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의 교회사, 클뤼니 수도원부터 시므온까지
by Nicholas Needham2019-01-25

10세기는 어느 위대한 신학자가 등장하여 빛을 발한 시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서방 교회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10세기는 교회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기준으로 보면 교회가 크게 진보한 시기였다.

 

9세기에는 기독교 문명이 노르만 족(바이킹 족)의 침략으로 서유럽에서는 거의 초토화되었다. 당시의 바이킹 족은 두개골을 쪼개 죽이는 잔인한 전사들이었다. 예배당을 불사르고 성직자와 수도사들을 살육하고 수녀들을 겁탈했다. 그러나 10세기에 이르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노르만 국가들이 하나씩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 변화는 실제로 9세기 말에 잉글랜드에서 시작되었다. 곧 잉글랜드에 진출했던 덴마크의 노르만 족이 기독교 세례를 알프레드 대제(Alfred the Great)와의 평화 조약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을 때가 그 시작점이다. 10세기에는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의 노르만 국가들에서도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

 

아이슬란드를 제외하고, 모든 노르만 국가는 최상류층이 먼저 기독교로 개종했다. 먼저 군주와 궁정이 회심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는 오늘날 우리와 더 비슷했다. 870년대부터 노르만 족은 아이슬란드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당시 서양에서 가장 교양 있고 민주적인 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새로 회심한 노르웨이 왕 올라프 1세(Olaf Tryggvason)가 파송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900년대 말에 아이슬란드에 믿음을 심었다. 이때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기독교인과 이방인으로 양분되었다. 이로 인해 종교 내란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이 보였다. 그러나 아이슬란드는 민주주의 전통이 우세한 문화였고, 그래서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그들 중에 있는 어떤 현인에게 물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그 현인은 오래 동안 숙고한 다음, 결국 그리스도를 믿는 새 믿음이 옛 이방 종교보다 더 낫다고 답했다. 이 판단을 모두가 받아들였고, 1000년에 아이슬란드 의회는 이 판단을 비준했다.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인 아이슬란드에서 왜 두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대답은 중세 시대에는 어디를 막론하고 둘 이상의 종교를 가진 사회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를 하나로 묶는 끈으로 종교를 이해했다. 그러므로 각 사회는, 심지어는 민주적인 사회까지도 오직 하나의 믿음만 가질 수 있었다. 중세 시대의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종교를 믿도록 허용하는 종교적 관용을 보장하지 않았고, 다만 어느 한 믿음을 전체 사회가 신봉할 수 있는지를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일만을 보장했다.

 

9세기에 전쟁과 초토화를 거친 후에, 유럽의 기독교는 수도원과 군주의 제휴를 통해 재건되었다. 특히 한 수도원이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를 심는 활동을 주도했다. 그 수도원은 909년에 프랑스 남동부에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the monastery of Cluny)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서방 교회 수도원들의 활력과 청결을 회복시켰고, 서방 기독교가 새롭게 탄생하는 데 큰 도움을 줌으로써 이 운동은 ‘클뤼니 수도원의 부흥’(Cluniac revival)으로 불리게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여러 수도원장이 연속해서 이끌었다. 배후에서 클뤼니 수도원의 부흥에 자극을 준 이는 927년부터 942년까지 수도원장을 지낸 오도(Odo)였다. 오도는 클뤼니 수도원을 전신으로 삼는 다른 수도원들을 많이 만들었다. 931년에 교황 요한 11세(Pope John XI)가 이 수도원들을 통제할 권리를 클뤼니 수도원에 주었다. 오도는 클뤼니 수도원 소속 수도원들의 수도원장을 개인적으로 지명할 권한을 가졌고, 이 수도원장들은 클뤼니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에게 복종을 서약했다. 따라서 클뤼니 수도원 소속 수도원들의 방대한 네트워크가 프랑스와 독일 전역으로 펼쳐졌고, 이 수도원들은 모두 클뤼니 수도원의 집중적인 관할 아래 있게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부흥이 가졌던 주된 방침은 기존 수도원들을 개혁하고 더 좋은 수도원들을 많이 세우는 데 있었다. 수도원 생활을 개혁하려는 그 방침의 핵심에는 클뤼니 수도원 방식으로 전례를 개혁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클뤼니 수도원 소속 수도사는 거의 온종일 예배드리는 데 헌신했고, 클뤼니 수도원 예배당들은 가능한 한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화려한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느낄 수 있도록 지어지고 여러 장식으로 꾸며졌다. 클뤼니 수도원 소속 개혁자들은 또한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the Benedictine rule)을 따랐다. 9세기 말엽에 대다수 서방 교회 수도원들은 규율이 엉망이었다. 10세기 말엽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부흥이 미친 영향으로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에 엄격히 순종하는 수도원들이 서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클뤼니 수도원은 설립 당시부터 세속적 간섭이나 정치적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봉건제도가 지배하던 당시로서는 이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999년에 클뤼니 수도원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5세(Pope Gregory V)에게 주교단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자유도 허락받았다. 그 결과 클뤼니 수도원은 오직 교황에게만 종속되었다. 그러나 11세기 중엽에 교황권이 개혁될 때까지 교황청은 부패하고 무력했다. 그러므로 클뤼니 수도원의 원장들은 교황이나 왕들의 간섭 없이 원하는 정책을 자유롭게 펼쳤다. 교황들이 아니라, 클뤼니 수도원의 원장들이 서유럽 기독교 생활의 중심에 있었다.

