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
by Joe Carter2019-01-21

이 글에서는 프랑스 신학자이면서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John Calvin)의 생애를 보여 주는 아홉 가지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이른 나이부터 칼빈은 라틴어와 철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학생이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오를레앙대학교(the University of Orleans)에서 좋아하지도 않는 법학을 공부하며 5년을 보냈다.


2. 칼빈은 그의 대작인 ‘기독교강요’(The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스물일곱 살에 저술했다(그는 평생에 걸쳐 이 작품을 증보하며 새로운 버전으로 출판했다). 이 작품은 복음적인 신앙을 알고자 하는 자들을 위한 입문서로 제작되었다(칼빈은 그 내용을 “경건과 구원의 교리를 아는 데 필요한 지식의 총체”라고 제시했다).


3. 칼빈은 원래 목사가 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가기 위해 제네바(Geneva)를 거쳤다. 거기서 그 지역 교회의 지도자인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을 만나게 되었다. 칼빈은 단지 하룻밤을 그곳에 머물렀는데, 파렐은 그에게 그 도시에 남아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칼빈은 자신은 학자이지, 설교자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파렐은 만일 칼빈이 제네바에 남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의 모든 학문을 저주하시리라고 선언했다. 이후에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마치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권능의 손을 내밀어 나를 붙잡아 세우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나는 그 여정을 지속할 수 없었다.”


4. 미망인 이들레뜨(Idelette)와 결혼한 칼빈은 그녀의 두 자녀들에게 새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낳은 자식은 그의 생애에 생존하지 못했다. 그의 유일한 아들 자크(Jacques)는 예정보다 일찍 태어났고 조금밖에 살지 못했다. 그리고 아내까지 죽자, 칼빈은 동료 비레(Viret)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네. 만일 하나님의 뜻이 허락되었다면, 그녀는 나의 가난만이 아니라 죽음조차도 기꺼이 나누어 가질 사람이었어. 일생 동안 그녀는 내 사역을 돕는 신실한 조력자였으니까. 게다가 조금도 내 사역을 방해한 적이 없었다네.”


5. 제네바에서 사역하는 동안, 칼빈은 2천번 이상 설교를 했다. 그는 일요일에는 두 차례 설교했고 주중에도 거의 매일 설교했다. 그는 한 시간 이상씩 설교했으며 노트는 사용하지 않았다.


6. 1553년 경에 칼빈은 스페인의 신학자이자 의사였던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와 서신 교환을 시작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상반되는 작품을 몇 차례 저술했고, 칼빈은 그에 대한 답변으로 자신의 기독교강요 한 권을 보냈다. 이에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비판적인 관찰을 담은 주석을 칼빈이 보낸 기독교강요에 기록한 후에 신속하게 되돌려 주었다. 그러자 칼빈은 세르베투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않고 경멸하지도 않으며 핍박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바른 교리를 그토록 심히 교만한 태도로 모욕하는 당신을 바라볼 때는 강철과 같이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서신 교환은 칼빈이 그만두기까지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


7. 1500년대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일은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으로 유럽 전역에서 여겨졌다. 당시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책들을 저술했다. 그로 인해 프랑스 가톨릭 종교재판소(the French Catholic Inquisition)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세르베투스는 비엔(Vienne)에 있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이탈리아로 망명하는 길에 제네바에서 발을 멈추었다. 거기서 그는 칼빈이 설교하는 예배에 참석한 후, 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프랑스 종교재판소의 심문자들은 처형을 위해 그를 넘겨 주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제네바의 공직자들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이단 재판소로 그를 데리고 왔다. 이때 칼빈은 일전에 그 자신이 ‘혐오스러운 신성모독’이라고 명명한 세르베투스의 문제에 근거하여 그가 사형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지기보다 반역자로서 참수형에 처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제네바 의회는 칼빈의 바람을 거절하고, 세르베투스의 마지막 저서라고 간주되던 책 한권을 그의 다리에 사슬로 매달아 화형에 처했다.


8. 제네바에 있는 동안 칼빈의 주된 관심은 어린이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데 있었다. 그 학교는 하나의 독립적인 기관이었지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콜레주(Collège)라고 불린 문법 학교와 아카데미(Académie)라고 불린 상급 학교로 이루어져 있었다. 5년이 채 되기 전에 문법 학교에 1천 2백 명, 그리고 상급 학교에 3백 명의 학생이 생겼다. 결국 콜레주는 제네바에서 대학 예비 학교들 가운데 하나인 제네바콜레주(the Collège de Genève)가 되었고, 아카데미는 제네바대학교(the University of Geneva)가 되었다.



9. 칼빈은 죽기 직전까지 사역했다. 교회사의 기록에 의하면, 교회까지 가는 약 200야드를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의자에 실려와서 설교했다. 또 겨울의 찬 공기를 피하도록 강의실까지 가지 말라고 의사가 금하자, 그는 자신의 청중을 침실에 모이게 한 후에 강의를 했다. 자신을 향해 좀 쉬라고 재촉하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여러분은 내가 주님이 오실 때 게으른 자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면 좋겠습니까?”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John Calvin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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