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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이야기에서 그려지는 존재론적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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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Gavin Ortlund /  작성일 2019-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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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 Disney Pictures and Walden Media

내가 참 좋아하는 문학 작품의 한 단락이 있는데, 바로 C. S. 루이스의 ‘은의자’(The Silver Chair)에서 퍼들글럼(Puddleglum)이 녹색 마녀(the Lady of the Green Kirtle)에게 대답하는 장면이다. 이 이야기에서 녹색 마녀는 지하세계에 몇몇 캐릭터들을 가두어 두고, 자신의 마법으로 그들을 꾀어 나니아(Narnia)나 아슬란(Aslan)이나 지상세계(the Overland)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득한다. 바로 그 캐릭터들이 마녀의 논리에 넘어가기 직전에, 퍼들글럼이 마법의 불길 위를 걸어 나오며 말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는 고통으로 절뚝거리며 불길 속을 빠져나와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한 마디만 하죠. 지금까지 당신이 한 말은 대체로 옳지만, 별로 놀라워하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알고도 최선의 표정을 짓고 싶어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한 말은 하나도 부인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한 가지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자, 우리가 그저 꿈을 꾸었다고 칩시다. 아니면, 그 모든 것들, 가령 나무와 풀과 태양과 달과 별들, 그리고 아슬란까지도 만들어 냈다고 칩시다. 혹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처럼 만들어진 대상들이 실재하는 대상들보다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암흑의 소굴 같은 당신의 나라가 유일한 세계라고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쩌죠? 이 세계는 제가 보기에 가엽기 짝이 없는 곳일 뿐입니다. 당신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재미있어지겠군요. 만일 당신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그저 일종의 놀이 세계(a play world)를 만들어 내는 아이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놀이를 하고 있는 이 네 명의 아이들이 당신의 진짜 세계를 쓰러뜨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낼 수가 있죠. 내가 그 놀이 세계를 좀 더 지켜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혹여 그 세계를 이끌어 갈 아슬란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슬란의 편에 설 것입니다. 또는 나니아라는 세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니아인처럼 살 것이고요. 그러니 우리에게 근사한 식사를 차려준 일은 고맙지만, 만일 이 두 명의 신사들과 저 젊은 아가씨가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리는 당신의 궁정을 즉시 떠나 이 암흑을 지나서 지상세계를 찾는 일에 우리의 인생을 바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이 길지 않다는 사실은 나도 알지만, 당신이 한 말처럼 세상이 그리 지루한 곳이라면, 인생을 바치는 일이 별로 큰 손해는 아니겠죠.’”


어떤 이들은 이 장면을 플라톤이 묘사한 동굴의 비유에 대한 일종의 각색이라고 간주하지만, 나는 최근까지 이 이야기가 존재론적 증명이라든가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플라톤의 세계관을 적용한 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얼마 전에, 루이스 자신이 1963년 10월에 낸시 와너(Nancy Warner)에게 보낸 편지에 쓴 글을 읽게 되었다. 와너는 그녀의 아들이 ‘은의자’에서 존재론적 증명을 발견했다고 언급한 내용을 전했고, 이에 대해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부인의 철학자 아들이 분명 퍼들글럼이 발로 불을 끄는 장면을 두고 그렇게 이야기했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은 제가 아니라 안셈(Anselm)이나 데카르트(Descartes)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저는 단순히 그들이 논증한 존재론적 증명을 아이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의 이야기는 부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업적도 아니죠. 부인도 울리치의 주교보다는 더 깊이 아이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C. S. 루이스가 아니고 누가 그처럼 실존주의와 존재론적 증명을 아동문학에 함께 그려낼 수 있을까 싶다. 그렇게 쉽게 읽어볼 수 있는 책을 통해, 그처럼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묘사를 할 수 있다는 데서 그의 천재성이 돋보인다.


마음에 호소하는 논증


내가 보기에 이 퍼들글럼이 등장하는 단락은 세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해체주의자(deconstructionist)들이 가진 관점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다. 만일 허무주의가 사실이며, 기독교의 견고하고 아름다운 모든 교리들, 가령 하나님과 천국과 객관적 선에 관한 모든 가르침들이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머리속에 있는 바로 그 가르침들이 단지 나의 머리를 존재하게 만드는 이 현실보다 훨씬 더 비중 있게 여겨진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정말 이 사실을 부인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물자체’(즉 개인의 주관적인 인식과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자체)의 역할은 끝났고, 오직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만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견해가 부상하고 있다. 따라서 초월적인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든 사상은 사회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조건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형이상학은 그저 ‘놀이를 만들어 내는 아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때로는 인생의 어두운 순간에, 나 역시도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 세상이 제안하는 세계관과 싸우게 된다. 바로 그러한 시간에, 퍼들글럼이 이야기하는 이 단락은 내게 도움을 준다. 이 단락은 의심이 가진 허위성만이 아니라 그 의심의 취약성, 곧 의심하는 바가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우리가 거기에 충성할 만한 가치가 없음을 암시한다.


나는 점점 더 현대 문화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아름다움이 꼭 우리에게 익숙한 변증의 방식으로만 되풀이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환멸(幻滅) 또는 각성의 시대(an age of disillusionment)에 사람들은 논리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경우가 흔하다. 즉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호소하는 일이 승산이 높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복음 자체의 순수한 경이로움을 느끼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어린아이가 나니아 이야기를 읽으며 느끼는 매혹과 향수 같은 감정을 그들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일단 복음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들이 갖게 된다면, 그때부터 그 마음을 떨쳐 내기란 어려워질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C. S. Lewis Put the Ontological Argument for God in Narnia

번역: 장성우


작가 Gavin Ortlund

게빈 오트런드는 캘리포니아 오하이에 위치한 First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로 Fuller Theological Seminary(PhD)를 졸업했으며, 저서로는 'Theological Retrieval for Evangelicals'와 'Finding the Right Hills to Di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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