD’이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GOTT’라고 하며, 한국어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고유 명사가 아니기에 천도교에서도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한때 천도교에서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자신들의 고유 명사라고 주장하며 기독교에서 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일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보통 명사이므로 어떤 종교에서 사용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이다. 이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으로 ‘자존자’로 해석되어 왔다. 이는 보통 명사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이기에, 번역해서 사용하기보다는 ‘야훼’ 혹은 ‘여호와’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의 ‘야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인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로 불렸다. 스스로 존재하는 신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근원이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고백을 담아 ‘아도나이’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가 전능자라고 여기는 엘로힘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이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적으로 고백한 신명이었다. 하지만 출애굽기 6장 3절 말씀에 나오는 ‘전능의 하나님’은 관주에서 ‘엘로힘’이 아니라 ‘엘샤다이’로 기록되고 있다. 엘로힘과 엘샤다이는 둘 다 전능자로 번역되지만, 둘 사이의 뜻은 미묘하게 다르다. 엘로힘의 전능자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자’인 반면, 엘샤다이의 전능자는 ‘뜻을 정하면 그 뜻을 이루실 능력이 완전한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엘로힘은 하나님의 능력에 초첨을 맞춘 이름이고, 엘샤다이는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둔 이름이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서 바울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라고 정의 내린 분이 바로 엘샤다이 하나님이다.


엘로힘 하나님과 엘샤다이 하나님의 차이는 기도의 차이로 이어진다. 우리의 소원을 이뤄 줄 램프의 요정 지니나 도깨비 방망이 같은 신을 원할 때에는 엘로힘이 편하다. 하지만 엘샤다이 하나님을 부를 때에는 나의 소원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한국적 기복 신앙 안에서는 엘샤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 엘로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그러나 신으로 섬기기에 엘로힘 하나님이 더없이 좋아 보일지라도, 구원의 문제 앞에서는 엘샤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편하고 좋다.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자녀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엘샤다이 하나님,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로 여겨야 더 마음이 놓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에는 구원에 이를 만한 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뜻을 정하면 그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이가 어떤 뜻을 정하고 또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면, 그 뜻은 가장 완벽하고 완전하게 이뤄질 것이 분명하다. 그저 뜻을 정하기만 해도 되는데 그 뜻을 이루고자 아들의 생명을 걸었다면, 그분은 이 일에 대해서 실수할 수가 없고, 중간에 포기하지도 않으며, 끝내 실패하지도 않으신다. 그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엘샤다이 전능자이기 때문이다.


뜻을 정하기만 해도 그 뜻을 이루실 이가 아들의 생명을 걸고 성취하려던 뜻은 무엇이었을까?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대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증언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로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에 실수도, 실패도, 포기도 없는 엘샤다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런 하나님을 경험한 사도가 그분을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신앙의 가장 기본은 우리가 섬기는 이가 누구이며, 그 분의 뜻이 무엇이고, 그 뜻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신앙인이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고,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신 분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경험하고 누리는 자임을 믿는 사람이다.


그대는 하나님이 변함없이 영원토록 사랑하시는 가장 존귀한 자녀임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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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