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gck

사이트 내 전체검색

tgck

검색버튼
사이트 내 전체검색
Articles
homeHome Articles 문화 세계관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위한 조언

페이지 정보

작성자 by 김은득 목사(칼빈신학교 박사 과정)  /  작성일 2019-02-08

본문

Photo by Andreas Brücker on Unsplash

2018년 11월 30일 국민일보는 <세계관, 한국 교회의 숨구멍 될까>라는 제목 아래, 최근 한국 교회에 다시금 불어오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다루었다. 무엇보다 필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인터뷰 내용이 있었는데, 도서출판 CUP 김혜정 대표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침체되고, 1세대 운동가 중 일부는 극우보수 성향까지 보이면서 갈수록 한국의 기독교는 폐쇄적이고 세상과 말이 통하지 않는 대상으로 비춰지고 있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적게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김 대표의 진단이 얼마나 통찰력이 있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군사정권 치하에서조차 부단히 세상과의 연결을 위해, 세상의 변혁을 위해 고민하던 청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던 것을 기억한다면, 작금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침체와 폐쇄적 이미지에 대한 진단과 대안이 시급하다. 


뼈대만 소개된 기독교 세계관 운동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학자 제임스 오르(James Orr)가 처음 언급했을지라도,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관련해서 본다면 실질적으로 화란의 신칼빈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전파되었다. 카이퍼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주된 계기는 당시 국가 교육 정책(가치 중립을 근거로 세속 공립 교육에만 국가의 재정을 지원하는 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학부모는 각자의 세계관에즉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든지 혹은 로마 가톨릭 세계관이든지 간에 관계없이부합하는 자녀 교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부터이다. 카이퍼에 따르면, 세속적 공립 교육과 달리, 종교적 사립 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부모가 모든 교육 비용을 대는 것은 납세자의 입장에서 불공정한 처사이므로, 모든 시민은 각자의 세계관에 따라 자녀 교육을 선택하고 그것이 공립 교육이든 사립 교육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공통되게 국가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카이퍼는 이런 자신의 교육 정책에 걸맞는 입법 활동을 위해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역사적 칼빈주의자들이 상상도 못할 로마 가톨릭과의 정치적 연합을 통해 수상이 된 후, 자신의 교육 정책을 입법하는 일에 성공하게 된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소위 창조-타락-구속으로 패턴화되어 알려져 있는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그 운동의 뼈대만 다루는 것이어서, 그 운동의 부요하고 다양한 살점들을 다 발라버리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카이퍼가 생각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하나님의 은혜가 창조 세계를 회복한다(Grace does not abolish nature, but restore it)는 삼위일체적 신념 아래, 모든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창조 세계가 원래 선하며, 죄에 의한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하는 것(소위 창조-타락-구속)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잘 요약한 것이라면, 그 운동성은 모든 창조 세계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나게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정치, 학문, 예술, 종교 등을 회복하려고 적극적으로 각각의 영역에 참여하게 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카이퍼와 바빙크는 신학의 영역에서 당시 세계 3대 칼빈주의자로 알려졌다. 카이퍼나 바빙크는 상원 활동을 하면서 반혁명당에서 당수로서 활동하였다. 카이퍼는 화란 자유대학을 세웠고, 네덜란드의 수많은 초・중등 기독교 학교 이름이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이름을 딴다. 카이퍼는 일간 신문과 주간 신문을 창립하고 편집자로서 자신의 직업군 중에서 제일 오래 일한다. 바빙크는 네덜란드 왕립 학술위원으로 신학이 아닌 다른 분야 즉 심리학이나 교육학 등에서 열심히 활동한다.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려 했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창립자인 카이퍼나 바빙크와 달리, 한국에서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마치 기독교 세계관 자체를 연구하는, 지성의 활용만을 강조하는 경향성을 띄어 왔다. 초기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단체들, 즉 기독교 대학 설립 동역회(DEW)나 기독교 학문 연구회(KSCS)가 나름 대학 설립과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학문 양성을 목표로 시작했을지라도, 주로 기독교 세계관 자체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근본주의적 태도


