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의 고통을 다루는 신학과 신앙
by Christopher Catherwood2019-01-29

내 아내는 8년 동안 파킨슨병과 합병증을 앓던 중, 지난 달 겨우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장수하는 집안의 유전자를 받은 덕분에 의사의 예상보다는 좀 더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죽음은 내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아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도 교회의 소그룹 성경공부에 참석하였고, 요양원에서도 끝까지 그 모임에 참여하였다. 나는 그녀가 온 생애 동안 섬겨 온 바로 그 주님의 품에 안겨 있을 거라고 믿는다. 아내는 하늘에 있고, 63세의 홀아비인 나는 여기 이 세상에 남아 있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80대와 90대까지 살기 때문에, 나는 아내의 죽음이 비교적 이르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지난 사십 년 동안 오래된 청교도 교회에 행복하게 다녔다. 그래서 아내의 이른 죽음에 관해서도 교회에서 배운 나의 신학적 관점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말한다. 그 관점이란 깊은 슬픔이 비록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바라보는 눈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상실의 고통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내 아내를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는지 혹은 그렇게 신실한 여성을 왜 파킨슨병에 걸리도록 허락하셨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다.


삶의 미스터리


아내와 나는 아기를 가질 수 없었다. 이 문제가 우리에게는 큰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앞으로 남은 내 생애 동안에도 그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전에는 그 원인을 알지 못했던 일들이 이제는 명확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1982년에 나는 캠브리지대학교(Cambridge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위한 논문 심사를 받았다. 내부 심사위원은 매우 정직한 학자였고, (돌아가신) 외부 심사위원은 표절 문제를 엄격하게 다루기로 유명한 학자였다. 외부 심사위원은 내게 논문 작업을 1년 더 하라고 요구하였다. 내부 심사위원은 깜짝 놀랐지만, 더 저명한 심사위원의 결정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석사 학위를 받는 데 그쳤고, 그것으로 내가 학적인 직업을 가질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그 후 1991년, 나는 아내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내가 학적인 면에서 은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1997년, 아내의 조언에 따라 나는 이전의 내부 심사위원이었던 교수를 만나러 갔다. 그는 여전히 캠브리지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날 그 교수가 해외 연구 프로그램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 담당자는 마침 20세기의 역사를 가르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역사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6년, 나는 노리치(Norwich)에 있는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University of East Anglia)의 역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는 내가 논문 심사를 받던 날로부터 꼭 24년만의 결과였다. 


하나님은 내가 1997년과 2006년에 어떻게 될지를 1982년에 이미 알고 계셨지만,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절망처럼 보일 때, 나는 그 어느 것도 예상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욥기서를 읽을 때, 우리는 곧 뭔가 독특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욥이 그에게 왜 그런 고난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통 중에 부르짖는 욥의 외침에도 하나님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속성에 대해서만 묘사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대답은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어떠한 설명도 되지 않았다. 세속적 독자들은 이러한 부분에서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성경이 고통의 문제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하나님이 바로 그 대답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대답이 사실은 제대로 된 답변이다. 아무도 예수님의 고통과 구속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우리는 결국 구원을 받게 된다. 욥처럼 우리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영원의 이편에 있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아내와 나의 친구들은 우리가 욥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말하고는 했다. 우리는 욥의 생애와 비슷하게 고통을 겪고 있지만, 예수님과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 아내는 왜 그리 일찍 세상을 떠났을가? 아내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그녀의 고통은 끝났고 이제 더 이상 통증과 질병이 없는 하늘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 바로 그 사실 외에 우리는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논문 심사에서 떨어지던 1982년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는지 이제는 비로소 안다. 그리고 그 해의 주권자인 주님은 올해에도 동일하게 우리 삶의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은 그때 나와 함께 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시며, 미래에도 여전히 함께 하실 것이다. 바른 신학을 따라가는 것은 추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냥 교리적 신념을 믿는 일이 아니다. 개혁주의적 신앙은 이와는 달라야 한다. 매우 깊은 슬픔에 빠져있을 때조차 말이다. 성경적 관점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말하곤 했던 것처럼, 이는 참된 진실이다. 우리의 감정이 어떠하더라도, 비록 슬픔이 너무 크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하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안다. 그분에게 우리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한 시간에 한 번씩 아내에게 문자를 보낼 수는 없지만, 이제 그녀와 함께 거하시는 구세주께 기도할 수 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하찮고 미미한 대상까지도 돌보신다. 참새도 그만큼은 알고 있다.  


내가 사별하고 홀로 되면서, 개혁신학과 이를 신뢰하는 신앙이 결코 내 아내를 되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신학과 신앙이 사별로 혼자 남겨진 나로 하여금 오늘을 살아가도록 돕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아내를 다시 보겠지만, 나는 그 전에 여러 해 동안 이 땅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과 더불어 모든 것이 그분의 주권 안에 있다는 교리는 내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사별로 인한 깊은 슬픔이라 하더라도, 내가 남은 생애를 잘 살아가도록 지탱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A Grief Sanctified: How Reformed Theology Helps Deal with Death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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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Christopher Catherwood

크리스토퍼 케터우드는 Winston Churchill Memorial Trust의 멤버로 영국 캠브리지에 위치한 William Perkins 교회에서 25년 동안 리더로 섬겼다. 저서로 'Martyn Lloyd-Jones: His Life and Relevance for the 21st Century'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