 

비록 클뤼니 수도원이 정치적 통제에서 벗어나 있기는 했어도, 클뤼니 수도원 소속 수도사들과 세상 통치자들(군주들, 왕자들, 왕들)은 긴밀히 결탁했다. 확실히 클뤼니 수도원의 부흥은 통치 계층에 기독교적 관념을 심는 데 일조했다. 왜냐하면 귀족들의 자녀를 수도원에 데려와 확실하게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일이 클뤼니 수도원의 한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클뤼니 수도원과 서방 기독교 국가의 왕들 간에 강력한 협력 관계가 이루어졌다. 클뤼니 수도원의 원장들은 유럽을 진정한 기독교 사회로 만들려면 강력한 기독교 수도원들을 세워 그 수도원들이 기독교적 관념에 따라 사회를 다스려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처럼 서방 교회는 10세기에 위대한 신학자들의 도움 없이도 일종의 기독교적 ‘사회 부흥’을 일으켰다. 다른 한편, 비잔틴 제국의 형성으로 기독교 사회가 견고하고 찬란하게 꽃을 피운 동방 교회에서는 위대한 신학자가 배출되었다. 새로운 신학자 시므온(Simeon, 949-1022)이 바로 그였다. 시므온은 비잔틴 신비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로 알려졌다. 동방 교회 사람들은 시므온 이전에는 사도 요한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에게만 ‘신학자’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과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두 사람의 가르침이 가장 탁월하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동방 교회 사람들은 시므온을 요한과 그레고리우스와 동등한 수준으로 올림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시므온은 흑해 남쪽 연안 갈라디아 마을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도원 생활에 대한 깊은 갈망으로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영적 스승인 콘스탄티노플의 큰 대학수도원의 한 수도사가 젊은 시므온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더 성숙해져 수도사가 되겠다는 결정을 온전하게 내릴 수 있을 때까지 관리를 그만 두지 말 것을 조언했다.

 

그 스승의 이름 역시 시므온이었다. 그는 그보다 더 유명한 제자와 구별되어 ‘존경받는 시므온’(Simeon the Reverent)이라고 불렸다. 젊은 시므온은 결국 그 대학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영적 열정이 너무 강해 다른 많은 수도사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그들이 젊은 시므온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일이 벌어졌다. 존경받는 시므온은 젊은 시므온을 보호하려고 그를 콘스탄티노플의 성 마마스 수도원(Saint Mamas monastery)으로 보냈다. 젊은 시므온은 성 마마스 수도원에서 980년에 수도사가 되었다. 시므온은 꾸준히 영적 생활에 관한 설교와 찬송과 논문들을 썼다. 그 결과, 시므온은 동방 교회의 선생들 가운데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시므온의 명성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았다.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 반발을 주도한 이는 스테파노(Stephen)였다. 스테파노는 니코메디아(Nicomedia)의 전(前) 주교로서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직책(동방 교회에서 가장 높은 주교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스테파노는 끊임없이 시므온을 공격했고, 시므온의 글들이 천박하고 무식하다고 비판했다. 어떤 차원에서 이 두 사람의 갈등은 (스테파노와 같이) 제도화된 공적 교회 및 그 교회의 권위를 강조한 자와 (시므온과 같이) 사람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동성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 자 사이에 벌어진 충돌이었다. 시므온에 관한 이런 의견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결국 1009년에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2세(Sergius II)는 시므온에게 교회의 평화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도록 요구했다. 콘스탄티노플을 떠난 시므온은 콘스탄티노플 외곽에 정착했다. 한 부유한 친구가 시므온을 위하여 그곳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고, 그곳에서 시므온은 소란한 비잔틴 제국의 수도를 떠나 평강을 누렸다.

 

시므온은 확실히 비범하고 특출한 인물이었다. 시므온이 예배에서 수도사들을 이끌 때마다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시므온은 종종 개인들에 관해 (확실히 실제로 이루어지는) 예언을 해주었고, 기도를 통해 치유의 역사도 행했다. ‘눈물의 은사’(the gift of tears)는 동방 교회의 신비 사상에서 특히 소중히 여겼던 신령한 은혜이다. 곧 눈물의 은사를 받으면, 자신의 죄에 대해 통곡하며 울 때 그 마음속에서 간절한 회개의 감정이 용솟음쳤다. 시므온은 눈물의 은사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시므온이 홀로 앉아 있을 때 눈물로 뒤범벅이 된 모습을 자주 보았다. 시므온의 믿음은 또한 격식에 구애 받지 않았다. 다른 비잔틴 신비가들과 달리 시므온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말했다. 그리고 명목적인 기독교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변화된 삶으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세례와 교회 출석은 영적으로 아무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곳에서, 곧 도시에서, 시골에서, 수도원에서, 그리고 산 위에서 불리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펴본다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말과 행동에 있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거의 하나도 찾지 못할 것이다.”

 

시므온은 설교, 저술, 상담을 통해 온갖 의식과 규례에 얽매인 종교를 버리고 마음속에 내적 영성을 갖도록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데 한평생 심혈을 기울였다. 시므온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교리만을 통해서는 얻지 못하고, 헌신적인 영혼의 활동, 특히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곧 기도할 때 신자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시므온은 한평생 논란 속에 있었으나, 동방 정교회는 사후에 시므온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고, 결국 시므온은 동방 교회의 가장 사랑받는 성도 가운데 하나가 되어 지금도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 시므온이 남긴 위대한 영적 자취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10세기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Revival & Repentance: From Cluny to Simeon

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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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Nicholas Needham

니콜라스 니드햄은 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학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코틀랜드 인버네스에 위치한 Inverness Reformed Baptist Church의 목사이다. 그는 스코트랜드 Dingwall에 있는 Highland Theological College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교수이며, '2,000 Years of Christ’s Power'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