사실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미국 개혁주의 진영을 통해서 매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미국을 보면, 카이퍼가 직접 “기독교 세계관으로서 칼빈주의”를 프린스턴신학교 스톤 강좌에서 소개했다. 교리 체계로서의 칼빈주의가 아닌 삶의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는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주창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카이퍼의 주장이 잘 먹히지 않았는데, 당시 미국 칼빈주의자들, 더 정확히 말해 장로교도들은 자유주의에 대한 대항마로서 전투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창조 세계의 영역들, 예를 들어 학문이나 예술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안 체계를 제공하기보다는 근본주의적 자세를 취하면서 몇몇 중요한 기독교 교리들을 보호하는 데만 급급하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대표 신학자인 그레샴 메이첸(Gresham Machen)의 당시 별명이 미국의 카이퍼(American Kuyper)였다. 정치, 교육, 학문, 언론 등 거의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카이퍼와 프린스턴신학교의 좌경화에 대항해 기독교 근본 교리를 사수하고자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운 메이첸의 이미지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카이퍼가 설립한 화란 자유대학을 졸업하신 손봉호 교수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손 교수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소개된 80년대 초반에는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 신학적 토대를 가지고 사회에 이미 참여하는 그룹과 마땅히 사회에 참여하고 싶으나 어떤 신학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한 보수주의 그룹으로 한국 교회가 이원화되어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열 상황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적극적으로 흡수한 곳은 당연히 보수주의 그룹이었는데, 그 그룹의 신학적/문화적 성향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창시자인 화란의 카이퍼보다 미국의 카이퍼에 가까웠다. 아니, 미국의 카이퍼보다 신학적으로 더욱더 보수적이었으며, 문화적으로는 더욱더 이원론적이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


기독교 세계관 자체는 타 세계관과 구분된 혹은 심지어 반립된(anti-thetical) 기독교 세계관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비기독교적 관점의 통찰력이나 진리를 단순히 기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하는 해석학적 프레임이 되어버린다면, 바로 그때 기독교 세계관 운동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코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의 경우, 이교도 철학, 구체적으로는 스콜라 철학(대표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제공하는 진리를 인정하기를 거절한다. 또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주창자 중 하나인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 역시 카이퍼나 바빙크가 자신들의 신학에서 온전히 성경적이지도 종교개혁적이지 못하고, 스콜라 철학을 차용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 개혁신학자들은 이교도 철학이나 세속적 사상가들에게서도 진리의 빛이 있으므로, 그 진리의 파편들을 그들의 신학에 절충적으로 사용하였다. 한국에 전파된 밴틸리안/도예베르트안 전제주의가 극명하게 보여주듯이, 기독교 세계관이 성경과 일반적 진리(과학이나 이교도 철학 등)를 양립불가한 사실로 전제할 때,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은 사실상 기독교 세계관의 게토화가 일어나게 된다.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연관이 깊은 창조과학 주창자들이 왜 과학계에서 게토화되었는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과학에서의 진리와 성경 진리의 양립불가성을 전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전제를 받아들일 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 세계관 주창자들의 주장을 자체적으로 교정하거나 혹은 다른 관점에 의해 교정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고, 자기와 다른 세계관 주창자들이 오류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 주창자들 가운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이미 정답으로 전제하고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해지는 분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든, 즉 극우든지 극좌든지,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 공식(창조-타락-구속)에 의거해 정답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작금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시의적절하지 않으며 용도 폐기되어 마땅한가? 아니다! 필자는 고쳐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떻게 해야 기독교 세계관이 한국 교회의 숨구멍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완벽한 대안은 없다. 다만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지금까지 잘못한 부분들을 수정하고, 나름 그 운동이 성공했던 사례들에서 지혜를 얻고자 한다. 


예배를 통한 습관형성적 세계관 운동


먼저 포스트모던 사회가 발견한 진리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의 변화가 반드시 인간 삶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관이라는 단어가 엄밀히 번역하면, life and world view 혹은 view of life and of world에 가깝다. 세계관 운동을 시작할 때, 우리의 생각(view)이 바뀌면 우리의 삶(life)이 변화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면 세상(world)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제가 분명하였다. 그러나 누구나 지식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보다 분리하는게 더 쉽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깨닫게 된다. 자신의 삶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최근 기독교 세계관 운동 내에서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가 주장하는 새로운 흐름은 우리가 충분히 적용할 만하다. 인간은 생각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열망에 의해 변화된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즉 인간의 존재를 이성과 연결시킨 데카르트와 달리, “나는 바로 내가 바라는 무엇, 열망하는 무엇, 혹은 예배하는 무엇”이라면서 인간됨을 인간의 열망/욕망으로 연결시킨 것이 어거스틴이다. 이런 어거스틴의 지혜를 가지고, 우리의 욕망을 거룩한 욕망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예배라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언가에 대한 사랑/열망이 하나님의 대한 사랑/열망으로 변화됨을 보게 된다. 우리 사랑의 대상이 바뀌고, 예배가 삶으로 삶이 예배가 되면, 또한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면, 이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습관이 되어, 나의 삶을 변화시키게 된다. 세계관 운동과 관련해 생각하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원리 중심의 운동에서 예배를 통한 습관형성적 운동으로 변해야 한다. 


일상성과 공공성을 회복하는 세계관 운동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영향력이 있으려면, 그 세계관이 각자의 삶과 시대의 문제에 실제적으로 해답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영어로 “View of life and world,” 혹은 “life system”으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미 이 영어 단어 속에 일상성(life)과 공공성(world)에 대한 제고가 있었다. 19세기에 세계관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유행했던 이유는 근대화에 의한 사회적 분화과정(Social differentiation)과 연관이 깊다. 서구 기독교사회에서는 다양한 종교나 종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유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분화과정으로 인해서, 주체적인 자아는 각 사회영역에서, 특히 학문과 정치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식할 필요가 없게 된다. 고로 교회에서 신실한 예배자라도 학문의 영역에선 무신론자처럼 연구를 할 수 있고, 심지어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이성의 요구와 감정의 필요, 양쪽 모두 충족되는 세계관을 필요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모든 영역에서, 그것이 사적이든 공적이든,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시도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사회분화과정 속에서도, 신실하게 일상의 영역, 공공의 영역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카이퍼는 당시 상황 속에서 칼빈주의 세계관을 각자의 세계관에 따라 자녀들을 양육시키고자 하는 학부모들의 교육 열망과 연결했다. 카이퍼가 대변한 학부모들은 사회주도층이 아니었고, 당시 사회에서 소외된 민중 계층이었다. 바빙크는 당시 유럽에 여성 참정권이 없었는데, 성경적 원칙에 따른 여성 참정권을 주창하였다. 마크 놀(Mark Noll)이 그의 책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에서 강조하듯이, 미국의 학문 세계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자들이 그 영역을 무신론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에게 뺏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크 놀이 이 지성의 스캔들에서 자유로운 곳으로 카이퍼리안(예를 들어, 앨빈 플랑틴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리처드 마우, 제임스 스미스 등)이 가득한 칼빈칼리지를 예로 든다.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의 설립에서 보여주듯이, 일상성과 공공성을 기반으로 그 운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역사에서 그나마 절대적 왕권의 영향 아래서 목소리를 내어왔던 것이 종교(예를 들어 고려 왕조에서는 불교, 조선 왕조에서는 유교)라는 손봉호 교수의 역사 인식과 또한 민주주의 경험이나 시민사회 활동이 빈약했던 한국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기독 시민이 자발적으로 세상의 변혁과 윤리적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라는 손 교수의 현실 인식이 결합된 정신이 기윤실의 설립 근거이다. 카이퍼, 카이퍼리안, 그리고 손봉호 교수가 추구한 기독교 세계관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강조점은 다를지라도, 사실 일상성과 공공성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이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세계관이라 할 수 있겠다.


이슈에 대한 결론이 아니라 심성과 태도 형성을 위한 토론 문화


기존의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어떤 이슈를 중심으로 그 이슈에 대한 결론 혹은 찬반을 내려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창조-타락-구속의 원리 중심의 세계관 운동은 결국 세상 가운데 벌어지는 쟁점에 대해 이것이 기독교적이다 혹은 반기독교적이다 라는 식의 결론을 맺을 수 있을 때 그 세계관의 원리가 삶의 현장과 연결되고 실제적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전제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기독교적이라고 굳게 믿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누구든 앞다투어 결론을 내리려는 태도는 찬성과 반대로 이분화되며, 반대편을 악마처럼 여기는 경우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정짓는 태도 대신에 진지한 토론을 통해서 다양한 의견을 마주하는 심성과 태도를 형성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교회에서의 토론회는 자칫 분열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자신과 다른 성도의 의견 차이에도, 그 성도를 사랑으로 받는 훈련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하겠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 대해 겸손히 경청하며,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훈련이 된다면, 어쩌면 이런 훈련들이 이기적이며 교만한 세상 가운데 정말로 필요한 심성과 태도를 형성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토론해도 싸우지 않는 교회이며, 대화와 상식이 통하는 교회이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하면 우리의 이성은 더 빛이 나며, 우리의 감성은 더 배려하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관 관련 글

인간의 욕망

by R. C. Sproul / 2019-02-2019-02-20

하나님의 새 창조가 우리의 창조성에 중요한 이유

by Thomas Terry • Ryan … / 2019-01-1019-01-10